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양희 시인의 ‘마음의 달’
사람은 게으름을 부려도 우주는 제 할 일을 미루는 법이 없다. 오늘은 꼬박 한 달을 기다린 달이 온전한 제 모습을 드러내는 날이다. 도시의 불빛에 흐려지긴 해도 보름달을 올려다볼 때면 절로 두 손 모으는 마음이 된다. 어렸을 땐 기도하는 마음을 알지 못했다. 엄마 따라 절에 갔을 때 부처님 앞에서 한참 동안 두 손 모으고 눈감은 엄마를 기다리는 일은 고역이었다. 성인이 돼서는 여행지의 절에 가면 꼭 부처님께 삼배를 드리고 잠깐이라도 앉아 기도한다. 인생은 내 노력만으로 어찌할 수 없는 부분이 더 많기 때문이다.
체력이 떨어지면서 여행에 흥미를 잃은 요즘엔 저녁 산책 때 달을 쳐다보는 자리가 기도처가 된다. 예전 외할머니가 마당 장독대 한쪽에 정화수 떠 놓고 정성스레 빌던 장면이 오랜 기억 속에서 불쑥 떠오른다. 그 옛날 외할머니의 간절한 기도가 지금의 내 기도와 다르지 않다는 걸 이제야 알아차린다.
마음의 달
천양희
가시나무 울타리에 달빛 한 채 걸려 있습니다
마음이 또 생각 끝에 저뭅니다
망초꽃까지 다 피어나
들판 한쪽이 기울 것 같은 보름밤입니다
달빛이 너무 환해서
나는 그만 어둠을 내려놓았습니다
둥글게 살지 못한 사람들이
달 보고 자꾸 절을 합니다
바라보는 것이 바라는 만큼이나 간절합니다
무엇엔가 찔려본 사람들은 알 것입니다
달도 때로 빛이 꺾인다는 것을
한 달도 반 꺾이면 보름이듯이
꺾어지는 것은 무릎이 아니라 마음입니다
마음을 들고 달빛 아래 섰습니다
들숨 속으로 들어온 달이
마음속에 떴습니다
달빛이 가시나무 울타리를 넘어설 무렵
마음은 벌써 보름달입니다 <시 전문>
빼어난 문재를 가진 천양희 시인은 대학 3학년 때 박두진 시인의 추천으로 시를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그러나 시인의 삶은 평탄치 않았다. 박두진 시인의 제자와 결혼하지만 결혼 5년 만에 남편이 딴살림을 차리면서 혼자가 됐다. 여성 일자리가 드물던 시절 생활전선에 뛰어들어 갖은 고생을 했다. 시인은 생의 의지를 잃고 헤매기도 하지만 마음을 다잡고 1980년대 들어 시작을 이어갔다. 시인이 절망과 고통 속에서 다시 일어나 길어 올린 것은 분노와 방황을 모두 삭여낸 시였다.
모진 운명의 장난에 둥글게 살지 못한 여인은 환한 보름밤 달빛에 그만 어둠을 내려놓고 달을 바라본다. 배반에 가슴을 찔려본 사람들은 달도 때로 빛이 꺾인다는 걸 안다. 그래서 꺾어지는 건 무릎이 아니라 마음이라는 것도. 그 마음을 들고 달빛 아래 선 여인의 들숨 속으로 들어온 달이 마음속에 떴을 때 그 여인에겐 그전과는 다른 세상이 펼쳐졌을 것이다. 시인은 시의 세상에서 자신을 넘어 타인의 상처까지 가만히 어루만진다.
달 보고 자꾸 절하는 사람들, 어쩌면 그들의 뒷모습엔 구멍 난 가슴이 비쳐 보일지도 모른다. 부모님 일로 꺾이고, 자식 일로 꺾이고,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 밥벌이 때문에도 가슴이 성하긴 힘든 시절이다. 올해의 마지막 슈퍼문이 뜨는 오늘 밤, 쏟아지는 달빛 아래 두 손 모아 보고픈 이들의 안녕을 빌어야겠다. 먼 곳에 계신 엄마와 가까이 있는 가족들, 친구들 모두 안녕하길^^
#천양희#정현종#슈퍼문#마음의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