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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브라더스팜 Nov 22. 2019

자랑질, 호밀빵에 스미다

한때 직장상사였던 그분은 말이 느렸고, 톤은 일정하며, 말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말이 많았다. 틈만 나면 불러들여 자기 자랑으로 끝나는 경험담 서너 편을 들려줬다. 들어줄 사람이 나밖에 없었다. 당시에 나는 적당히 갈무리하고 일어설 능력과 배짱이 부족했고 을의 위치에서 어떻게든 잘 보이려는 마음이 앞섰기 때문에 통으로 다 들었다. 정로환처럼 작고 까만 눈알을 응시하다 때가 되면 고개를 끄덕거리거나 추임새를 넣어주는 연출은 정신적으로 몹시 피곤했다. 어느 날은 마주 앉아 듣다 깜박 졸았다. 내가 내는 '커억!'소리에 내가 놀라 번쩍 눈을 떴다. 코를 고는 실수까지 저질렀다. "헛! 죄송합니다." "아니 아니 괜찮어. 그래 가지고 그때 내가 있잖어...." 그분은 내가 코를 골며 자는 동안에도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계속 말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굳이 마주 앉아 있지 않더라도 혼자서 능히 말할 수 있는, 나 대신 인형을 앉혀놓아도 말할 수 있는, 그만큼 특색 있는 분이구나 생각했었는데 뿌리치지 못하고 그렇게 2년을 들었다. 묘하게도 그 쓸데없는 수 백 편의 이야기가 쓸데없이 기억창고를 차지하고 있다가 하나씩 불쑥 튀어나오곤 한다.      

80년대 후반, 그분은 월급을 모아 불리고 불려 땅을 샀고, 그 땅에 건사한 2층 양옥을 지어 이사했다. 동네 복덕방에 가 대문 옆 상하방에는 자취생을, 2층에는 신혼부부를 면접을 본 후 세로 들이겠다 했더니만 그다음 날부터 신청자가 쇄도했다. 인품이 불량품인 것으로 유명한 그 분답게 하루가 지날 때마다 세를 올려 다시 내놓고 다른 복덕방에다는 더 올려 내놓았다. 하루하루가 간질간질 좋았다고 한다. 그렇게 미루고 미루어 올릴 대로 올려놓은 다음 2박 3일 가족여행을 다녀온 후 면접을 실시하기로 하고 집을 떠났다. 룰루랄라 신나는 여행길 그러나 여행지에 도착하고서는 묘한 불안감에 휘말렸다. 새 집을 누가 가져가 버릴 것만 같았다고. 집은 누가 업고 가는 물건이 아니니 제발 안심하라는 사모님의 다그침에도 불안감은 지워지지 않았다. 몇 시간을 끙끙 앓다가 묘책을 찾아냈다. 그분은 틈만 나면 공중전화박스로 가 빈집에 전화를 걸었다. 당연히 신호만 갈 뿐이다. 당연히 멈추지 않을 위인이다. 매 시간마다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이틀째 되는 날 저녁,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당당한 응대. “여보세요.” 그분은 번호를 잘못 눌렀나 싶어 죄송을 품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거기 어디십니까?”하고 물었다. 상대는 퉁명스럽게 “여기요? 몰라요. 왜요?”하며 되받아쳤다. 당당함에 당황한 나머지 “거기 혹시 제 집 아닙니까?” 한동안 정적이 흐르고 “아... 예... 그냥 잠깐 들렀어요.” 상황은 역전됐다.

“뭔 일로? 밤손님이시요?”

“그것은 아니고요. 그냥 날도 덥고 뭐...”

“날 더운데 왜 남의 집에 앉아 있어!”

“.....”

“내 동생이 서부서 강력계 형사여 이 시키야!”

“... 더러워서 나가요. 나가!”  

집에 돌아와 샅샅이 살펴보니 여유만만 밤손님이 다른 건 손도 못 대고 14인치 컬러 텔러비전과 미제 다리미만 가져갔다고 한다. 그게 다 자신의 전화 때문이었다고, 다른 집 같았으면 아마 싹 다 털렸을 것이라고, 나 이런 사람이라고 하듯 턱을 추켜올려 흡족한 표정을 만들어냈다. 나는 무슨 내용인지 재깍 파악하지 못하고 머릿속에서 한참을 맴돌았다. 곧이어 그분은 입맛을 다셔가며 자신의 놀라운 예지력, 수단 발굴에서의 현명함, 상대를 제압하는 근엄한 목소리 그리고 신고 없이 그냥 봐줘 버리는 어떤 관대함 같은 것을 추출해 설명했다. 이거 자랑인가? 자랑이었다. 자신을 닮고 싶겠지만 그건 쉽게 안될 걸 하는 식의 자랑이었다. 그분을 떠올리면 인간의 결핍, 결여, 결락 같은 단어들이 따라 나온다... 여러 면에서 어려운 사람이었다.  

온기를 머금고 있는 큰 덩어리를 먹을만한 크기로 썰었다. 김과 함께 피어오른 호밀빵 특유의 향이 코를 적신다. 거친 표면을 향해 입을 벌린다. 단단해 보이는 표면은 뭉툭한 앞니에 저항 없이 바스러지며 속살을 밀어내 준다. 맛나다. 온기가 싹 가신 뒤에도 맛나다. 너무 맛나다. 우연히 호밀의 적당 비율을 맞춰버린 것일까. 세상에 세상에 내가 이런 걸 만들었다며 주위 몇 사람에게 돌렸다. 자랑을 했다. 박수를 치길래 생색까지 냈다. 집으로 가는 길, 머릿속에서 한 사람이 훅 떠오르더니 휙 지나간다. 그분이다. 이미 닮아져 있는 걸까.

언동을 되돌아보니 아... 부끄러워.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렇게 습관이 된 걸까. 굳어졌나. 내 손으로 만든 것이 내 입안에서 흐뭇함을 만들어냈으면 거기에서 멈춰야 한다. 싹 다 가두었어야 했다. 드러내더라도 가릴 것은 가려야 한다. 알맞게 가리는 게 보기에도 좋은데 낯부끄럽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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