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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성극 아카이브 Oct 31. 2019

여성 배우에게 더 많은 배역을 주자

공연내 젠더프리(Gender-free)

*넥스트 투 노멀, 프랑켄슈타인을 포함한 공연들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최근 연극 뮤지컬에서 가장 주목받는 이슈를 말할 때 ‘젠더프리(Gender-free)’를 빼놓을 수 없다. 젠더프리의 사전적 의미는 그 말대로 젠더에 대한 제약을 두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분법적인 성별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기존 성에 대한 규정을 흐리게 하는 게 젠더프리의 사전적 의미이다. 이러한 움직임으로 우리는 기존의 성별에 관련된 편협한 도상이나 편견적 이미지를 깨뜨릴 수 있다. 또한 그걸 넘어서서 더 많은 성별, 젠더를 안을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공연에서는, 여성에게 더 많은 역할을 주기 위해 젠더프리 움직임이 시작됐다.

변화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예술이 있는가 하면, 느린 예술이 있다. 이건 각 분야의 특성과 관련이 깊은 문제이다. 공연은 사회적 문제를 시사하는 특성에도 불구하고 변화가 느리다. 아직까지 ‘여류’라는 단어가 잔존하는 것만 봐도 그렇다. 특히 뮤지컬은 소재나 브랜드, 즉 서사의 대부분을 더 옛날의 것에서 빌려오기 때문에 문제가 더욱 두드러진다. 이 보수적인 장르는 기존의 것을 끊임없이 곱씹고 기존의 서사를 현대의 공연장에 다시 올린다. 이런 제작 방법에서 여성을 포함한 소수자는 자꾸만 소외되고 만다.


예를 들어보자. 햄릿은 분명 가치가 있는 연극이다. 이 명제는 쉽게 반론할 수 없다. 하지만 현대적 시점에서 햄릿과 오필리어의 쓰임을 보는 현시대의 관객이 의문을 갖는 것 또한 당연한 일이다. 햄릿은 분명 시대를 관통하는 명작이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햄릿이 쓰인 시대의 사고까지 모두 안을 수는 없다. 물론 햄릿은 가치가 있는 연극이기에 햄릿을 재현하는 것만으로도 연극적 의의가 존재한다. 하지만 우리가 재현에만 목을 맨다면 우리는 16세기에 사람이 아니었던 모든 이들을 연극에서 쫓아내야한다.


<햄릿>은 전 세계에서 끊임 없이 재생산 된다.


시대는 변하지만, 명작은 그 시대에 남아 있다. 셰익스피어가 쓴 햄릿은 의심의 여지없이 언제나 백인이었고 유진 오닐 희곡의 주인공들도 언제나 백인이었다. 가장은 괴로움에 못 이겨 바람을 피우고 엄마는 삯바느질을 하는 희곡들은 앞으로도 명작이라는 이름 아래서 되새김질 된다.

그렇기에 연극은 유난히 소수자(인종, 젠더, 성별 그 무엇이 됐던)에 각박하다. 고전이 많으면 많을 수록 여성 배우는 점점 역할이 줄어든다. 소수자가 맡을 수 있는 역할은 한정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고 그들은 언제나 타자로써 연극에 오른다. 이것을 타파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명작’만큼 많은 새로운 연극을 올리는 것이다. 지금 당장 수많은 여성 주연의 극이 만들어지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사실상 그러기 쉽지 않다는 걸 모두가 안다.


젠더프리는 조금 더 현실적이고 즉각적인 변화를 위해 공연계에 들어왔다. 남성서사는 넘쳐나고 여성서사는 빈곤해서 여성 배우들이 당장 설 자리조차 없는 상황에서 여성배우에게 더 많은 배역을 주기 위해 시작된 움직임이다. 남성의 배역을 여성에게 주자. 그동안 ‘사람’의 범주에 여성이 들어가지 못했기 때문에 철저히 소외된 고전 서사에서 ‘사람’으로 분류 되던 남성의 역할을 여성에게 주는 것이다. 이게 공연계의 젠더프리의 시초이다. 성녀와 창녀와 엄마가 아닌, 사람다운 배역 말이다.

그럼 젠더프리의 시초는 어디에 있을까? 의외로 여성들이 남성의 배역을 연기한 기록은 많다고 한다. 1700년대에도, 1800년대에도 <햄릿>을 여자가 맡은 적이 있으며 1900년대에 들어서도 종종 여성이 <햄릿>을 연기했다. 우리나라에는 여성국극이 인기리에 성행했었고, 일본에는 극단 ‘다카라즈카’가 여성으로만 구성된 뮤지컬을 꾸준히 올린다.


여성국극. (출처 :https://indiespace.kr/1398)


이렇게 꾸준히 시도된 젠더프리 캐스팅은 2010년에 들어서면서 본격적인 이슈로 자리 잡는다. 앞서 말했듯이 뚜렷한 목표가 생겼다. 여성 배우에게 배역을 주자. ‘사람’이 맡을 배역을 주자. 여성주의 담론과 소수자 담론을 공연계에 적용하자. 이런 시도가 이벤트성이 아니라 지속할 수 있게 하자. 그렇다. 우리는 소비자로서 공연계에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영국에서는 2012년 <줄리어스 시저>로, 한국에서는 2015년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로 젠더프리가 새로운 이슈를 가지고 관객 앞에 나타났다. 2012년의 <줄리어스 시저>는 전 캐스트가 여성이다. 필리다 로이드는 그 이후에도 그 이후의 고전 연극들도 모두 여성으로만 올렸다.


2015년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 헤롯 김영주 배우


한국에서는 2015년이지나 연출이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의 헤롯 왕 배역에 김영주 배우를 원캐스트 캐스팅 했다. 소극장에서도 시도는 이루어졌다. <살리에리>에서는 시대극임에도 여성 캐릭터가 바지를 입고 등장했다. 그 후 전형적인 남성극인 뮤지컬인 <트레이스 유>에 안유진 배우가 캐스팅 되면서 화재를 모았다. 이를 기점으로 국내에서도 여러 방면으로 젠더프리 캐스팅의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


여자 배우에게 배역을 주자. 어떤 배역?

공연마다 특성이 다르고 캐릭터의 의미도 다르다. 그렇기에 젠더프리도 한 가지 방법으로 진행될 수는 없다. 이미 여러 가지 방법으로 공연계는 젠더프리를 시도하고 있다. 남성이라고 으레 생각되고 합의 된 역할을 여성 배우가 가져가는 것(트레이스유 이우빈), 성별이 정해져 있지 않았던 캐릭터들을 여성이 가져가는 것(뮤지컬 더데빌), 남성 캐릭터를 각색을 거치지 않고 그대로 여성이 연기하는 것(연극 비평가) 등등 매우 많은 방향으로 시도 중이다.

그럼 우리는 한 가지 질문이 생긴다. 모든 역할을 젠더프리 할 수 있는 걸까? 그러니까. 모든 역할을 모두 여성 배우에게 줄 수 있는 걸까? 나의 대답은 그렇지 않고, 또 그러하다. 우리의 생각보다 더 많은 공연 안의 캐릭터들을 여성이 연기할 수 있다. 사실 대부분의 남성 배역을 여성에게 줘도 무리가 없다. 주인공이 남성인가? 일단 시도해보면 된다. 하지만 또 그렇지 못한 배역들도 있다. 이 지점을 잡아보는 건 재미있는 일이다. 과연 우리는 여성에게 ‘어떤’ 역할을 줘야 하는가.


왼쪽부터 <프랑켄슈타인>, <머더발라드>, <윤동주, 달을 쏘다>


여성에게 줘도 되는 역할은 무엇일까. 일단 여성을 대입해 봐라. 대부분의 배역이 이상할 게 없을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사람이 맡아도 되는 역할은 남성에게 할당됐기 때문이다. 오히려 여성이 맡아서 더 캐릭터와 공연의 의미가 살아나는 공연도 존재한다.

예를 들어보자. 대극장의 새로운 바람을 불고 온 <프랑켄슈타인>에는 매력적인 두 남자 캐릭터가 등장한다. ‘빅터 프랑켄슈타인’과 ‘괴물’은 여성으로 바뀌어도 하등 상관이 없다. 특히 빅터 프랑켄슈타인의 경우 오히려 여성 캐릭터가 된다면 캐릭터의 서사에 조금 더 풍부한 의미가 생긴다. ‘마녀’라는 손가락질을 받는 캐릭터는 빅터의 어머니가 아니라, 빅터 본인이 될 수 있다. 불운하고 똑똑한 여자가 악마의 수하나 마녀 취급받은 건 오래된 역사이기도 하다. 그 역사가 주는 핍박을 빅터가 그대로 안게 된다. 이건 캐릭터성을 강화시키는 장치로 작용한다. 빅터는 자신의 의지가 실현되고 통할 수 있는 곳을 찾아 전쟁터로 향했다. ‘이곳에서는 내 의지가 통하지 않아.’라는 빅터의 대사도 빅터가 여성이라면 더욱 깊은 함의를 갖게 된다. ‘신과 맞서 싸운 나는 프랑켄슈타인.’이라는 대사를 여성 캐릭터가 한다고 생각해보자. 신은 여성에게 생명을 창조할 수단을 주었다. 잉태이다. 만약에 빅터가 여성 캐릭터라면, 신이 준 창조의 방법, 즉 운명적 굴레를 벗어 던지고 마치 아버지 조물주처럼 손으로 생명을 만들겠다는 함의가 된다. 이건 굉장한 도전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생식기가 아닌, 아버지 신처럼 자신의 손으로 생명을 만들지만 그 생명은 괴물이 된다. 괴물의 서사는 날 때부터 아버지가 없는 ‘사생아’의 서사가 된다.

괴물을 움직이는 원동력은 분노이다. 태어날 때부터 자신의 존재 자체를 알지 못했던 괴물은 아무것도 모른 채 불행해졌어야 했고 그것 때문에 자신의 창조주에게 분노한다. ‘태어날 때부터 존재를 부정당한’ 서사는, 사실 딸의 서사이다. 특히 우리나라는 태어나기도 전에 존재를 부정당하는 무수한 딸들이 실재하는 나라다.

<머더 발라드>의 톰 또한 여성으로의 변이가 자연스럽다. <머더 발라드>는 서사를 앞세워 내놓는 뮤지컬이 아니다. 서사는 그저 매력적인 캐릭터들과 매혹적인 넘버를 이어가기 위한 장치에 불과하다. 이런 뮤지컬에서 톰을 여자가 맡는다면? 갑자기 서사 자체에서 그럴싸한 의미가 생긴다. 톰이 여성이라면 그는 결국 가부장 이데올로기 앞에서 무너진 퀴어 여성이 된다. 톰이 여자가 되는 순간 마이클은 가부장 이데올로기라는 거대한 담론을 대표한다. 그 '정상가족'에 세라는 잠시 편입하는 듯했으나 결국 가부장 이데올로기는 세라를 ‘담배 피울’ 시간도 없게 만들어버린다. 세라는 톰과의 불륜으로 가부장 이데올로기 안에서의 탈출을 시도한다.

<윤동주, 달을 쏘다> 같은 공연은 어떨까. 실존했던 남성 위인을 다루는 뮤지컬이니 남성 배우만 맡을 수 있을까? 이런 경우엔 캐릭터의 성별은 남성으로 남겨둔 채 여성 배우가 연기하면 된다.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의 헤롯 왕이나 연극 <비평가>처럼 말이다. 공연의 마지막 ‘동주야. 넌 무엇이 되고 싶니?’ 의 대답 ‘사람’이라는 울림은 오히려 커질지도 모른다.

<지킬 앤 하이드>의 지킬박사도 그렇다. 아예 여성 캐릭터로 바꿔도 전혀 문제 되지 않고, 남성 캐릭터로 남겨둔 채 여성배우를 캐스팅해도 된다. <엘리자베스>의 ‘죽음’의 경우 성별이 존재하지 않는 캐릭터이니 여성이 한 번쯤은 맡아야 한다. <록키호러쇼>의 프랑큰 퍼터 또한 그렇다.


반면 역할이 고정된 공연들도 분명히 존재한다.

어떤 역할이 성별을 그대로 놔둬야 할까. <넥스트 투 노멀>은 고정적 가족 관념을 말하고 있기 때문에 어머니와 아버지의 성별이 고정되어야 한다. 실제로 존재하지도 않은 아들은 엄마의 ‘수퍼보이’ 이자 이 가족의 문제이자 트라우마가 되어 무대 위를 부유하는 동안 딸은 ‘투명 소녀’ 로 존재하며 ‘사랑할 수 있는 만큼’의 사랑과 관심만을 받는다. 허상의 아들에게 밀려나는 딸의 서사와 정상 가족 이데올로기의 아이러니를 꼬집기 위해 이들의 성별은 고정 되어야 한다.

<더 헬멧>의 ‘룸 서울’의 헬멧 A 또한 남성이 적합하다. 그래야 이 백골단 대장은 전쟁과 독재의 한 가운데에 있는 흔히 얘기하는 ‘남성’의 문화를 대표하는 인물로 해석이 가능하며, 이는 남성적 문화에서 자신의 여성 후배(프락치)를 압박한다.

<호프 : 읽히지 않은 원고와 읽히지 않은 인생>의 원고지는 어떨까. 애매하다. 원고지를 남성 배우가 맡아서 의미를 만드는 장면은 분명 존재한다. 호프가 엄마의 유언장을 받고 ‘왜 내가 아니라 너인데.’라고 외치며 ‘내 엄말 빼앗고, 내 남자를 홀’렸다고 말하는 부분이 그렇다. 의인화이긴 하지만 계속해서 호프의 삶에서 호프보다 먼저가 되었던, 엄마를 빼앗아 간 캐릭터가 남성의 형상을 띄는 건 그 미장센 자체로도 의미가 생긴다. 그렇다고 아예 남자에게만 배정해야 하는 역할인가? 그러기엔 다른 부분에서 성별과 관련이 없고 캐릭터 자체도 무성이다. 이런 경우는 일단 한번 여자 배우에게 맡겨보면 된다.

그렇다. 확실한 건, 일단 한번 시도해 봐도 된다는 거다. 일단은 여자에게 한번 맡겨 보시라. 그것만으로도 먼지 쌓인 극은 환기가 되고, 아무도 몰랐던 의미가 발견 되기도 한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반짝반짝하고 멋진 여자배우들을 우리가 얼마나 놓쳤는지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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