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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성극 아카이브 Oct 31. 2019

엠마냐, 루시냐. 그것이 문제로다.

대극장 뮤지컬의 여성 캐릭터를 중심으로.

  수 많은 대극장 뮤지컬을 거칠게 두 종류로 나눈다면 이렇게 나눠보는 건 어떨까 : 남성이 주인공인 공연과 여성이 주인공인 공연 으로 말이다.  어떻게 보면 폭력적이기까지 한 이분법적 분류를 한 이유는 주인공을 분석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주인공 옆의 서브 캐릭터, 즉 주인공 캐릭터를 받쳐주는 이성 캐릭터에 관한 이야기이다.

  여성 극의 남성 캐릭터는 이렇다 할 특정적인 교집합 점이 크게 두드러지진 않는다. <엘리자베스>의 죽음은 엘리자베스만큼 매력적이고 비중 있는 캐릭터로 등장한다. <아이다>의 라다메스 장군도, <위키드>의 피예로도 꽤 괜찮은 캐릭터들이다. 좋은 넘버가 있고, 분량이 보장  되며, 설득가능한 설정도 존재한다. <마리앙투아네트>나 <마타하리> 같은 공연들도 여성 주인공 옆에 붙는 남성 캐릭터들은 분량과 확실한 캐릭터 그리고 넘버를 보장받는다.  

  반면에 남성 주연 대극장 공연의 여성 캐릭터들은 정확한 분류화가 가능하다. 우리가 모두 아는 분류법이다. -붉은 치마를 입고 루시가 될 것이냐, 흰 치마를 입고 엠마가 될 것이냐.-  루시와 엠마. 한동안 이건 대극장 여성 캐릭터가 피해갈 수 없는 선택지처럼 보였다.



흰 치마를 입고 엠마가 될 것이냐.


  일단, 전형적 엠마형 캐릭터에 관해서 이야기해보자. 남성 주인공의 옆에서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며 언제나 남성 주인공을 응원한다. 하지만 같이 토론을 하거나 고찰을 하진 않는다. 대신 따스한 미소를 지어준다. 성격은 온화하고 마치 천사처럼 묘사된다. 이들은 순수하고 아름다운 것이 매력이다. 큰 캐릭터 설정은 거기서 대부분 끝이 난다. <두 도시 이야기>의 루시 마네뜨, <프랑켄슈타인>의 줄리아, <드라큘라>의 미나 머레이, <윤동주, 달을 쏘다>의 이선화 등이 전형적인 엠마형 캐릭터이다. 이들의 극 중 목표는 남성 캐릭터가 행복해지는 것에 있거나 남성 주인공의 사랑을 쟁취하는 것에 있다. 조금의 변형이 가해진 엠마들도 존재한다. <셜록홈즈>의 루시, <킹아더>의 귀네비어, <노트르담 드 파리>의 플뢰르 드 리스등이 변칙적 엠마에 해당한다.


  남성 주인공은 이 엠마형 여성에게 사랑을 느끼고 이 여성 때문에 결정한 선택으로 고난에 처하기도 한다. 그리고 여성은, 남성과 행복하게 이어지거나, 남성을 위해 숭고한 희생을 한다. 캐릭터의 문제는 여기에 있다. 흰색 치마를 입은 이 무수한 ‘엠마’들은 대부분 많은 분량을 부여받지 못한다. 이들은 <마리앙투아네트>의 카르젠이나  <아이다>의 라다메스를 떠올리면 쉽게 비교 가능하다. 카르젠은 마리앙투아네트를 ‘받쳐주는’ 역할이다. 하지만 극 초반 실정을 알려고 하지 않는 마리앙투아네트를 보며 답답해하기도 하고 나중에는 마리앙투아네트를 구하러오는 등, 캐릭터의 심리와 개인서사가 상세히는 아니더라도 짐작 가능한 정도로 드러난다. 아이다의 라다메스는 어떤가. 아이다라는 뮤지컬을 이루는 세 축은 아이다, 라다메스, 암네리스의 사랑 이야기이다. 라다메스는 수 많은 듀엣곡과 중심넘버를 부여 받았다. 아이다를 보다보면 그런 생각이 문득 든다. ‘만약에 아이다가 남자였다면? 라다메스가 여성 캐릭터였다면 저렇게 극중에 많이 등장할 수 있었을까? 저렇게 활발하게 캐릭터 고유의 색을 입을 수 있었을까?’


  그렇다. 카르젠과 라다메스와는 달리 엠마형 캐릭터들은 심한 경우에는, 남성 캐릭터 없이 어떤 부분도 설명이 불가능할 정도로 의존적인 캐릭터 짜임을 보인다. 제대로 된 직업도, 성별도 나오지 않는 엠마형 캐릭터도 수두룩하다. 주연인 남성 캐릭터는 심적으로나 외적으로 모험을 떠나거나, 극도의 불안정 사태로 극 중에 등장한다. 엠마형 캐릭터는 남성 캐릭터가 다시 가야 할 곳, 지표 혹은 안정감처럼 묘사된다. 그러기에 숭고하다고 찬양을 받지만 그 뿐이다. 엠마형 캐릭터는 남성 주인공이 ‘고뇌’할 필요가 있을 때만 존재하는 숭고한 무언가에 불과하다. 캐릭터의 쓰임이 정해져 있으니 캐릭터는 자연스럽게 움직이지 못하고, 스토리도 당연 빈약해진다. 아니, 공연은 애초에 엠마형 캐릭터에게 많은 시간을 쓸 생각이 없다. 보통 남성주인공과 듀엣을 몇곡 부르고, 남성 주인공만을 바라보는 애절하고 잔잔한 넘버 한 두곡을 부른다. 아니, 개인 넘버라도 있으면 다행이다. 심하면 1막이후로 계속 등장하지 않다가, 클라이막스에 잠시 얼굴을 비추고 커튼콜때까지 등장하지 못하기도 한다. 이렇게 엠마형 캐릭터는 ‘도구’로써 극 안에 존재한다.

자. 다음의 주인공 소개를 보고 과연 어느 캐릭터인지 맞춰봐라.


“(남성 주인공캐릭터)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여인, 순수한 영혼의 소유자. 아름다운 외모를 지니고 있으며 현명하고 지혜롭다. 늘 옆에서 (남성 주인공캐릭터)를 북돋는다.”


  아마도 이 캐릭터의 프로필 사진은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카메라를 바라보고 있거나 약간 위를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제 너무 많이 봐서 굳이 보지 않아도 알 정도이다.

심지어 엠마형 캐릭터는 여성 주연 극에서도 등장한다. 불가항력의 매력을 뽐내는 루시형 여주인공의 반대에 서 있는 캐릭터로 말이다. 안타깝게도 이 성녀와 창녀 그리고 그 사이에서 고민하는 남성 캐릭터의 구성은 심지어 여자가 주인공일 때도 쓰인다. <카르멘>이 대표적으로 이런 구성을 따른다. 정열적인 여인 카르멘에게 욕망을 느끼는 호세. 하지만 호세에게는 천사 같은 약혼녀인 카타리나가 이미 옆에 있다. 카타리나와 함께하는 삶은 평온하고 안락하다. 그리고 안전하다. 호세는 정열적이고 위험한 카르멘과의 사랑과 평온한 카타리나와의 삶에서 갈등하게 된다. 그리고 모두가 예상할 수 있듯, 호세는 자신의 마음이 향하는 곳인 카르멘을 선택한다.


  여성 주연 극이지만 이 안에서 카타리나는 카르멘과 직접적으로 엮이지도 못한다. 카타리나가 이 안에서 맡는 임무는 단 하나이다. ‘카르멘에게 호세를 뺏길 것, 이러한 장면으로 카르멘의 매력과 열정을 증명할 것.’ 가혹한 임무이다.

<카르멘>에서의 예시처럼 엠마형 캐릭터는 대체로 루시형 캐릭터보다 분량이나 넘버의 임팩트가 적다. <프랑켄슈타인> 재연의 경우, 빅터 프랑켄슈타인을 오랜 시간 기다린 여성 캐릭터, 줄리아의 단 하나밖에 없는 솔로 넘버를 삭제해버리기도 했다. 굳이 넘버를 삭제하지 않아도 이미 줄리아의 비중은 솜털 같아서 대부분의 관객은 줄리아의 심리를 따라가는 데 어려움을 느낀다. 이런 와중에 단 하나밖에 없는 단독 넘버를 삭제해 버리니 정말로 줄리아의 용도는 ‘빅터 때문에 죽는’ 신부가 되어 버렸다. 연출조차 줄리아라는 캐릭터를 존중 해주지 않았던 예시이다.


붉은 치마를 입고 루시가 될 것이냐.


  그럼 루시형 캐릭터는 좀 대우가 나을까? 루시형 캐릭터는 언뜻 보기에는 엠마형 캐릭터보다 자유로워 보인다. 자신이 하고자 하는 말도 제법 잘 얘기한다. 남자 캐릭터를 본능과 욕망에 굴복시키는 매개체이기 때문에 귀에 확실히 남는 넘버도 있다. 붉은 치마를 입고 화장을 진하게 한 채 무대를 오가는 루시형 캐릭터들은 확실히 눈에는 더 띈다. 공연이라는 장르는 분명 루시형 캐릭터를 사랑한다. 오랜시간 공연은 루시형 캐릭터의 ‘여성’으로서의 고난을 사랑했고, 한 남성 캐릭터만을 진심으로 사랑하며 그 앞에서만은 ‘순결’해지는 사랑을 공연계는 칭송해 왔다. 사랑받는 만큼 많은 작품에 등장했다. 그럼 루시형 캐릭터는 제대로 기능을 하고 있을까? 인물로서?


  확실히 엠마형 캐릭터보다 넘버는 많아 보인다. 루시형 캐릭터와 함께 등장하는 업소, 즉 카바레나 창녀촌의 활기찬 리듬과 화려한 미장센, 그 안에의 매력적인 루시형 캐릭터는 극 중 포인트 넘버를 담당한다. 엠마형 캐릭터보다는 복합적인 아픔도 존재한다. 불특정 다수의 남성에게 상처받은 하위계층의 여성. 그 여성은 매너 좋은, 여태까지의 남자와는 확연히 다른 주인공 캐릭터에게 사랑에 빠진다. 그리고 그 앞에서 ‘순결’해진다. 그렇기에 엠마형 캐릭터의 사랑처럼 숭고하지는 않지만 분명 애절한 사랑으로 관객들에게 다가온다. 아픔이 절절히 묻어나는 넘버와 남성 캐릭터와의 불같이 뜨거운 사랑, 그리고 애절한 진심은 캐릭터를 보이게끔 하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여기서 우리는 의문이 든다. 그래서 저 캐릭터는 살아 숨쉬고 있다고 볼 수 있을까?


  결론적으로 루시형 캐릭터도 살아 숨 쉬는 인물이라고 보기엔 어렵다. 이들은 비슷한 처지에 놓여 있으며(몸을 팔아야 하는) 그것에 대한 다양한 사고가 허용되지 않는다. 루시형 캐릭터는 오로지 자신의 ‘붉은 치마’가 주는 아픔만 받아들여야 한다. 그것을 즐기거나, 야망에 차거나, 진지하게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남성중심적 사회에서 루시형 캐릭터는 ‘정숙하지 못한’ 팜므파탈이다. 요부이며, 남자를 홀리는 여자인 것이다. 루시형 캐릭터를 매력적으로 만들고 거부할 수 없는 넘버를 부르게 함으로써 극은 남성 캐릭터의 바람이나 부도덕한 행위를 합리화 시킨다. 그리고 창녀와 정숙한 남성 캐릭터의 불같은 연애사에 대한 모든 책임을 여성, 즉 루시형 캐릭터에게 전가해버린다.


  대표적으로 <잭더리퍼>의 폴리가 있다. 항구 근처 집창촌에서 인생을 산 폴리는 불행하고 우울한 여인으로 묘사 된다. 약에 취한 채 불운한 삶을 사는 폴리의 극중 역할은 앤더슨과의 이루어지지 않는 쓸쓸한 러브스토리를 끝내고, 젝더리퍼를 잡기 위한 미끼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 앤더슨 형사는 절절한 노래를 부른 뒤 잭더리퍼를 잡기 위한 미끼로 폴리, 즉 루시형 여성 캐릭터를 써버린다. <노트르담 드 파리>의 에스메렐다도 변형된 루시형 캐릭터에 속한다. 에스메렐다를 설명하는 수식어는 ‘아름다움’이다. 이 아름다움과 천진난만함에 매료된 각기 다른 남성들은 에스메렐다의 매력에 대해 찬미 한다. 남성 캐릭터들은 자신이 에스메렐다에 빠진 건 어쩔 수 없는 불가항력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에스메렐다는 예쁜 집시 여인이니까. 이 남자들은 자신들의 부도덕한 행위에 대한 이유를 에스메랄다에게 돌려버린다. 그리고 에스메렐다는 아무런 잘못 없이 고통을 받고 결국 죽음을 맞이한다. 에스메렐다의 절망적인 쓰임에 비해 확실히 에스메렐다의 심정이나 심리를 대변하는 넘버는 소극적이다.

  루시형 캐릭터에게서 가장 중요한 건 이들이 아름다워야 한다는 점이다. 캐릭터를 ‘아름다움’과 ‘치명적임’을 빼고 설명할 수 없다. 루시형 캐릭터가 보여주는 그 알량한 매력과 넘버의 파워는 그의 외모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캐릭터 설명은 이렇게 들어갈 것이다.


“관능적이고 치명적인 매력을 소유한 여인, 하지만 내면의 아픔을 숨기고 있다. (남자주인공)을 만난 뒤 새로운 삶을 갈망한다.”



루시형 캐릭터의 포르노적 전시


  루시형 캐릭터에는 한 가지 문제가 더 따라온다. 루시형 캐릭터를 평생 따라다닐 캐릭터 속성인 ‘창녀’에서 오는 극 중 문제점이다. 오랫동안 공연에서는 여성이 강간당하는 장면을 날 것 그대로 전시해왔다. 이런 장면들이 극 중 구성 요소로 꼭 필요한가 또한 의문이며, 장면을 재현하는 과정에서 늘 문제가 발생한다.


  예를 들어, <프랑켄슈타인>의 까뜨린느는 훌륭한 넘버를 가지고 있는 캐릭터이다. 까뜨린느가 부르는 ‘산다는 것’만큼 여성 배우가 캐릭터에 충실에서 분노와 슬픔을 동반한 복합적인 표현을 온 몸을 사용하여 부를 수 있는 넘버는 절대 흔하지 않다. 하지만 공연 구성적으로 까뜨린느의 역할은 처참하다. 괴물의 각성을 위해서 희생되는 도구로써만 존재할 뿐이다. 캐릭터의 서사 때문에 남성 연출가는 윤간이라는 키워드를 꺼냈다. 여성이 밑바닥으로 떨어지는 계기가 윤간밖에 존재하지 않는가? 까뜨린느의 삶을 들여다보면 절대 그렇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관객들이 먼저 변했기에, 관객들이 했던 여성주의적 요구가 수용되긴 했다. 윤간 장면은 남아있지만 삼연부터 자극성을 최소화하고 은연중의 암시만 전달하는 방식으로 장면수정이 이루어졌다. 그럼 정말로 이 문제가 해결된 걸까?



  안타깝게도, 바로 이 지점에서 공연 장르의 특성 때문에 다시 한번 문제가 발생한다. 이미 극작 안에서는 까뜨린느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이유가 '윤간'이라고 지정해놓은 상황이다. 그 상황에서 이 캐릭터의 분노에 대한 타당성을 설명해주는 '윤간'이라는 키워드가 연출에서 삭제 당해 버렸다. 그렇다면 배우 입장에서는, 당연히 그 캐릭터의 서사를 설명하기 위해 윤간을 더 철저히 표현할 수밖에 없다. 더욱더 처절하게. 관객들에게 이 캐릭터가 윤간장면은 많이 지워졌지만 ‘윤간을 당해서 인간의 마지막 존엄을 놓는 캐릭터의 처절한 서사’를 설득시키기 위해서 배우는 손을 발발 떨고 바닥을 기어가며 소리를 친다. 이게 배우의 잘못일까? 절대 아니다. 배우의 행위는 평면적인 캐릭터를 어떻게든 설득시키려는 노력에 가깝다. 문제는 그것들이 대극장을 꽉 채운 관객들 앞에 적나라하게 전시된다는 점이다.

  벌벌 떠는 여자배우가 윤간을 당한 직후의 감정을 연기하는 그 정적 속 장면은 참담하다. 배우가 연기를 너무 잘할 수록 이것들은 포르노적으로 전시 된다. 루시형 캐릭터에게 극이 주는 ‘징벌’적 혹은 ‘고난’적 윤간은 그렇게 고통 포르노로 전락한다.


  그럼 어떻게 해야할까. 윤간씬을 최소화 해도 문제가 발생하고 남앙상블을 동원해 자극적이게 표현해도 문제가 발생하나다면? 정답은 쉽다. 까뜨린느의 계기가 윤간이 아니면 된다. 어떤 여성이 삶에 대한 태도를 바꾸고 나락으로 떨어지는 유일한 방법이 윤간일리는 없지 않은가. 연출가는, 특히 남자 연출가하면 모두 여성 캐릭터에게 빚이 있다. 이제라도 극 중 여성 캐릭터를 더 들여다보고 그들에게 온전한 서사를 작게나마 주면 된다. (여성캐릭터 한정)게으른 창작 태도와 안일한 성평등 인지도를 빨리 벗고 말이다.



루시냐 엠마냐. 결국 ‘사람’이 되지 못한 캐릭터들.


  결국 엠마와 루시는 모두 남성중심적 서사에서 제대로 된 개인의 서사를 만들지 못하고 남성 주인공 주위를 부유하게 된다. 아이러니 하게도 엠마와 루시는, 남성 주인공을 위해 희생하거나, 그와의 약속을 끝까지 기다린다는 서사로 찬미를 받는다. 그들이 찬미를 받는 이유는 또 한 가지가 있다.

엠마와 루시의 다른 공통점은 아름다움이다. 그들의 캐리터 성은 아름다움으로 귀결된다. 아름답기에 치명적인 매력을 엠마의 기다림은 엠마가 ‘아름다운 연인’이기에 그 값어치를 인정받는다. 루시의 슬픔과 아픔은 그가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을 뽐내는 여자’이기 때문에 따라오는 부가적인 설정이다. 여성 캐릭터의 서사와 구성이 아름다움과 남성을 제외하면 설명될 수 없다면, 그 여성 캐릭터를 과연 살아 움직인다고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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