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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두 아줌마 Feb 04. 2021

세상에서 제일 이기적인 것, 용서


생각에 다른 길을 내면 됩니다. 자신의 전제를 포기함으로써. 

우리는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으면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지?”라고 합니다. 

‘저 사람은 나한테 이러저러해야 한다’는 전제가 있기 때문이죠.

하지만 그 전제를 버리면 갑자기 홀가분해집니다.

                                                                                    by 채운 <철학을 담은 그림>     



‘전제’는 어떻게 버릴까?

도사나 성인이 아니어도 버릴 수 있는 걸까? 

맞는 얘기인 것 같기는 한데 고개가 절로 갸우뚱해졌다.     


어찌 보면 그 ‘전제’는 사회화의 결과물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 선생님, 미디어 등의 영향으로 ‘누구는 이러저러해야 한다’는 

확고하고도 일반화된 고정관념을 가지게 되는 거다. 

고정관념은 ‘기대’라는 매개체를 작동시켜 상대를 바라보게 만든다.


그래서 우리는 요구하게 되는 거다. 

직장 상사에게는 ‘리더’답기를, 후배에게는 ‘후배’답기를, 

내 마음을 준 친구는 ‘친구’답기를, 가족에게는 ‘가족’답기를...     


그러나 어디 세상이 그런가.

리더는 내 생각 속 리더 같지 않고, 후배는 후배답지 않으며, 친구도, 가족도 다 실망스럽다. 

단지 ‘실망’이라고 쓰인 단추만 누른 거면 괜찮겠는데 그 단추 옆에는 

항상 다른 단추 하나가 세트처럼 딱 붙어있다. 바로 ‘상처’다.     


그래서 때로는 울면서 상대를 향해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왜 그런 거냐고. 왜 그것밖에 되지 않느냐고. 왜 이렇지 못한 거냐고.

그렇게 질문하면서도 마음 깊은 곳에서는 이미 다 알고 있다. 

때론 그 요구가 그들에게 부당할 수도 있다는 걸.     

 나와 다른 성장 배경을 가진 그 사람 입장에서는 

그 선택이 최선이었을 수도 있다는 걸.

누군가의 됨됨이를 아쉬워할 수는 있어도 

나무랄수는 없는 일이라는 걸 말이다.


그리고, 내가 그 사람 입장이라면 절대 그렇게 행동 안 했을 것 같지만 

사실 그보다 더한 행동을 하고 있었을 수도 있다. 

살아보니, ‘내로남불’은 남 손가락질하기 위한 단어만은 아니더라. 

바로 내 속에 똬리를 틀고 오늘도 살아 숨 쉬고 있다.     


어쩌면 ‘전제’를 버린다는 건 

내 부족함을 깨달으라는 말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절대 안 그럴 것 같지만, 

되돌아보면 나도 비슷한 행동을 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때 난 ‘인지상정’이라는 단어로 날 합리화시켰었는데 

생각해보니 그건 ‘내로남불’의 전형이었다.      


하지만 세상에는 영화에나 나올 법하게 정말 악마 같은 사람도 있다. 

스타트업 <센트비> 대표 최성욱님의 말처럼 말이다.     


“창업하면 여기저기서 내게 총을 쏘는 느낌이고 높은 벽을 경험할 때가 많습니다. 

상식을 벗어나는 악마 같은 사람도 곳곳에 많습니다.”     


그럴 땐 그저 슬프게 고개를 끄덕여야 하지 않을까.

난 도저히 그 사람을 이해할 수 없지만 

세상에 내가 이해 못 하는 게 어디 한둘인가 말이다. 

어떨 땐 나 자신도 이해가 잘 안 된다. 


그러니 내가 모르는 세계가 있음을, 아니 아주 많음을 

겸허하게 인정하고 수긍해야 할 것 같다. 

세상에 존재하는 무한한 가능성(?)에 마음을 여는 거다. 

그렇게 상처받은 내 마음을 토닥여야 하지 않을까.     


용서의 메커니즘.

머리로는 좀 알겠는데 역시나 실행은 너무 어렵다.

그러나 결국 용서는 날 위해 하는 거다. 

세상에서 가장 고결한 ‘이기주의’이다.     


그런 이기적인 사람이 될 수 있으면 좋겠다.

그것도 아주 많이, 여러 번, 계속.

그래서 우주에서 제일 이기적인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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