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쟌 Sep 09. 2021

일반적이지 않은 일반화 전쟁

나의 감정은 나의 것.

시어머니는 자기중심적 사고가 강하신 분이다. 자신의 생각대로 상대도 똑같이 생각할 것이라고 여기신다. 한편으로는 이타적인 면도 있지만 자칫 이기적으로 비칠 수도 있다. 그 드물게 보이는 이기적인 면은 나와 다른 생각을 틀리다고 단정하는데서 보이는 것 같다. 내가 어머님과 뜻이 다를 때는 줄곧 자신의 생각이 일반적임을 강조하셨다. 그러니까 예를 들면 챙겨주면 다들 좋아하는데 불편해하는 사람이 일반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동안은 내가 정말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을 했다. 남들 다 감사해하고 고마워들 하는데 배가 부른 며느리가 된 것 같았다.


나는 게장을 먹지 못한다. 어릴 적에 먹고 체한 경험이 있어서 그 후로는 비릿한 맛이 강하게 들었다. 시가식구들은 모두가 게장을 좋아하고, 특별한 날에 그 음식을 즐긴다. 나로 인해 그 음식을 먹지 않는 게 마음이 쓰여서 신경 쓰지 말고 드셨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게장을 먹지 못함을 아시지만 어머님 입맛에는 너무나 맛이 있어서 나에게 먹을 때까지 권하신다.


"얘, 이거 한번 먹어봐라. 고소하게 양념이 잘됐다"


처음에는 몇 번 못 이기는 척 맛을 봤는데 잘 먹는다고 생각을 하셔서 인지 끊임없이 먹어보길 바라셨다. 이러한 마음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게 어렵지 않았다. 그런데 내가 정말 먹지 못하겠을 때도 어머님은 끊임없이 먹어보길 바라셨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고 해도 배부른 사람이나, 먹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더 이상 맛있는 음식이 아니다. 어머님이 어떤 대답을 바라는지, 어떤 행동을 원하는지 잘 알고 있어서 맞춰 드렸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나의 감정의 주도권은 서서히 힘을 잃기 시작했다. 시어머니는 내가 감정을 표현할 때마다 왜냐고 물었다. 그 감정을 줄곧 설명해 왔지만 왜 그런 감정을 느끼냐고 답답해하셨다. 감정이라는 것이 그 사람의 고유한 영역이라는 것은 나만 알고 있는 사실 같았다.



그날은 아이의 첫 번째 생일이었다. 그전부터 코로나가 무섭게 확산되면서 양가 식사가 불가능했기 때문에 시부모님 생신 겸 식당에서 밥을 먹기로 했다. 코로나가 아니었어도 돌잔치를 화려하게 할 계획은 애초에 없었고, 양가 부모님께도 미리 전달했었다. 생일이나, 각종 기념일들을 시끄럽고 화려하게 치르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반면에 시어머니는 보이는 것들에 대해 자유롭지 못하셨다. 아마 하나밖에 없는 손주 생일에 아는 지인들과 친인척들을 모두 초대해서 행복한 보습을 보여주고 싶으셨을 것이다. 정말 아주 가끔은 어머님의 그러한 인정 욕구에 수단이 되는 느낌이 들 때도 있었다.


하지만 다행히(?) 코로나 덕에 간소하게 보낼 수 있어 별일이 없을 줄 알았다. 나는 그동안 시가에서 주는 돈이나, 물질적인 지원들을 병적으로 질색해 왔다. 무조건 적인 사랑이 아닌, 보이지 않는 암묵적 조건이 언제나 나를 짓눌렀기 때문이다. 그 무엇도 받지 않고 어떠한 기대도 드리고 싶지 않았다. 시부모님과 거리를 둘 때마다 돈봉투나 여러 가지 물품들로 그 거리를 좁히려 하셨고 나는 점차 뒷걸음질 치게 된 것 같다. 하지만 음식이 나오기도 전에 어머니께서는 한껏 들뜨셨고, 큰 봉투에서 무언가를 펼치기 시작하셨다.


"이건 이모들이 주신 돌반지고, 이건 삼촌들이 주신 돈이고.. 그리고 이건 @@아줌마, ##아줌마(이하 생략...)가 준 봉투고, 요건 옆집 아줌마가 준 돈이야... 그리고 이건 우리가 주는 금 목걸이!"


"아.. 어머님.. 저 너무 숨 막히고 부담스러워요....."


오늘만은 부모님께서 주시는 것들은 감사히 받고 불편함을 내색하지 않기로 수없이 다짐했지만 나도 모르게 터져 나왔다. 어머님은 오늘만을 기다리신 분 같았다. 그날은 친정 부모님도 오시는 줄 아셨다는데 사돈 앞에서 얼마나 자랑스럽게 펼치셨을지 생각을 하니 철렁했다. 친정부모님은 주변 분들 손주의 돌잔치가 이렇게 중요한 행사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 또한 어머님 시각에서는 인간관계를 탓하실지도 모르겠다.


그동안 남편이  내가 그렇게나 부담을 느끼고 불편해하는지 줄곧 설명을 드렸다고 했지만 그건 일반적이지 않은 며느리의 생각일 뿐이었다. 그래서  감정을 남편을 통해서가 아닌 직접 표현을 하고 싶었다. 이렇게 하면  이야기에 조금이라도 귀를 기울여 주실  알았다. 그런데 기다렸다는 듯이 어머님도 나의 기뻐하지 않던 태도에 목소리를 높이셨다.


조리 때부터 어른이 챙겨주는걸 감사히 받지 못한다고 하셨던 어머님은 어른들이 주시면 감사할  알아야지 예의가 아니라고 하셨다. 핵인싸 어머님답게 자신의 주변 친구들은 손주 돌잔치만 기다리고, 언제인지 매일같이 물어보셨다고 한다. 그리고 자신도 친구들 손주 돌잔치에 가서 그만큼 했는데 도대체가  손주 챙기는  뭐가 부담이냐는 이야기셨다. 아마도 어머님은 친구분들을 모두 초대해서 손주 자랑도 하고 싶으셨을 텐데   끼로 넘어가는  상황에 불만이 많으신 듯했다. 자식 돌도 아니고 손주 돌을 그렇게 까지 챙겨야  이유도 모르겠지만, 자식들이 싫다고 하면 그만인 일이 아니었다. 코로나가 잠잠해지면 잔치를 하자고 하셨지만 나는 코로나와 상관없는 결정이라고 말씀드렸다.


아버님과 남편이 상황을 수습하려 했지만 어머님은 할 말이 많으셨다. 부모가 자식에게 해주는 것들을 거절하는 건 연을 끊자는 거고, 그렇게 부담스러운 마음을 갖는다는 거 자체가 일반적일 수 없다고 하신다. 공포의 일반화 논리가 시작됐다.


"너 돌잔치 안 가봤니?? 다른 집 돌잔치 가면 이렇든??"


"어머님... 저 그래서 돌잔치 안 한 거잖아요...."


돌잔치를 가면 다들 감사히 잘들 받는데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며, 친척들의 돈이나 물건들은 주시면 감사히 받으라고 하셨다. 부모 자식 관계에 대한 여러 정의를 내려주셨는데 내가 이해한 바로는 '자식은 부모를 부담스러워해서도 안되고, 거절 또한 있을 수 없는 일이다'였다.


어머님은 아마 시부모님께 굉장히 잘하셨을 것이고, 감사함이 많으셨을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며느리 또한 그런 감정을 느끼게 해주고 싶으셨을지도 모른다. 그런 어머님의 마음을 어느 정도 알고 있어서 나도 거절이 힘들었고 최대한 안 하려고 했지만 거절은 나쁘다는 인식만 강해질 뿐이었다. 거절이 필요한 상황에서 언제나 죄책감이 들었고 나는 내 감정을 통제당하는 기분이 들었다.



어머님은 거절에 특히나 민감하셨고 상대의 거절을 받아들이지 못하셨다. 내가 어떤 물건이나 요구를 에둘러 사양하면 결국은 받을 때까지 전하셨고, 거절했던걸 어쩔 수 없이 다시 받거나 원하는 대답을 해드리면 "나는 네가 거절하는 줄 알았다"라고 안심하셨다. 사람이 살면서 어떻게 거절을 안 하고 살 수 있을까 싶은데 어머님은 거절을 단순한 거절이 아닌 자신을 거절한 거라 생각하시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즐거워야 하는 식사자리에서 나의 태도와 표정은 예의가 아니었다. 잘못한  것도 알고 무례했던 것도 분명하지만 웃으면서 감사히 받기가 힘들었다. 어머님은 그동안 나에게 쌓인 감정들을 남들이 보기 좋게 포장을 하셨는데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올 것만 같았다. 아마 웃는 표정으로 공손하게 말씀을 드렸어도 내용이 어머님 의도와 달랐다면 결과는 지금과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항상 어머님의 논리에 반대편에 있는 나의 친정은 그 대단한 일반화에 늘 일반적이지 않은 무리가 되곤 했다. 상견례에서 아빠가 시부모님께 부탁드렸던 것은 단 한 가지였다. 잘 사는 모습을 지켜봐 달라는 것. 그게 이토록 어렵고도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아빠는 그때 알고 계셨던 걸까. 내가 부모님께 아이 돌잔치 계획에 대한 말씀을 드렸을 때 들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 우리 딸.. 일 년 동안 아기 키우느라 고생했다"


돌잔치가 중요한 게 아니었고, 돈봉투나, 돌반지들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어머님이 생각하는 가족이 꼭 일반적이진 않으며, 저희 부모님은 제 가정에 어떠한 강요도 하지 않는다고.. 따박따박 반박하고 싶었지만 소모적인 대화로 필요한 말은 사라지고 있었다.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상황을 정리해 보려고 했다.


"제가 아이 낳고 그 관심들이 버거울 정도로 감당이 되지 않았어요. 그래서 많이 예민했습니다. 죄송합니다..."


겨우 꺼낸 한마디를 아무도 듣고 있지 않았다. 시부모님은 남편에게 반지와 받은 선물들을 아이에게 채워보라고 하셨고 남편은 열심히 사진을 찍고 있었다. 지인들에게 사진으로 보내야 한다고 바쁘셨고 나는 입을 닫았다. 아이가 태어났을 때도, 어머님이 주변에서 받은 것들을 찍어 보내기 바빴는데 여기서 까지 이어질 줄은 몰랐다. 혼자 겉도는 느낌과 외로움이 느껴질 때쯤 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평소에 장난감을 좋아하던 아이가 시어머니께서 아무리 장난감을 들고 흔들어도 가지 않았다. 그리고 아이 손을 잡은 시어머니 손을 뿌리쳤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가 뭔가 다 알고 있는 모습 같아서 나는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뭔가 아이에게 보이는 나 자신이 불쌍한 것 같아 괜히 씩씩한 척을 했다. 하지만 내 이야기는 먼지처럼 흩어졌고 아직도 남은 어머님의 이야기들이 흘려들어왔다.


"다른 집은 시댁에서 며느리한테 매일같이 연락하고 매일같이 간다는데 우린 네가 거절할까 봐 눈치 보여서 안 가잖니.."  


오늘 들었던 그 어떤 말보다 이 한마디가 가장 충격적이었다. (그게 나를 배려하셨던 거라니..) 어머님의 비교대상은 언제나 최악의 시가와 최고의 며느리다. 행동의 기준은 언제나 타인에게 있고 며느리는 그 타인에 해당되지 않았다.


" 네가 그런 마음(부담스러운)이라면, 우린 니들이 사주는 이 밥도 부담이겠네?,  

니들이 주는 용돈도 부담이네?,

우리가 늙어서 너한테 물 한잔 얻어먹겠니?.. "


 헤어질 때까지 같은 말씀을 반복하셨고 강조하셨다. 아버님까지 함께 부담스러울 이유가 전혀 없다며 그런 마음을 갖지 말라고 하셨고 남편은 아무 말이 없었다. 부모라는 것이 정말 대단한 권력으로 느껴질 수도 있구나 싶었다. 어떠한 조건도 붙으면 안 되는 게 부모라고 생각해 왔지만 이 모든 것은 어머님께는 일반적이지 않을 뿐이었다. 원치 않는 것들을 거절하면 안 되고, 부담스러워해서도 안되며 꼭 감사하는 마음까지 가져야 했다. 마음대로 해달라는 것도 아니었고 나의 마음과 생각이 있다는 것을 받아들여 달라는 것이었지만 어머님께는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그렇게 한바탕 난리가 있었지만 얼마 후, 어머님은 보란 듯이 남편에게 아이 옷과 반지들을 또다시 보내셨다.




예전에 어머님께 드린 용돈을 부담스럽다고 하신 이후로 나는 시부모님 용돈에 관여하지 않는다. 아무리 좋은 의도라 할지라도 상대가 싫어하면 하지 않는 게 존중이고 배려인데 사회적 평균에 대한 인식이 나와는 너무 달라서 보편적으로 접근이 어려웠다. 그날 더 이상의 소통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고 앞으로 어떠한 노력을 해야 할 필요성이 사라지게 됐다.



그렇게 정말 이기적인 며느리가 되어갔다.




매거진의 이전글 불편한 도리에 관해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