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중심 캐스팅은 퀴어 캐릭터에서도 계속 된다.
2016년 헤드윅 전미 투어에서 레나홀이 헤드윅에 캐스팅되면서 세계 최초로 여성 헤드윅이 등장했다. 이 기념비적인 사건을 전해 듣자마자 떠오르는 인터뷰가 있었다. “남자배우였다면 <헤드윅>도 정말 해보고 싶어요. (중략) 보통 뮤지컬에서 여배우는 남자배우를 ‘받쳐주는’ 역할로 소모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러한 태생적 한계를 벗어나기 위한 배우로서의 도구적 생존은 바로 ‘연기’에 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첫 여성 헤드윅이 나오기 2년 전인 2014년도 차지연 배우의 인터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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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지연 배우뿐만이 아니다. 공연을 좋아하는 관객이라면 공연계 여성 배우들이 다양한 역할에 대한 갈망이 남다르다는 건 손쉽게 알 수 있다. 헤드윅을 원하는 많은 여성 배우들이 있었고, 실제로 브로드웨이에서는 이미 여성 헤드윅이 나왔다. 한국에서 <헤드윅>이 처음 선보이고 10년이 훌쩍 넘은 시간 동안 수많은 남성 배우들이 괜찮은 연기를 해냈다. 그 시간 동안 우리는 왜 한 번도 여성 배우를 볼 수 없었을까? 심지어 헤드윅의 성 정체성은 수술을 한 MTF이다. 엄연히 따지면 여성에 들어가는 캐릭터이다.
연극과 뮤지컬은 퀴어 소재에 대해서 굉장히 열린 편이다. 비교적 변화가 느린 대극장에서도 퀴어 적 소재나 퀴어를 주인공으로 하는 공연은 심심치 않게 올라온다. <라카지>, <킹키부츠>, <헤드윅>, <록키호러쇼>, <프리실라> 등등 크로스드레서나 트렌스젠더, 기타 퀴어에 대한 이야기를 쉽게 만날 수 있다. 한 가지 이상한 점은, 이 매력적인 퀴어 캐릭터들을 맡는 배우의 성별이 정해져 있다는 점이다.
이분법적인 성별에서 가장 벗어나야 할 소재의 공연들이 한쪽 성별의 배우만 쓴다고 하니 궤변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사실이다. 사실 모든 공연의 퀴어 캐릭터는 남성 배우 중심에 맞춰서 움직인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시스젠더 남성을 중심으로 얼마나 ‘퀴어적 요소’를 가미했느냐로 캐릭터는 분류 된다. 여성 퀴어는 잘 찾아볼 수도 없다. 기껏해야 헤드윅 옆의 이츠학 정도이다. 한 마디로, 퀴어 연극에서조차 여성 배우는 조연 역할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반면 남성배우들이 맡는 퀴어의 스펙트럼은 훨씬 다양하다. 양분된 성별 구별법에서 그 경계에 있는 성별들은 모두 남성 배우들이 가져간다.
맞다. 이런 배역들은 애초에 남성에게 할당 되었다. 헤드윅도 프랑큰 퍼터도, <라카지>의 주인공 앨빈도, <킹키부츠>에서 젠더에 관한 고민을 하는 룰라도 모두 애초에 남성에게 주어진 역할이다. 다시 말해서, 처음부터 남성 배우를 고용할 생각으로 만들어진 ‘퀴어’캐릭터이다. 캐릭터의 퀴어적, 드렉적 성격은 남성배우에겐 새로운 도전이 된다. 연기 폭을 넓히고 이미지 변신을 할 수 있으며 다재다능함을 증명할 수 있게 된다. 심지어 이들은 하이힐을 신고 속눈썹을 붙이는 것만으로도 주목 받기도 한다. 헤테로 남성이 퀴어 캐릭터를 위해 화장을 하고 가발을 쓰고 사회의 ‘여성성’을 연기하는 걸 우리는 ‘이미지 변신’ 혹은 ‘연기 도전’이라고 부르고 이 도전을 높게 평가한다. 이런 도전은 남성 배우의 전유물이었다.
그럼 이런 역할들을 남성 배우가 꼭 맡아야 할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 걸까? <헤드윅>의 헤드윅과 <록키호러쇼>의 프랑큰 퍼터를 예로 들어보자.
헤드윅이라는 캐릭터가 갖는 정체성을 한 단어로 정의하자면 ‘경계선’이다. 동독과 서독을 가르는 베를린 장벽, 독일과 미국 그 사이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한 헤드윅, 성전환 수술을 했지만 없어지지 않고 남아 있는 ‘앵그리 인치’ 그 모든 것들이 헤드윅의 서사를 가득 채우고 있다. 그 경계성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성별은 아마 헤드윅과 같은 입장의 배우일 것이다. 바꿔 말하면, ‘남성’인 배우가 최적의 선택은 아니라는 점이다. 어느 한 배우가 최적의 캐스팅이 될 수는 있다. 하지만 헤드윅 같은 뮤지컬에서 굳이 오리지널 배우의 ‘성별’에 집착해서 캐스팅할 필요가 있을까? 헤드윅은 경계선 위에 놓인 인물인데 어떻게 한 성별에만 그 헤드윅을 맡길 수는 없어 보인다. 적어도 여러 성별을 캐스팅해서 헤드윅이 특정 성별의 배역으로 치부되지 않는 정도의 장치는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헤드윅은 남성의 역할로 한정됐다. 누구나 한 번쯤 탐낼 만큼 매력적이고 복합적인 캐릭터이지만 여성은 헤드윅이 아닌 이츠학에서 만족해야만 했다. 이유는 하나다. 처음에 남성이 맡아서.
<록키호러쇼>의 프랑큰 퍼터는 어떠한가? 캐릭터의 설정부터 이미 트렌스섹슈얼 행성에서 온 양성의 외계인이다. 70년대 지구인들의 얄팍한 성별 이분법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한 캐릭터로 묘사된다. 극 중에서 프랑큰 퍼터는 아예 남성과 여성 모두와 성관계를 맺는다. 아무리 생각해도 성별에 제약이 있을 캐릭터가 아니다. 하지만 남성으로 상정 되었고 언제나 남성이 맡고 있다.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뮤지컬은 ‘넘버’를 불러야 하는 공연이다. 그리고 그 ‘넘버’에는 분명 음역대가 존재한다. 원래 남성에게 배정 됐던 배역을 여성에게 주려면 이 넘버를 여성에 맡게 편곡해야하고 그런 일련의 과정에서 곡의 분위기가 달라지기도 한다. 또한 모든 넘버를, 듀엣곡이 있다면 듀엣곡까지 편곡하는 건 수고스러운 작업이다. 지금처럼 젠더프리 열풍이 불기 전 까지는 아마 저런 수고스러움 때문에 남성배우에게만 프랑큰 퍼터나 헤드윅을 시켰을지도 모른다.
그럼 우리는 더 원초적인 질문을 던져 볼 필요가 있다. 애초에 왜 남성 배우에게만 다양한 성별의 캐릭터가 배정 됐을까? 결론은 같다. 공연의 고질적인 문제가 또다시 대두된다. 남성 중심의 공연문화 때문에 여성에게는 제약이 가해지는 불합리한 캐스팅 문화가 심지어 퀴어, 즉 소수자를 다루는 분야에서도 지속 된 것이다. 심지어 우리는 이분법적인 성별 구분법에 맞지 않는 캐릭터를 만들 때조차도 남성을 기준으로 세우고, 남성 배우를 기본으로 한다. 애초에 공연계 자체가 남성 중심적이기 때문에 여성배우는 퀴어 적 소재의 공연에서도 남성 배우를 ‘받쳐주는’ 역할만 맡게 된다.
헤드윅을 남자만 해야 하는 이유. 그 이유는 없다. 이상하리만치 남성에게 배정된 ‘복합적’인 캐릭터 사이에서 심지어 퀴어 캐릭터까지 남성 배우의 전유물처럼 여겨왔다. 이제라도 좋으니 헤드윅과 프랑큰 퍼터를 멋지게 소화할 여성 배우들을 캐스팅 해야 할 시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