나만의 고유한 삶, 그리고 언어의 힘
(이건 초고를 마치면서 제가 만든 시작글입니다. 뭘 어떡해야 할 지 답답하기만 한 청년들과.. 위로와 혜안이 필요한 분들께 말을 걸면서 책 원고를 만들었습니다.)
팬데믹의 공포가 우리의 삶을 짓누를 때 자유와 사랑의 욕망이 차고도 넘쳤죠. 우리는 팬데믹만 끝나면 멋지고 아름답게 살 것이라고 다짐했습니다. ‘자유롭고 싶다.’ ‘마음껏 만나고 사랑하고 싶다.’ 이건 팬데믹 시대에 가장 소원했던 우리의 욕망이었습니다. 격리의 시대를 이제 지났는데 그토록 기대한 대로 모두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고 있나요? 이동과 탐험을 다시 시작하고, 자신만의 고유한 삶을 살고 있는지요?
안타깝게도 우린 이전과 다를 바 없는 삶을 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 사회는 여전히 개별적이고 고유한 삶을 통제하는 권위주의 사회, 차별과 배제를 정당화하는 이항대립의 사회이니까요.
우리의 삶에 어떤 문제가 있다면 언어감수성(language awareness)이 동원되어야 할 때입니다. 응용언어학을 가르치고 연구하는 나는 자유와 사랑에 관한 자기배려를 위해서라도 비판적인 언어감수성 교육이 모두에게 필요하다고 주장합니다. 언어감수성이 있다는 건 보고 듣고 말하고 읽고 쓰는 ‘언어’에 민감한 것입니다. ‘민감하다’는 건 무던하지 않은 것입니다. 비판적 감수성을 가져야 하는 언어는 일상 대화, 광고나 영화, 시와 소설, 정치나 경영 담론 등 여러 장르에서 각기 다른 형태와 내용으로 등장합니다.
그렇게 언어에 관한 비판적인 감수성을 가진다면 우린 자유를 속박하고 사랑하는 관계를 왜곡하는 여러 종류의 고립과 고통에 대해 좀 더 민감할 수 있습니다. 아픈 것을 아프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느낄 뿐 아니라 아프다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왜 그런 일이 생기는지 궁금해하고, 다른 삶의 방식은 없는지 탐구하게 됩니다. 언어감수성이 생기면 우리는 더욱 경청하며, 질문하며, 대화에 참여하고, 이야기를 나누며, 논증을만들게 됩니다.
감염의 시대를 지나 온전한 자유를 찾고 서로 존중하는 사랑을 선택하려면, 자신과 세상을 둘러싸고 있는 언어와 기호를 비판적으로 이해하고 새롭게 편집할 수도 있어야 합니다. 세상의 질서나 나의 내면은 모두 언어와 기호로 구성된 것이니까요. 회복과 변화를 위한 연장통으로 자기만의 언어기술과 언어감수성을 연마해야 합니다.
그런 생각이 겹쳐지면서 나만의 고민과 고백, 탐색과 확신의 글을 정리하여 이 책의 원고를 만들었습니다. 권력에 결박되지 않고 보다 나은 언어사회를 꿈꾸는 것이야말로 연구자로서 내가 붙들고 있는 귀한 신념이었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고통을 이겨내고 세상을 다시 직면하면서 나는 앞으로 랭스코퍼(langscoper)의 인생을 살기로 결심했습니다. 마이크로(micro)스코퍼는 작은 사물을 보는 현미경입니다. 텔레(tele)스코퍼는 먼 대상을 보는 망원경입니다. 언어를 통해 세상을 지켜보는 렌즈는 랭스코퍼인 셈이죠.
마치 그림을 붓과 물감 같은 도구로 그리는 것처럼 나는 권력과 자유, 소외와 사랑, 개인과 사회, 회복과 변화를 내가 가르치고 연구하는 언어기술, 언어감수성, 언어통치성으로 서술하고, 해석하고, 설명하려고 합니다. 우리의 문제, 사회의 문제는 언어의 문제입니다. 모든 것이 언어의 문제라고 말하면 지나치겠지만 자유를 지키고, 사랑을 욕망하며, 새로운 시대를 기획하는 일에 랭스코퍼라는 연장통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예를 들면, 억압적인 권력은 대개 관례적인 언어사용에서 보존됩니다. 조지 오웰의 소설 《1984》를 한번 보세요. 차이와 다양성의 언어를 억압하면서 가부장적 사회구조를 유지하고, 사랑하고 사랑받고자 하는 욕망의 심리를 왜곡하며, 일상적인 자유마저 철저하게 통제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대체 권력자는 왜 언어를 통제할까요? 그건 언어야말로 차이와 다양성의 가치를 빼앗고, 개인의 자유와 사랑을 통제하여 지배적인 권력에 순복시킬 수 있는 핵심 장치이기 때문입니다.
사랑 안에서 살면서 자유롭게 산다는 것이 쉽지만은 않습니다. 나만 해도 가부장적 가정, 권위주의 사회에서 자랐기 때문에 각자의 공간을 존중하며 서로를 배려하는 관계성에 익숙하지 못했습니다. 다행히 나는 서구 교육사회를 경험할 수 있었고 언어를 통한 통치사회를 연구하면서 자유와 사랑의 가치를 새롭게 성찰할 수 있었습니다. 자칫 반지성주의, 종교적 근본주의, 서구 중심주의에 갇힐 수도 있었지만 인문대학에 소속된 교수로 식민주의와 복종적 주체에 대해 꾸준히 문제의식을 축적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세월호 참사부터 팬데믹 사태까지 우리에겐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이 책은 우리가 목격했던 위험사회의 징후를 언어감수성 연구자의 시선으로 다시 해석한 결과물입니다. 고통의 감정을 도려낸 유토피아적 내면과 사회질서를 섣불리 낙관하지 않고 우리를 미궁에 빠뜨린 고립과 대립의 텍스트를 담담하게 살펴본 것입니다. 배타적 공방이나 공학적 해법이 난무하는 지금 시대에서 나는 여전히 언어감수성 교육의 힘을 믿습니다. 버티는 힘, 명민하게 비판하고 새롭게 창조할 수 있는 힘은 언어와 기호를 매개 삼아 더욱 딴딴하게 가공될
수 있습니다.
나부터 더욱 자유롭고, 온전하게 사랑하며 살고 싶습니다. 언어로부터 구성되는 실천의 힘도 기대하려고 합니다. 언어로 조작하고 포획하는 통치권력, 혹은 언어적 타자의 정체성이 왜곡되는 메커니즘에 대해서 더욱 많은 분들과 나누고 싶습니다.
신간 정보: https://www.aladin.co.kr/m/mproduct.aspx?ItemId=3335914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