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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운엽 Jul 03. 2024

코트디부아르의 한국인 슈바이처


해피 라틴 호는 길지 않은 항해를 마치고 적도 위 북위 8도쯤에 있는 아이보리코스트의 작열하는 태양 아래 배를 접안했다.

내 눈에 왜 그런지 모르게 부두에 놓인 쓰레기통이 꽂힌다.

어디나 치우기 전까지는 한쪽 구석에 쓰레기가 너저분하게 널려있다.

먹다 만 바나나, 야자열매 그리고 음식 남은 비닐봉지와 많은 쓰레기...

이방인의 뫼르소도 아닌 내게 왜 저게 강렬하게 와닿았을까...


국제 항구답게 비교적 잘 단장된 아비장 부두를 우리 선원 몇이 걸어 나갔다.

게이트에는 손님을 기다리는 택시들이 보였다.

섭씨 40도를 오르내리는 곳이라 더우니까 일단 탔다.

기사가 쇼핑센터로 안내할까, 예쁜 아가씨가 있는 바로 갈까 하고 불어 발음이 섞인 영어로 물었다.

말 중에 익숙한 꼬레라는 게 들려 거긴 어디냐고 물었다.

대답 듣기 전에 좁은 바닥이다 보니 한국인이 운영한다는 바 앞에 도착했다.

고맙다고 달라는 요금보다 팁을 조금 더 얹혀주고 일행들과 안으로 들어갔다.


에어컨이 돌아가니 일단 시원하고 마음이 안정됐다.

카운터에 앉아 있던 젊은 아가씨가 반색하며 우리를 반긴다.

조금 있다가 2층에서 대한 동포가 내려와서 반갑게 맞이한다.

이 먼 아프리카 오지에 웬 한국인?


일단 시원한 맥주를 시켰다.

알싸하니 목을 넘어가악어가 그려진 맘바 맥주에 더위 먹은 몸이 비로소 제정신이 드는 것 같다.

여기가 어드메뇨?

아프리카 맞아?

맞네...

흑진주 아가씨들이 환하게 웃으며 인사하고 테이블에 앉는다.

오리지널 흑진주 아가씨를 가까이 보기는 처음인 거 같다.

인사할 때 손을 잡아보니 너무 부드럽다.

보기와는 너무 다른데...


오가는 맥주잔에 흘러가는 말 중 가게 주인이 전직 마도로스였단다.

한국에서 적응하지 못해 외국 나가 살 거라고 배를 타다가 아비장에서 무단 하선했다.

어쩌다 한국 사람이 탄 배가 들어오면 시내 안내를 해주고 술집 삐끼도 하며 푼돈을 벌다가 돈 떨어지면 부둣가 쓰레기통도 뒤져 배를 채운 적도 있었다고 한다.

접안할 때 부둣가에서 강렬하게 빛나던 쓰레기통이 이렇게 접목되나?

그렇게 흘러 흘러 작은 가게를 차리게 되었고 해운 호황기에 한국 송출 선원이 늘어나면서 손님도 많아져 2층 건물을 얻어 지금에 왔단다.

카운터에 앉아 있는 예쁜 젊은 아가씨는 매니저 겸 두 번째 부인이라고 한다.

집에는 또 똑똑한 교사 부인이 있다나...

아, 뭐야?

이렇게 사는 사람도 있구나...




'울지 마 톤즈'의 이태석 신부와 함께 한국인 슈바이처로 불리는 안순구 박사는 코트디부아르에서 30년 이상 의료봉사를 하며 수많은 환자를 치료했다.

그는 어머니가 암으로 고생하시다 돌아가시는 걸 보고 의사가 되겠다고 결심했다.

가톨릭의대를 졸업하고 군의관으로 복무한 뒤, 평소 '의사가 되면 사랑을 실천해 보자.'라고 마음먹고 있던 참에 정부 파견 의사를 모집하기에 자원하여 어린 딸들을 외가에 맡긴 채 코트디부아르로 갔다.


코트디부아르는 아프리카에서 비교적 잘 사는 나라지만, 도시를 벗어나면 다 오지다.

당시 수도 아비장에서 일 년간 국립 병원 열대의학 과정을 수료하고, 안 박사가 일한 곳은 오지 병원이었다.

파리와 모기떼들이 극성이고 독사들이 마당을 기어다니고 독거미가 천장에 집을 짓고 사는 곳.

적도 위라 울창한 밀림과 찌는 듯한 더위, 더불어 아직 문명의 혜택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오지의 원주민들.


그 나라는 불어가 공용어지만 국민의 90% 이상이 원주민이고 60여 부족들이 각자 토속어를 쓰기 때문에 환자가 아무리 말해봐야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런 문제는 시간이 해결해 주었단다.

고마움의 표시로 바나나나 달걀을 가져오는 순박한 사람들과 정도 들고, 진료하고 남는 시간엔 바닷가에 나가 쉬면서 차츰 그곳에서의 생활에 익숙해졌다.


"이곳 사람들은 의사는 뭐든지 다 알고 해결할 수 있는 사람으로 생각해요. 그래서 저는 의료봉사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의 자질구레한 문제들까지도 해결해 주어야 했습니다."

그는 갓 태어난 아이의 아버지라고 하는 여러 명의 청년 중 피검사도 하지만, 아이 엄마에게 누구를 정말 사랑하느냐고 묻고 아버지를 가려주기도 했다.

자신이 언제 태어났는지도 모르는 아이도 키와 몸무게, 치아를 검사한 후 주변 사람과 본인에 물어 나이를 정해주어야 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힘들어지는 게 가족 문제였다.

박사는 처음 아프리카로 봉사 나올 때 아이들은 할머니에게 맡겨놓고 왔다.

부모님과 헤어져 살아야 했던 아이들은 엄마 아빠한테 가겠다고 떼를 썼고 결국 온 가족이 아프리카에서 살기로 했다.

딸들을 라스팔마스까지 마중 가서 가슴에 큰 이름표를 달고 스튜어디스 손을 꼭 잡고 십여 년 만에 보는 부모를 앞에 두고도 몰라봤단다.

스튜어디스에게 엄마, 아빠를 꼭 찾아야 한다고 울먹이는 아이들에 목이 메어 말을 못 했다고 한다.

아이들 일기에 '어른이 되어 아기를 낳으면 아이들과 떨어져 사는 부모는 절대 되지 않겠다.'는 글을 봤을 때 어느 부모가 억장이 무너지지 않겠는가.

하지만 아이들은 열병 때문에 지독한 고생을 했고 다시 한국으로 돌려보낼 수밖에 없어 박사님은 아이들과 또 헤어져 지내야 했단다.


안 박사가 근무하던 오지 주변에는 여러 원주민 마을이 아직도 전통사회를 유지하고 있다.

오랜 세월 동안 그들을 치료하던 안 박사는 인심을 얻어 두 마을의 명예 추장으로 추대되었다.

관례에 따르면 새 추장에게는 6명의 처녀를 바친다고 한다.

명예 추장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

안 박사는 부인을 동반하고 명예 추장 추대식에 참석했는데, 처녀 6명이 상납 되어 무척 당황했다고 한다.

그는 '추대식은 정말 성대하고 훌륭했다. 평생 잊을 수 없는 추억이었다.'라고 당시의 감회를 말했다.


이 지역은 토속신앙이 지배적이다.

마을 추장은 적어도 6명 이상의 아내를 거느리는 게 보통이다.

일부다처는 추장만 누리는 특권이 아니다.

보통 사람도 능력에 따라 얼마든지 여러 아내를 둘 수 있다.

여러 아내를 감당하는 흑인 특유의 체력에 관하여 안 박사는 '아프리카 흑인의 체력은 천부적이다. 체질도 강하고 힘도 센 걸 보면 정력도 짐작이 간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 고장 사람들이 원숭이 고기를 즐겨 먹는다고 알려주었다.

나도 원숭이 고기를 얻어먹고 힘 한 번 써볼까?


안순구 박사는 아직도 아프리카를 잊지 못한다.

안 박사가 입에 달고 다니는 말 중 하나이다.

"전 아프리카를 좋아하고 그곳에 사는 사람들도 사랑합니다. 난, 아프리카에 미친 사람이었어요. 원주민들과 오랫동안 지내니 그저 한 가족, 한 형제라는 생각으로 치료했습니다."

서른둘에 한국을 떠나 예순셋에 한국으로 돌아온 안 박사.

돌아오기로 한 이유는 나이도 들고 더 가족들과 떨어져 살 수 없었기 때문이란다.

31년간 아프리카 원주민들을 위해 살아왔다면, 이제는 가족들과 함께 고국에서 남은 인생을 보내도 되겠지.


아프리카에서 경험했던 풍속과 풍토병 등에 대한 글을 쓴다.

안 박사는 다시 태어나도 아프리카에서 의료봉사를 할 거라고 말한다.

"돈도 좋고 명예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랑의 실천이라고 생각합니다."

환자를 잘 치료하는 의사는 명의겠지만, 항상 사랑을 실천하겠다는 마음가짐이 우선인 그분이 진정한 의사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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