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이강인 선수 편입니다
1. 저는 이강인 선수 편입니다. 잘못한 것 없다고 편드는 것 아닙니다. 그가 단 이틀만에 어떤 보호도 없이 이만한 비난과 모욕을 갑작스럽게 감수해야 할 이유가 없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2. 한국 뉴스를 잘 보지 않아서 이제서야 알았습니다. 그런데 기사 검색을 아무리 해봐도 아주 제한된 출처만이 인용되는 보도와 논평이 반복될 뿐입니다. 그런 중에 미디어는 단 이틀만에 이강인 선수를 우리가 오랫동안 알고 있던 것과 전혀 다른 의미주체로 전환시켰습니다. 놀랍고도, 아니 너무나도 거칠고 무서울 뿐입니다.
3. "유사 텍스트가 반복적으로 보이고 들리도록 배치하는 오버워딩(overwording) 관행은 진실을 만드는 탁월한 화용 전략입니다. 나치 정권과 같은 전체주의 권력은 능수능란한 프로파간다 기술 중 하나로 단순한 진술을 국민들이 반복적으로 듣고 보도록 유도했었죠(...)
PR 커뮤니케이션에서도 제품을 팔고 브랜드를 알릴 때 사용하는 탁월한 전략으로 오버워딩을 꼽습니다. 악플이라도 쥐어짜내게 하는 노이즈 마케팅, 네거티브 선거전략이 여전히 시장이나 선거 캠페인에서 사라지지 않는 이유입니다." (<<담론의 이해>> 176쪽)
4. 이강인 선수가 수년 동안 대표팀의 선수들과 함께 협력하고 우정을 나눈 말과 기호는 모두 거짓이었습니까? 그리고 주먹을 휘둘렀다는 바로 그 행위성만이 이강인 선수의 진실이니 우린 그동안 속은 것입니까?
5. 싸움의 콘텍스트는 단선적이거나 일방적일 수 없죠. 여러 해석이 가능합니다. 축구장 안팎의 다른 권력관계도 있을 것이고 시간축의 갈등이 있었겠죠. 그러다가 멱살을 잡히니 욱하고 받아쳤겠죠. 다르게 혹은 영리하게 반응했다면 더 좋았겠지만 그는 고작 22살의 축구선수일 뿐입니다.
6. 우린 누군가와 그렇게 싸운 적이 없나요? 못된 행동을 했다며 대단한 누군가가 당신의 멱살을 잡을 때 우린 대개 어떻게 반응하나요? 이강인 선수의 행위를 무작정 방어하는 것이 아니라.. 어리다고, 건방지다고, 감히 캡틴에게 주먹질을 했다고, 몇 곱절이나 앙갚음을 당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7. 그걸 바라본 우리라도 다른 위치에서 다른 의견들을 낼 수도 있는데 (혹은 기다려볼 수도 있는데) 왜 단번에 똑같은 목소리로 이강인 선수의 어린 시절, 가족, 동료, 인격, 축구선수로서의 역량까지도 폄하하는 걸까요? 단 이틀만에 말입니다.
8. 새롭게 나온 제 단행본 <<버티는 힘, 언어의 힘>>에서 두 구절을 소개합니다. 한 곳은 큰 집단이 개인을 한번에 무력화시키는 공포적인 집단사회 ‘폐쇄된 언어사회’입니다.
(...)늘 불편하거나 두려운 장면이 있습니다. 힘센 집단이 개인을 곤궁에 빠뜨리는 장면이죠. (...) 난 큰 집단이 개인에게 겁주는 곳이 늘 싫었습니다. 그런 사회는 큰 집단이 제시하는 지침으로 개인이 존재 가치를 갖습니다(...) 소란스럽지만 거긴 언어를 자유롭게 사용하 곳이 아닙니다. 그곳은 위력적이면서 위험한 사회입니다. (117, 119쪽)
9. 또 하나는 한국 축구에 관한 담론질서를 다룬 ‘축구를 보지 않아도 되는 이유’입니다.
(...) 그건 당연한 상식이 아니라 얽힌 텍스트들이 만든 담론의 효과일 뿐입니다(...) ‘태극전사’로 호명되는 선수들이 하나같이 결의에 가득한 표정으로 애국가를 부르고 시합에 임합니다. 시합이 끝나면 미디어는 “우리 태극전사가 투혼을 발휘했다”며 감동과 감사를 전합니다. 선수들도 국민께 힘이 되었길 바란다며 눈물을 글썽입니다. 날짜만 가리면 이전 대회의 기사와 구분도 되지 않는 유사 텍스트입니다. (64쪽)
그리고 누구나 갑작스럽게 차별을 당할 수 있습니다. 하나만 두고 그걸 진짜라고, 혹은 단 하나의 진실이라고 (그리고 나머지는 가짜거나 적의 음모라고) 계몽하고, 훈계하고, 담합하는 사회는 무서운 곳입니다. (6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