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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성 Jan 13. 2023

흰 것에 대하여

『흰』(한강)을 읽고

유치원에 다닐 나이였다. 크레파스의 흰색을 칠할 때마다 울었다. 흰색을 칠해도 차이를 느끼지 못하겠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도 그럴 것이 흰색은 스케치북 위에 칠한다고 해서 명확히 구분되는 색이 아니지 않은가. 어린 나는 ‘흰색 크레파스’를 만든 것에는 그만의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분명 두드러지는 어떤 차이가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흰색이 또렷이 보이지 않는다고 느끼는 것은 나만의 착각이기에 분명 남들은 인식할 수 있는 어떤 차이가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흰색을 칠해봐야 흰 종이의 색과 미세하게 다른 흰 음영만을 칠할 수 있다는 것을 알기까지는 몇 년의 시간이 더 필요했다.


흰 것의 존재를 확인하려는 갈망은 그때부터였다. 흰색은 다른 것과 분명히 구분될 수 있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누구에게나 확인될 수 있는 ‘하얀 사람’이 되고 싶었다. 밝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깨끗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티 없이 순수하고 아름다운 사람이고 싶었다. 나를 생각할 때 하얀 무언가를 떠올렸으면 – 하고 생각했다. 어쩌면 흰 것에 대한 교조적인 동경을 가졌을지도. 어렸을 때부터 시작한 흰 존재에 대한 탐색에 나를 던졌고, 나는 스스로 흰 존재가 되고 싶은 사람이 되었다. 한강 작가의 다른 소설 [채식주의자]에서 ‘영혜’가 나무가 되고 싶어 하듯이.


흰 존재가 된다는 것은 ‘영혜’가 물리적으로 나무가 된다는 것만큼이나 불가능한 것이었다. 희다는 것은 색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검은색이 모든 색의 집합이라면 흰색은 색의 공집합을 의미한다. 내가 무엇인가가 되겠다는 것은 ‘밝은 어떤 색’이 된다는 것이지 궁극적이고 본질적인 ‘공백’이 된다는 것과 거리가 멀었다. 코끼리를 생각하지 말자는 선언처럼, 흰색이 되고 싶다는 바람은 오히려 흰색으로부터 나를 몰아냈다. 공집합이 되겠다는 공허한 바람은 결국 모든 사람에게 상처받지 않겠다는 의미 없고 불가능한 방어기제를 만들었고, 항상 바른 어린이가 되어야 한다는 착한아이 증후군을 남겼다.


하얗게 웃는다, 라는 표현은 (아마) 그녀의 모국어에만 있다. 아득하게, 쓸쓸하게, 부서지기 쉬운 깨끗함으로 웃는 얼굴, 또는 그런 웃음
『흰』, 78p


‘흰’ 이라는, 책 이름으로는 터무니없이 짧은 제목을 가진 이 책은 매력적이었다. 오래 보진 않았지만 ‘흰’이란 단어가 가장 잘 어울리는, 선한 친구가 빌려주어 더욱 그러했다. 흰 무언가에 대한 동경을 담은 책일까. 작가도 나처럼 하얀 것을 갈망했을까. 모순적이게도 무채색 표지에 담겨있는 내용이 더욱 궁금해졌다.


책을 향한 나의 질문에, 작가는 하얗게 웃는다는 것을 정의하며 대답해주었다. 하얀 것 이면의 존재 - 아득함과 쓸쓸함과 부서지기 쉬운 깨끗함이라는 성질이 그곳에 있다고 말이다. 인간에게 하얀 것은 이상향만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성질이라는 것을 말이다. 빛의 공백에서 교차하는 순수함과 쓸쓸함의 울림을 느끼곤 했다.


한강 작가는 그녀의 소설에서 특정한 방향에 대해 동경을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소설 [흰]은 흰 것에 대한 동경이 아니라, 상반된 성질을 가진 빛과 어둠, 그사이의 경계에서 둘 모두에 접한 채 흰 것에 대해 서술할 뿐이다. 아주 깊은 어둠은 아주 약한 빛에 의해 사라지지만, 아주 하얀 물감은 아주 작은 검정 물감에 의해 탁해지지 않는가. 이어질 듯 이어지지 않는 여러 개의 글 사이에서 발견한 흰 것에 대한 차분한 시선은 그래서 의미 있었다. 소설의 제목은 <흰>이지만, 빛과 어둠을 모두 조망하는 그 어딘가의 혼돈 속에서 유영하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일까. 삶에서 마주한 작은 파편들의 껄끄러움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녀가 이곳을 떠날 날이 가까워질 때,
더 이상 허락되지 않을 이 집의 어둑한 고요에게 건네고 싶은 말이 있을 것이다.
끝나지 않을 것 같던 밤이 지나가고 커튼 없는 북동쪽 창이 짙푸른 박명을 들여보낼 때,
군청색 하늘을 등진 미루나무들이 서서히 깨끗한 뼈대를 드러낼 때
그녀가 세든 건물의 누구도 아직 집을 나서지 않은 일요일 새벽의 고요에게 건네고 싶은 말이 있을 것이다

조금 더 이대로 있어달라고.

아직 내가 다 씻기지 못했다고.

『흰』, 고요에게, 100~101p.


공교롭게도 박물관 인턴 생활을 갈무리하며 읽었던 글이다. 아직 내가 다 씻기지 못했다는 말에 가슴이 저며왔다. 도망치듯 도전한 미국에서의 생활은 끝없는 도전이자 끝없는 실패였다. 언젠가 이걸 ‘무한궤도’라고 표현한 적이 있는데, 글쎄, 결국 그것도 ‘무한’한 것일 수 없었다. 끝이 있는 도전이었기에 늘 아쉬움을 남겼다. 박물관 마지막 퇴근을 하며 문을 열면서 나지막이 읊조렸다. 아직 내가 다 ‘스며들지’ 못했다고 - 완벽하지 못했던 수업과, 조금은 피했던 전시 공간, 나태함에 취했던 도서관 업무에 그들이 들어줄 수 없어 의미 없는 붙잡음을 하곤 했다.


그 사람을 다시 만나고 싶다면 꼭 그때.
젊음도 육체도 없이.
열망할 시간이 더 남지 않았을 때.
만남 다음으로는 단 하나, 몸을 잃음으로써 완전해질 결별만 남아 있을 때.
『흰』,  백발, 90p.


절대자가 내게 다가와 그 사람과 한 번 더 만날 수 있게 해준다는 기회를 준다면, 과연 나는 흔쾌히 응답할 수 있을까 (또는 거절할 수 있을까). 물리적 소멸을 앞둔 채 결별이 전제된 또 한 번의 만남을 가진다는 글의 내용을 보며 다음 책장이 무거워졌던 것은, 더 이상의 결별을 견디기 어려워 물리적 소멸이라는 배수진을 친 듯한 마음이 괜히 느껴졌기 때문이다.


명료한 흐름이 없는 특이한 소설, 하지만 책장의 마지막에서 느꼈던 먹먹함은 이제까지의 여정이 모두 우리네의 삶을 돌아볼 수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흰’은 존재의 공백이자 여백이고, 이곳에서 인간 현존의 양태는 과잉되면서 결핍된다. 그리고 그것에서 새로운 인간의 모습이 드러나는 순환이 일어난다. 도달할 수 없는 ‘무규정적이라기보다 초규정적으로 충만한 궁극적 가능성’을 향해 달려가는 미래인 것이다. 그래서 흰 것들과, 흰 이미지와, 흰 느낌은 우리네 삶의 모습과 공명한다.


소설이라고 부르기엔 견고한 서사도, 인물도, 갈등도 없다. 그럼에도, 책장을 덮으며 ‘흰’이라는 단어를 곱씹게 되는 것은 그사이의 희끄무레한 선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본질이 무엇인지 고민하듯, 흰 것에 대해 고민한다. 어쩌면 흰 것은 명료하지 않을 때 진정 ‘흰’ 것이 아닐까. 가능성의 무한함이라는 인간 본질이 완생과 미생의 가능성 모두를 가지고 있듯, 모든 하이얀 것들 것들도 그렇게 남아있지 않을까. 모호하게, 공허하게, 그러면서 풍만하게.


크레파스를 붙잡고 울상이던 어린아이를 만날 수 있다면,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보일 듯 말 듯 한 그 공허함이 맞다고 – 맞을 수 있다고. 그러니 손에 잡으려 하지 말고 그대로 놓아두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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