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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끝찡 Jan 24. 2020

논현역에서 술에 취해 비틀거리고 있던 그녀


 

 설날 명절 직전의 마지막 토요일 강남. 강남 치고 그렇게 늦지 않은 밤 10시. 슬슬 1차가 마무리되거나 슬슬 분위기가 무르익어가는 타이밍. 술을 잠시 끊은 난 친구들의 유혹을 뿌리치고 집으로 가기 위해 논현역으로 향한다. 교보타워 사거리를 지나다 교보문고를 지나친다. 서점을 그냥 지나치는 건 늘 섭섭한 일이다. 그리고 책 한 두 권은 사줘야 직성 풀린다. 영업시간 끝 열 시가 되기 전 고민해서 산 책은 정유정 작가의 <진이, 지니>, 알랭 드 보통의 <여행의 기술>. 이 책들 역시 다 읽을지는 모르겠지만 책을 사는 건 늘 즐거운 일이다. 여하튼 책을 사고 논현역에 도착했다.


 플랫폼에서 아슬하게 지하철을 놓쳤다. 뒤이어 오는 지하철이 오는 시간이 꽤 걸리더라.  폰 배터리가 얼마 없어 책을 꺼냈다. 벤치에 앉아 책을 펼쳤다. 그런데 내 바로 앞에 어떤 여자가 스크린도어에 머리를 박은 채 겨우 버티고 서 있었다. 그녀는 이미 거의 만취상태다.


 저 정도 상태면 택시를 탔어야 하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을 했다.  택시가 잡히지 않는 시간도 아니다. 그런데 왜 지하철을 택했을까? 혼자 내린 결론은 7호선으로 건대입구의 이상의 거리라 택시를 타면 만원 이상의 요금이 나올 것이라는 생각, 건대를 훨씬 넘어 노원 이상의 거리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럴 경우 택시 요금은 3만 원이 넘어간다.


 두 번째, 그녀는 너무 이른 시간에 많이 취했다. 낮술부터 시작해 오래 마셨을 가능성도 있지만 애주가들만 가능한 일이다. 애주가들은 먼 동네에서 낮술 하지 않을 것이다. 술을 못 마시는데 마셨거나, 의외의 쌘 술을 빨리 먹는 바람에 빨리 취했거나 하나일 것 같았다.


 세 번째, 그녀는 정장 차림이다. 토요일임에도 불구하고 정장으로 나왔다는 것은 회사일이거나 소개팅이거나 남자와 만났을 가능성. 소개팅이거나 남자였을 경우 남자는 정말 개새끼. 가장 합리적인 의심은 전자인 회사의 중요한 일 때문에 애써 토요일임에도 불구하고 주말 중요한 미팅이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종합해보면 그녀는 강남에서 조금 먼 거리에 살고 있으며 술을 잘 마시지 못하는데 회사의 중요한 미팅 때문에 술을 마셨다. 버티려고 했지만 버티지 못하고 지하철을 탔을 것이다.  주변에서 아마 택시를 타라고 했을 테지만 자존심 강한 그녀는 지하철을 선택했을 것이다. (물론 이 모든 것은 나의 추론일 뿐, 반전으로 그냥 혼자 술을 마셨을 수도 있겠지 )


 지하철이 들어온다는 안내방송이 들리고 나는 지하철을 타기 위해 그녀 옆으로 갔다. 애써 그녀를 보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지하철에 제발 자리 하나만 있어라 빌었다. 그러나 내 바람과 다르게 지하철은 만석이었다. 괜히 야속했다. 그녀는 비틀거렸지만 흐트러지지 않았다. 손잡이를 잡고 있었지만 한 번도 놓치지 않았다. 다른 사람에게 애써 자리를 양보해달라는 행동도 하지 않았다.


 책을 본다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는데 그녀의 발이 보일 수밖에 없었다. 높은 하이힐 때문일 수도 있지만 버티고 있는다고 빨갛게 피가 쏠려 있더라. 그리고 자신이 지금 힘들다는 모습을 숨기려고 하는 모습도 보인다. 그러나 앉아 있던 모든 사람들은 다 보였다. 그녀가 얼마나 버티고 있는지를.


 지하철은 청담대교를 지나고 있었다. 그녀가 지그시 한강을 바라보더라. 조금 괜찮아졌나 보다. 그녀가 강해 보였다. 갑자기 내 글 속에 여자 주인공을 한없이 약하고 불쌍하게만 표현했던 것을 반성했다. 거창하게 표현하자면 삶에 애착 같은 것도 그녀를 통해 보았다.


 나는 건대입구에서 내렸다. 그녀는 여전히 버티고 있었고 건대입구에서 또 수많은 사람들이 탑승했다. 자리에 좀 앉고 긴장 푸셨으면 좋겠다. 지금 쯤 무사 귀가하셨겠지? 마음속으로 나는 오늘 그녀에게 열세 번 정도 토닥토닥해드렸다.  



 "다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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