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주의는 침략과 수탈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관념체계)이다. 이 개념은 (서구)열강이 자원이 풍부한 아시아, 아프리카를, 혹은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로 삼은 지배가 단지 폭압적인 '무력'이라는 통치수단을 사용해서만이 아니라, 의식을 동원하여 완결되었다는 점을 살펴보게끔 하는확장성을 갖고 있다. 예컨대 '피식민지인은 미개하고 열등하니 지배가 당연하다'는 논리.
그래서 20세기 대부분의 식민지 국가가 해방된 이후의 세계에서 후기 식민주의(post colonialism)는 과거의 제도나 의식에서 벗어나자란 의미를 담아 ‘탈post, 脫 식민주의’라고도 한다. 동시에,후기 식민주의는 줄곧 우리가 식민주의적 가치관을 내재한 다양한 사회적 관계 속에서 살고 있다는 연속성의 함의도 있다.
주인과 노예, 식민지 종주국과 식민지, 남자와 여자, 어른과아이, 인간과 자연, 비장애인과 장애인, 국민국가의 국민과 국민이 되지 못하는 이주민, 소위 정상인과 ‘비’정상인……. '우월한' 전자에 의해(전자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그 권리가 규정되고 나서)'열등한' 후자는 범주화되고 착취된다.
그리고 피식민자 가운데 어떤 사람들, 자신이 피식민자임을 망각한 채 노예들의 우두머리가 된, 어차피 노예일 따름이나 꽤 영향력 있는 이들, 대개는 전문가나 지식인 즉 과학 또는 이성을 근거로 하여 스스로 말할 수 있고 남을 설득할 힘을 가진 자들의 협력으로, 식민화된 피식민자의 자발적 동의가 나오며, 이를 통해 식민주의적 권력은 유지, 강화된다. 친일 청산만 봐도 그렇지만 이런 종류의 공범 관계 문제는 해결하기가 대체로 곤란하다. 언제나 권력관계의 변화를 수반하므로,당장의 이해관계에 따라 버티는 이들은 끈질기다. 쓰레기를 줍는 것처럼 간단한 문제라면 좋을텐데.
세계보건기구WHO가 2020년 3월 12일 COVID-19(Coronavirus disease) 팬데믹 공식 선언을 한 이래, 자연(환경)에 대한 인간의 탐욕스러운 지배에 대해 좀 생각도 하고 공부를 했었다.
그간 플로깅할 때 아주 추운날을 빼고 마스크를 안 주운 날이 거의 없었다. 다른 사람에게 감염 우려도 있고 또 새들이 마스크 고리에 감겨서 다치거나 죽는다는 소식이 여러 번 나왔는데, 마스크를 길거리에 함부로 버리는 이들이 종종 있다. 지난해 초겨울 한번은 골목 한가운데서 쓰던 마스크를 휙 하니 버리고 지나가는 청년이 있길래, 붙들었다. 그렇게 버리면 안 된다고 했더니만, 빤히 날 한 번 쳐다보더니 가던 제길을 갔다.
완벽히 차단?당했지만^^, 때마침 몸과 영혼이 식민화되어 있지 않은 날의 내가 마스크를 주웠다.
전부 다 내가 줍줍한 마스크들, 휴지 조각들.
그리고 그동안 쓰레기를 줍고 다니면서 길냥이들을 예상보다 많이 만나게 되었다. 길냥이들을 마주칠 때도 인간의 자연 지배에 대해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길냥이들은 여름에는 인간의 집에서 흘러나온 더러운 하수, 에어컨 실외기에서 흘러나온 물을 먹고 있었다.겨울에는 꽁꽁 얼어서 물을 한 모금도 못 마시고 있었다. 구청에서 중성화 수술도 적극적으로 실시하고 있고, 이와 함께 코로나 이후 우리 동네 일대에서는 길냥이들에게 깨끗한 물과 사료를 주는 시민들의 밥터가 다섯 곳이나 늘어났었다. 즉 인도주의적 (밀도) 관리가 늘었다.
그렇지만 지난해 겨울에 바로 옆동네에서만 해도 길냥이를 거꾸로 매달아 죽이고 담벼락에 전시한 동물학대 사건이 발생했었다. 지역신문을 보고서 알게 된 잔인한 소식이었다. 길고양이가 생태계를 교란한다는데, 여전히 자주 일어나는 인간의 동물학대 사건을 생각하면 누가 대체 교란을 한다는 건지 모르겠다. 길냥이를 주제로 한 글은 아니므로 더는 길게 쓰지 않겠지만, 길냥이 자연수명은 그렇지않아도 짧다.그리고 산업화 사회에서 대부분의 멸종위기종 동물은 순전히 인간의 흥미나 부산물 교역 이득을 위한 사냥, 인간의 만족을 위해 순종 혈통을 만들어내려는 근친간 교배, 또 인간이 인간을 위해 만든 차가 다니는 도로를 건너지 못해 제한된 지역에 고립되어 살다가 일어나는 근친간 교배로, 열성유전자가 발현되어 결국 멸종의 길을 걷는다.
꽁꽁 언 겨울날 도서관 가다가 본 길냥이 밥터에 물이 얼었길래 마침 갖고 있던 텀블러 더운 물로 얼음을 좀 녹여주었다. 줄 서서 꿀꺽꿀꺽 물 마시는 냥이들
코로나 바이러스는 엔데믹이라는데, 2019년말부터 지난 3년 여간 6백 9십만 명 가까이 많은 사람 목숨을 빼앗았다.
이런 셈은 별로내키지 않지만,하루마다 6301여개(690만÷(365×3))의 우주가, 사람으로 된 도서관 6301개가 매일매일 사라졌다.
감염병을 일으키는 바이러스나 세균은 인류보다 더 오래 이 지구상에 존재해왔는데, 인간이 숲을 개발하고 자연을 파괴하여 박쥐에 있던 코로나 바이러스가 중간숙주를 거쳐 인간에게 감염이 되었다. 인간에 의한 동물 서식지 파괴와 야생동물 거래, 즉 무분별한 인간의 개발 욕심이 이러한 팬데믹을 불러일으켰다. 2003년 사스, 2015년 메르스, 2019년 COVID-19까지 공장식 축산 등으로 가축을 매개로 한 코로나 바이러스 계열의 감염병은 야생동물을 중간숙주로 하여 인간에게 전해진 바이러스이다.
앞으로 또 팬데믹은 일어날 것이라 예측되고 있다. 인간과 접촉이 거의 없던 바이러스나 세균, 기생충 같은 병원체를 가진 많은 동물이 더 적합한 서식지를 찾아 이동하고 있으며, 이런 병원체가 사람을 포함한 다른 동물을 감염시킬 위험도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전세계적으로 보면, 도시는 점점 더 계속해서 그 영역을 넓히고 있는데, 인간과 자연의 식민 관계를 종식시키지 않는 한, 팬데믹은 계속 일어날 것이다.
서글픈 식민지 팔레스타인에 대해 쓴 조지 오웰상 수상작가 라자 샤하다(Raja Shehadeh)의 일기 한 대목을 옮겨 쓰며, 삼일절 전야 글을 마친다. 이스라엘에 점령당하기 전 자파(이제 이스라엘 영토)에서 살던 아름다운 추억을 침탈에 대한 크나큰 분노와 함께 담담히 써낸 라자 샤하다의 일기가 <점령을 살다>이다. 좀 멀리 떨어진 곳의 이야기이지만, 지배를 당한다는 게 어떤 것인지 내게 확실히 알려준 책이다. 지배와 억압을 당한 경험에 대해 뛰어나게 다룬 작품을 보면, 항상 그 엄청난 서정성의 세계에 놀라게 된다. 매우 부드러운데 매우 강해서. 우리의 저항작가들이 그러하듯 혼을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는 대단한 서정성, 그토록 짓밟히고 두들겨맞고 모욕을 당하고 결국 빼앗길 걸 알면서도 자신과 자신의 땅을 지키려는 소중한 분노=도저히 잠재울 수 없는 강한 내면의 세계에 탄복하며 이 책을 읽었었다.말을 못하는 동물, 자연도 정복자 인간에 대해 이렇게 생각할까. 어쩌면?
"나는 스스로 운명을 받아들이라고 되뇌며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애썼다. ‘네 운명을 받아들이란 말이야’, 나는 몇 번이고 곱씹었다. 그렇다면 내 운명이란 게 뭘까? 끊임없이 계속되는 충격, 지체, 차별, 폐쇄, 역경, 투쟁. 그리고 고통, 슬픈 소식, 축복의 부재, 낙이랄 게 별로 없는 삶. 우리들의 삶은 불만 가득한 관리들에게 볼모로 잡혀있다. 그들은 끊임없이 바뀌는 규정을 우리에게 적용하지만, 그게 무엇인지는 절대 알려주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더 이상 화낼 여력조차 없는 처지라는 사실을 스스로 고백할 시간이 찾아올 것이라는 걸 알고 있다.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라 내 약한 심장을 생각해서라도 말이다. 아마 그때는 내 기분을 통제하고 감정을 누그러뜨려야만 하겠지. 물론 그런 상태에까지 이르는 걸 원하지는 않는다.
마치 자기 자신만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인 양, 늙어서 이 한 몸 보전하기에만 급급해 억지로 웃음을 지으며 자신의 건강만 챙기는 그런 사람이 되기는 싫다. 계속해서 화를 느끼고, ‘꺼져가는 빛에 분노하고, 분노하며’ 살고 싶다."
라자 샤하다 지음, 이광조 옮김 <점령을 살다 – 라자 샤하다의 팔레스타인 일기> 106쪽. (밑줄은 내가 그었음)
모든 게 얼어버린 날, 비쩍 마른 길냥이에게 물과 사료를 주고 잔해를 치움(좌)/ 편의점 앞서 신기한 묘기(진열대 속으로 쏙 들어갔다나옴)를 내게 보여주고 물을 얻어마신 냥이(우)
Occupation Diaries
2012년작. 2016년에 한국어로 번역출간됨 <점령을 살다Occupation Diaries> 이사 후 동네도서관에 첫 구입신청해서 읽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