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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쟌 Aug 23. 2021

불편한 도리에 관해서

사랑이라 쓰고 욕심이라 읽는다

시부모님을 처음 뵙던 날, 아버님께서는 나에게 한마디를 건네셨다.


"집에 자주 올 생각 말고, 니들끼리 잘살아라"

 

그 한마디가 왠지 며느리에 대한 기준이 엄격하진 않은 것만 같아 긴장이 조금 사그라졌다. 시어머니께서도 하루빨리 귀찮은 아들 녀석을 데려갔으면 한다고 하셨다. 말씀은 그렇게 하셔도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자식을 처음으로 독립을 시키는 마음은 시원하면서도 많이 섭섭하셨을 것이다. 난 그렇게 외동아들에 대한 편견을 그날 몇 마디로 완전히 떨쳐버렸고 나만 잘하면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마음은 아들을 독립시키는 서운함을 내색 않고 담담히 표현하셨던 시부모님의 모습이 멋진 어른으로 각인됐기 때문이다. 나는 그렇게 겁도 없이 하나밖에 없는 귀한 아드님과 결혼을 하고야 말았다.


시가에서는 정말 나에게 바라는 게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을 했다. 그래서 생각보다 많던 시가 행사에도 좋은 마음으로 참여했고 귀찮다거나 가기 싫을 이유가 없었다. 그날도 시가에 갔던 날 중에 하나였고 시어머니 친구분들께서 모여계셨다. 지인 분들은 하나같이 시어머니를 부러워하셨고 어머님은 내심 그런 분위기가 싫지 않으신 듯했다. 결혼 전부터 남편은 동네에서 엄마와 친하기로 소문이 자자했고 아주 특별하고도 애틋한 모자 관계였다. 그러한 아들은 결혼을 해도 변함없이 엄마를 살뜰히 챙겼기 때문에 주변 분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으셨다. 내입장에서 조금 부담스러운 상황일지도 모르나, 어머님은 나름의 쿨한 시어머니의 역할도 잊지 않으셨다.


"다들 내가 아들 결혼시키고 서운해할 줄 알더라?? 근데 난 결혼식날도 안 울었잖아~ 괜찮던데??"


모두의 예상과 달리 아들을 결혼시키고도 허전함보다는 못다 한 어머님의 인생을 즐기시는 것 같았다. 주변분들도 그렇게 생각하시는지 나에게 시부모님께 잘하라는 뼈 있는 조언(?)을 하셨고 나 역시 어머님은 그런 분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결혼식 때 찍은 양가 가족사진에 아들 손을 꼭 붙잡은 사진을 보고 친구들이 나를 걱정스럽게 다독일 때도 나의 마음은 변함이 없었다.


그러한 마음이 있었기에 시어머니께서 산후조리 이야기를 꺼내셨을 때 아예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어머니께서 이미 산후조리부터가 자신의 도리라고 생각하셨던 것 같다. 하지만 그 도리라는 것이 누구를 위해 행해지고 있는 것인지가 문득 궁금해졌다.


시어머니 지인분께서 한통의 전화가 왔다. (스피커폰인 줄 착각할 만큼 생생히 들렸다)


"아니 왜 아직도 거기에 있어?!!"

"며느리 조리가 아직 덜됐잖아. "

"어휴.. 날 좋은데 어디 가지도 못하고 고생이네.."

"뭐 어쩌겠어..."


아마 뒷이야기는 이런 시어머니가 없고, 며느리는 복이 많다.. 정도의 내용 같았다. 정말로 나를 위해 집에 갇혀 계셔서 답답하고 힘들어서 자주 눈물을 신다고 생각했다. 주말 만이라도 친구분들도 만나고 바람도 쐬고 오시라고  이유는 잠시만이라도 혼자 있고 싶었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희생으로 마음이 편한 사람이 있어야 하는데 일단 나는 아니었다. 어머님은 얘기가  끝나기도 전에 단박에 거절을 하셨고 다시 얘기를 꺼내도 자리를 피하셨다. 이때까지만 해도 살짝 헷갈렸다.


'정말 나를 위한 게 맞는 걸까?'


지인분들, 남편, 아버님.. 모두에게 며느리를 위해서라고  공공연하게 말씀하시지만 정작 며느리는 정말 원하지 않는 게 문제다. 나는 혹여 정말 나를 위한 거라 생각하실까 싶어 몇 차례 나의 상황이나 감정들을 말씀드렸지만 어머님께서는 과민한 반응을 보이셨다. 어머님은 내가 조심스레 표현하는 감정들을 외면하셨고 알고 싶어 하지 않으셨다. 하지만 대외적으로는 여전히 며느리를 위함이었고, 원하는 것들은 포기하지 않으셨다.



도리를 지킨다는 것

시부모님의 도리는 행함의 대상의 마음은 중요하지 않았다. 아이를 위한 물질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으셨고 봐주고 싶어 하셨지만 나는 원치 않았다. 그 도리라는 것에는 암묵적 대가가 늘 따라붙었기 때문에  나는 그 사랑과 관심이 불편했다. 자식은 당연히

부모를 자주 봐야 하고 연락을 드려야 하는 것이 자식 된 도리였다.  대놓고 요구하셨던 것은 아니지만 연락을 드려도, 방문을 해도 늘 부족해하셨다. 그래서 어머님께서는 여러 가지 도리를 수단으로 아무 때고 방문을 하셨고, 집으로 오라고 하셨다. 나는 그 도리라는 것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뵙는 게 차라리 나을 것 같았지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복날이 오기 전에 전화가 한통 왔다. 매해 초, 중, 말복을 다 챙기셨는데 역시나 집으로 오라는 내용이었다. 이미 초복 때도 삼계탕을 보내주셨었고, 이번에는 재료를 미리 사다 두었으니 다음에 가겠다고 말씀을 드렸다. 복날이 왔고 단체 대화방에 어머님의 문자가 와있었다.


'닭을 삶아 놨으니, 냄비 가지고 와라'


 거절에 민감하신 어머님은 마음먹은 것들을 꼭 하셔야 했고 그 또한 도리라고 생각하셨다. 남편이 시가에 가서 닭을 받아왔는데 맛있게 먹을수가 없었다. 명절에는 아이와 처음 맞는 명절이라고 돈봉투를 주셨고 나는 앞으로 처음 맞는 것들 투성인데 매번 이렇게 주시는 게 부담스럽다고 말씀드렸지만 소용없었다. 다른 시각으로 본다면 정말 이런 시어머니가 없지만 마음이 편하지가 않다. 그렇게 좋은 마음으로 주신 봉투를 받고 며칠 후 내가 전해 들은 며느리 도리에 대한 평가는 명절에 잠깐 얼굴만 비추고 갔다는 것이었다. 항상 어머님은 할 도리를 다하시지만 나는 해야 할 도리를 다 하지 못하는 며느리가 되어있었다.


시어머니는 아이가 백일 때도 사진만 한 장 찍고 기념하고 싶다고 재차 말씀드렸지만 양가 어른들을 모시고 집에서 식사하기를 원하셨다. 상견례도 집에서 해봤지만 간단히 한 끼를 먹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친정 엄마는 아직 회복도 안된 딸이 먼저였고 집에서 하는 것은 원치 않으셨다. 결국은 양가 따로 식사자리를 마련했지만 며칠 후에 시가에서 돌연 약속을 취소하셨고 지금 집으로 가고 있다는 전화가 왔다. 약속 날 다른 일정이 있고, 지금은 시간이 있으니 아이를 보러 오시겠다는 것이다.


시부모님은 아이에게 줄 선물들, 주변에서 받아오신 것들을 전해 주고 싶으셨고 갑작스러운 방문이 불편할 거라는 생각하지 못하셨다. 하지만 나는 선물들 보다는 정해진 날에 반갑게 뵙고 싶었고 시부모님은 빨리 도리를 다하고 싶어 하셨다. 한번 다녀가시면 언제 갑자기 오실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꽤 오래 남았고 이미 사이가 예전과 같지 않아 언제든 반갑게 맞이 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할머니 할아버지의 손주를 사랑하는 마음은 하나의 특권이라 생각했고 최대한 존중해 드리고 싶었다. 그 과정에서 며느리가 살짝 서운할지라도 하나밖에 없는 손주를 향한 마음은 좋은 마음으로 받아야 했다. 아이는 걱정 많은 엄마를 다독이듯이 고맙게도 어디 한번 아프지 않고 잘 먹고, 잘자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가족들을 안심시켜주었다. 그 모습을 나와 다르게 생각하시는 아버님은 아이가 울지 않는다고 한 번씩 울려야 한다는 이야기를 꺼내셨다. 그때까지만 해도 농담으로 받아들였는데 아이를 보러 오실 때마다 그 이야기를 계속하셨고 나는 조금씩 신경이 쓰였다.


"울어야 건강한 건데 왜 울지를 않냐?"


아이는 울 때도 있지만 잘 자고, 잘 먹는 아이가 불편한 게 없다면 울어야 할 이유는 없었다. 남편이 출근을 해서 나에게 아이 우는 영상을 찍어달라고 했다. 우는 아이를 본능적으로 달래다 보면 울음은 그쳐있어 몇 번을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런데 남편은 며칠을 끊임없이 영상을 물었고 나는 짜증이 밀려왔다. 아버님이 우는 모습을 남편에게 요구하신 것 같아 아이가 울 때 영상을 찍어 보냈다. 그때의 우는 영상을 보면 여전히 마음이 저릿하다.


"아버님, 아이는 울지 않아도 건강해요.."


이 한 마디를 나는 차마 뱉어내지 못했고 삼켜냈다. 마음에 담은 말을 모든 사람이 표현을 하고 살지는 않지만 표현이 필요한 순간은 분명 있다. 나에겐 그 순간이 아이에 관한 일들이었다. 시부모님이 원하시는 그 도리에서 최대한 벗어나고 싶지 않았지만 아이 일에서 만큼은 예외였다. 처음에는 서로 마음 상하는 상황이 없도록 부탁을 드렸다.


예방접종을 위해 소아과를 가니, 낯을 많이 가리는 아이인데 울거나 때를 쓰는 게 아니라 긴장을 많이 한다고 하셨다. 보통의 부모들이 모르고 지나칠 수 있으니, 아이가 긴장하지 않도록 최대한 낯선 분위기를 자제하고 주 양육자가 곁에 있어주라는 당부를 하셨다. 명절에 시가에 갔을 때가 머릿속에 스쳤다. 낯을 가리지 않는다며 모두가 아이를 번갈아 안고 이뻐했는데 아이 표정이 뭔가 좋지 않았었다. 이미 지난 일이고 모두가 몰랐기 때문에 앞으로 조심할 생각만 하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후 시가에 가기 전에 시어머니께 내용을 전했고, 도착해서도 말씀을 드렸다. 내가 잠시 전화통화를 하고 온 사이에 아이는 어머님께서 안고 계셨고 아이를 받으려는 순간, 얼굴이 붉어진 어머님께 술냄새가 났다. 잠깐 사이에 그렇게 술을 드셨는지는 몰랐다.


술을 드셨어도 어머님은 아이를 계속 안으셨고, 나는 뭔가 불안했다. 내 마음을 어떻게 아셨는지 내가 아이를 다시 안았을 때 어머님은 내가 아이를 뺏어갔다고 한마디 하셨다. 뭔가 답답했고, 시가에 갈 때마다 비슷한 일들이 반복됐다. 정말 이 또한 사랑이 맞는 건지 의심이 들었고 나에게는 욕심으로 먼저 다가왔다. 아무리 좋은 의도라 하더라도  그렇게 전달되지 않는 여러 물질적 지원이나 관심들을 받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고 조금씩 피하게되니 어머니께서는 방법을 바꾸셨다.


시아버지는 나에게는 조금 벅찬 시어머니의 텐션을 많이 가라 앉혀주셨다. 우리가 없는 빈집에 갑자기 다녀가실 때도 안방을 둘러보시려는 어머니께 들어가지 말라고 하셨고, 집에 오셔도 식사만 하시고 쉬라며 발걸음을 재촉하셨다. 아이를 안고 싶어도 위험하다며 한사코 마다하셨고 집에 오시면 안 가시려는 어머님을 끌고 가셨다. 그래서 나는 그런 아버님께 더 있다 가시라고 했고, 자주 오지 말라고 하셔서 더 자주 가려고 했다.


언젠부턴가 시어머니께서는 모든 전화 내용에 아버님 이야기부터 꺼내셨다. 아버지가 오늘 안 오냐고 하신다, 집에 놀러 오라는 연락도 없냐고 하신다, 아이만 목이 빠져라 기다리신다, 상사병에 걸리셨다, 영상통화 하자신다, 눈에 진물이 난다고 하신다, 쉴 때 너희 집에 가자고 하신다, 아버지가.. 아버지가..

시어머니께서는 아버님께 굉장히 순종적인 분이시기 때문에 며느리 또한 시아버지 말씀에 으레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신듯했다. 마치 위에서 내려온 지시사항을 나에게 전달해 주듯이 지속적인 전달이 이어졌다.


시부모님의 기대는 아무리 물을 부어도 채워지지 않는 깨진 독과 같았다. 남편이 아이 사진을 보내면 자주 안 보고 사진만 보는 게 무슨 가족이냐는 이야기를 하셨고, 영상통화를 하면 아이가 자지러지게 울어도 이어졌다. 안부전화를 드리면 왜 안 오는지, 얼마나 기다리고 있는지를 이야기하셨고 막상 가면 들어서자마자 왜 자주 안 오는지 대한 이야기부터 꺼내셨고 또 언제 올 건지를 정하셔야 했다. 내가 그렇게 자주 가고 좋아했던 시가는 이제는 가기 전 며칠 동안 잠이 들 수 없는 곳이 되어 버렸다. 아이의 사진들을 집안 곳곳에 붙여진 것들을 보여주시면서 너네가 자주 오질 않아 이렇게 라도 한다고 하신다.


내가 과연 어느 정도의 노력을 해야 시부모님의 기대에 부응을 할 수 있을까 생각을 해보니, 나는 절대 시부모님께 만족스러운 며느리가 될 수 없다는 확신이 들었다. 한번 가면 그걸로 고마워하셨고 더 자주 와야겠다는 생각은 이미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먼일이 되어버렸고, 자주 가려고 노력을 해도 함께 할 때마다 상처 받는 일들이 더해졌다. 그 상처들은 쉽게 아물지 않았고 지워지지 않는 흉터로 남기 시작했다. 한 발자국 다가서면 시부모님께서는 한 발자국밖에 못 오냐고 다그치셨고 나는 다시 뒷걸음질 치기 바빴다. 그렇게 쫓고 쫓기는 관계가 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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