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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동일 Feb 15. 2024

집으로 가는 길 15

개강 준비, 그리고 귀국을 앞두고

1. 2월 이맘땐 수업 준비를 하는데 이번엔 진척이 너무 없네요. 적막하고 평화로운 이곳 생활이 좋은가 봅니다. 분주함이 자랑이고, 내세울 성과가 없다면 결핍의 존재로 평가되는 세상으로 돌아갈 준비가 되지 않은 듯..


2. 어디나 그렇지만 대학이란 직장도 권력을 지향하고 갈등으로 충돌하고 세상 풍조에 휘둘리는 사람들이 넘치는 곳입니다. 지켜보고 경청하고 지혜를 찾고 공존하자며 삶의 기술을 발휘하는 업무가 만만치 않습니다. 요즘 제 심정은.. 선교단체에서 훈련 마치고 세상으로 파송되는 느낌입니다.


3. 이번 학기에 2과목을 가르칩니다. 수업 내용을 좀 바꿔보려고 합니다.


4. ‘담론’에 관한 강의에서는 올해 미국이나 한국에서 큰 선거가 있는 만큼 늘 사용한 예시 자료에다가 정치 캠페인에 드러난 텍스트를 추가할까 합니다. 특정한 정당(정치)에 편향되지 않은 저로서는 다양한 이념에 포획된 언어와 권력의 상관성을 폭넓게 다뤄볼 수 있겠습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재선을 위해 공격적으로 텍스트를 배치할 것이고.. 4월 총선을 앞둔 국내 거대 정당의 언어와 기호도 단선적인 이데올로기로 파악하기 힘든 기민한 담론전략으로 채워질 것입니다.


5. [[그런 큰 권력이 주도하는 세상 한복판에서 평범한 개인들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고개를 돌리거나 도망가면 마음은 편할텐데 그럴 수만도 없습니다. 자꾸 들리고 보이니까요. 내 삶의 지경과도 걸쳐지니까요. 방치하면 기득권력의 담론질서에 아무런 변화는 없을 것이고 우리의 품행은 오독/오용되기만 할 것입니다.]]


6. 사회언어학 과목에서는 부산시 영어상용도시와 같은 국내외 여러 현장과 언어정책을 촘촘하게 주목할까 합니다. (단일)언어주의와 영어사용에 관한 신화적 믿음체계를 실증적인 자료로부터 논술한다면 학생들이 좀 더 관심을 두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7. 세상 밖 언어(통치성)에 대해 감수성을 높이는 것이 제가 가르치려는 수업의 목표입니다. 많은 자료를 봐야 하는데 여기서 모두 구할 수도 없고.. 귀국과 개강을 앞두고 여러 상념이 겹쳐지면서 수업 준비가 더뎌지고 있습니다. 


8. 아니, 그냥 지금이 1년 중에 집중력이 늘 떨어지는 때인 것 같습니다. 귀국하자마자 수업인데 아마도 3월 내내 고생할 것 같습니다. 최근에 기고문 청탁도 받고 프로젝트 참여도 요청받았지만 모두 거절했습니다. 지금 제게 필요한 건 여전히 여백이 가득한 일상입니다. 


9. 다시 시작할 서울 생활에서 기대되는 것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어머니 댁에 맡겨둔 강아지(깐돌)와 야옹이(제니)와 재회하는 순간입니다. 유기견/유기묘라서 우리에게 다시 버려진 느낌을 주고 싶지 않았는데.. 미국에 있는 내내 그들이 그리웠습니다.


10. 집-학교-교회만 다니는 리추얼이겠지만.. 새로운 계획도 있습니다. 일주일에 한번씩 그림을 다시 배울 참입니다. 어디든 등록해서 땀을 흘리며 운동도 하려고 합니다. 숲길도 다시 걸을 것이고 교회에서 맡은 이런저런 일도 기쁘게 할 것입니다. 그런 생각을 하니까 마음이 편해집니다.


11. <<버티는 힘, 언어의 힘>> 신간에도 일 중독에 대해 솔직하게 다루었지만.. 짜릿하든 고통스럽든, 롤러코스터 탈 때 느끼는 감정으로 일을 한다면 그건 ‘중독의 상태’입니다. 다시 시작하는 서울 생활에서 제가 경계하는 것 중 하나는 ‘일하는 삶’을 과시하면서.. 평범하고도 차분한 저만의 삶의 양식을 폄훼하는(당하는) 것입니다. 


12. 거창한 목표와 대상 지향적인 삶, 선명한 의도나 불굴의 의지로부터 도출되어야 하는 결과에 집착한다면 각자만의 고유성이랄까요, 자율적이면서도 (하나님이 인도하는) 개방적인 삶은 소멸됩니다. 물론 중독의 상태는 지루하고 유약한 일상에 놓인 것으로 느끼는 우리를 끊임없이 유혹하겠지만 말입니다.  


13. 강박적으로 일을 하면 자신도 타인도 온전히 사랑할 수 없습니다. 일의 성과가 쉼의 조건이 되기도 합니다. 저는 서울 한복판에서도 평범하고도 평화롭게 지낼 것이며 교회든 학교든 어디서든 너무 열심히 살려고 노력하지 않을 것입니다. 


14. 제가 필요한 곳, 제가 용기와 지혜를 발휘해야 할 곳에서 최선도 다하겠지만.. 허락된 시간에만 일할 것이며 저로서는 어쩔 수 없는 결과에 연연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사는 것이 올해 기도제목입니다.  


15. 이렇게 긴 글을 쓰면서 제 마음을 다스려보니.. 미숙하다는 느낌, 서두르는 마음이 좀 사라집니다. 다시 수업을 준비해봐야겠습니다. 말끔하고도 훌륭하게 준비되지 않아도 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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