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에도 헤드윅은 시스젠더 남자만 가능했다.
한국뮤지컬어워즈에서의 차지연 배우의 Midnight Radio
2019년 초, 각종 공연 라인업이 공개됐을 때부터 여성 헤드윅을 기대하던 관객들은 있었다. 그리고 사실 개인적으로는 여성 헤드윅을 기정사실화 하고 기다렸다. 근거 없는 믿음은 아니었다. 마음 속에서 멋대로 확정 짓기까지 몇 개의 근거가 있었다.
첫째로, 이지나 연출의 최근 행보가 주목할 만 했다. 2015년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의 헤롯을 시작으로 이지나 연출은 자신이 맡은 공연 안에서 남성의 역할들을 여성 배우에게 맡기기 시작했다. 2018년에는 차지연 배우가, 2019년에는 구원영 배우가 <광화문 연가>의 월하 역할에 캐스팅되었다. 비슷한 시기에 <더 데빌>의 X 역할에도 차지연 배우가 들어갔다. 초연 때 X를 하고 싶어 했지만 그라첸을 맡았던 배우가 X로 돌아온 것이었다. 초연의 그라첸이 가히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자극적이고 소모적인 장면들의 한 가운데에 있었던 걸 생각하면 의미가 깊은 캐스팅의 변화였다.
바로 이 시기에 올라온 제2회 한국 뮤지컬 어워즈에서는 차지연 배우가 축하 공연으로 헤드윅의 'Midnight Radio'를 불렀다. 이 모든 게 마치 여성 헤드윅을 위한 준비과정 처럼 보였다. 여러 공연에서 젠더프리 캐스팅을 해보고, 여성 배우에게 헤드윅의 넘버를 맡겨보는 행위들. 이것들을 보며 연출이 준비하는 시간을 갖는 과정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리고 레나 홀 이후로 여성 음역의 편곡 가이드라인도 어느 정도 잡혔다고 생각했다. 전문가가 아닌 한낱 관객일 뿐이니 제대로 알진 못하지만, 참고할 케이스가 있는 것과 없는 건 아주 큰 차이다.
두번째로, 최근 몇 년간 연극 뮤지컬 장르의 관객은 끊임 없이 젠더프리를 요구 했다. 그리고 많은 공연들이 관객들의 눈치를 보며 젠더프리 캐스팅을 시도하는 중이었다. 공연들은 홍보 문구로 '젠더프리'를 내걸기 시작했다. 젠더프리는 먹히는 전략이었다. 주목을 끌고 쉽게 관객을 모을 수 있었으며, 연출이나 제작사가 생색을 내기에도 좋은 이슈였다. 특히 극의 수명이 닳아가고 있거나 환기가 필요한 공연들에게 젠더프리는 좋은 시도로 다가왔다.
이런 시점에서 헤드윅이란 극이 또 다시 남성 배우로만 올라온다면 그건 더 이상 '평타'가 아니었다. 관객들은 성장했다. 2014년 전까진 괜찮았다. 2016년에도 아주 드물게 여성 헤드윅에 대한 얘기가 나오면 '토미'씬을 걱정하는 관객들이 먼저 보였다. (개인적인 경험이니 각자가 기억하는 분위기가 다를 수 있다.) 2019년은 다르다. 지금은 다신 오지 않을 적기다. 2019년의 헤드윅 캐스팅에 있어서 제로의 지점은 존재하지 않는다. 남성으로만 캐스팅한다면 그건 마이너스 요소고, 여성 캐스팅이 단 한명이라도 있다면 플러스 요인이 될 시기이다. 이 상황에서 굳이 마이너스 요소를 고를 필요가 없어 보였다.
헤드윅은 환기가 필요한 공연이었고, 젠더 프리에 정말 적합한 공연이었으며, 이미 가이드라인이 있었다. 그리고 한국 연출은 젠더 프리 캐스팅을 이미 시도 중이었다. 그래서 당연히 여성 헤드윅이 올 줄 알았다. 여성 헤드윅이 오는 건 당연하고, 기존의 이츠학을 했던 배우 중에서 나오냐, 새로운 배우가 맡느냐가 관건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2019년의 헤드윅은 따놓은 '플러스 요소'를 선택하지 않았다.
왜 여성 배우의 헤드윅을 데려오지 않았을까? 적합한 배우가 없어서? 이건 속된 말로 개소리이다. 뮤지컬 <헤드윅>의 역대 이츠학은 이영미, 서문탁, 최우리, 안유진, 리사, 전혜진, 유리아 등이다. 오랜 시간 헤드윅을 지켜온 전혜진, 이영미 같은 배우가 헤드윅을 한 번은 꼭하길 바랬다. 새로운 배우도 괜찮았다. 누가 오더라도 환영하고 응원할 준비가 돼 있었다. 솔직히 왜 이번에도 여성 배우가 없는지 이유를 유추하기도 힘들다. 정말 모르겠다.
실망하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많이 서운하다. 이 새벽에 잠이 오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전원 여성배우일거라는 기대는 하지도 않았다. 그저 너덧명의 배우들중에 한 명은 여성일 줄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