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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성극 아카이브 Dec 15. 2019

연극 오펀스

여성캐릭터. 연극의 의미를 넓히다.

*해당 인터뷰를 참조했습니다. 인용된 모든 구절은 해당 링크의 인터뷰를 출처로 합니다.

https://m.post.naver.com/viewer/postView.nhn?volumeNo=26676757&memberNo=37451778



  2017년 한국  초연을 성공적으로 마친 연극 <오펀스>는 2019년 재연이 올라왔다. 초연과 달라진 부분을 묻는다면 당연 캐스팅 얘기를 꺼내지 않을 수 없다. 총 세 팀의 페어중 한 팀은 여성캐릭터 버전의 오펀스를 진행했다. 많은 관심과 뜨거운 호응 속에서 여성 버전의 오펀스는 성황리에 마무리 지었다. 시류를 잘 탄 선택이었다. 젠더프리(캐릭터 설정을 남성으로 둔 채 여성 배우가 연기한)가 아니라 캐릭터의 성별을 여성으로 바꾼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본래 연극 <오펀스>를 생각하면 더욱 그랬다.


 공연의 캐릭터들이 여성으로 변경되면서 공연 자체의 의미 폭이 넓이진 부분도, 관객한테 더 수월하게 다가오는 부분도 존재한다. 오펀스는 꽤 폭력적인 공연이다. 가진 의미의 따뜻함과 별개로 이 공연의 폭력성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래서 여성 캐릭터가 맡은 오펀스에서는 연극 비평가와 비슷한 메커니즘이 작동하게 된다. 여성 배우가 역할을 맡은 것만으로도 공연 안 폭력적인 장면들이 훨씬 편안하게 다가온다. 안타깝게도 이 세상은 가해자와 피해자를 성별로 특정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남성 캐릭터의 가스라이팅보다 여성 캐릭터의 가스라이팅을 더 잘 견딜 수 있고, 다른 감정 없이 오롯이 공연에 집중할 수 있게 된다.



정상가족의 틀에서 자유로운 캐릭터, 해롤드


  여성 캐릭터로 바뀌면서 공연은 훨씬 풍부한 맥락을 안았다. 우선 공연 내내 등장하는 ‘엄마’에 대한 의미이다. 연극 중반까지 ‘엄마’는 보편의 의미와 다를 바 없다. 따스한 가정, 나를 보듬어주는 존재. ‘우리가 필요한 건 엄마가 아니라 격려가 아니었을까.’라는 말이 덧붙여져도 ‘엄마’의 의미는 기존 통념과 다르게 해석되지 못한다. 해석의 폭이 넓어지지 못하는 건 기존 캐릭터의 성별과도 관련이 있다.

  ‘엄마’라는 존재를 폭넓게 격려의 뜻으로 치환했다고 하더라도 결국 남성 캐릭터가 ‘엄마’에게서 받지 못한 격려를 대신해주는 ‘유사 아버지’ 역할을 해주는 수행 서사이다. 공연 안에서도 그런 부분들이 심심치 않게 나타난다. 해롤드가 정착하고 싶어 하는 미망인이 트릿과 필립의 엄마와 비슷한 생김새라던가 하는 부분 말이다. 이런 설정 때문에 기존의 오펀스에서는 은연 중에 해롤드가 둘의 아빠일 수도 있다는 식으로 비춰주고 있다.

  관객의 입장에서 이들의 관계를 떠올릴 때 당연히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다. 해롤드가 이들의 진짜 아빠던, 유사 아빠 역할을 수행한 시카고 갱스터던간에 결국 해롤드의 이미지는 아버지의 어떤 것에 국한되고 만다. 더군다나 해롤드의 ‘미망인’이 둘의 ‘엄마’와 같은 이미지를 공유한다는 건 한 가지 문제점을 더 끌고 온다. 극에서 보여주는 상투적인 엄마의 이미지를 고정시키고, 강화한다는 점이다.


은연중에 있던 정상가족을 기반으로 한 구성부터 깨지기 시작한다.


  해롤드가 여성 캐릭터가 되면서 이런 ‘상투적인’ 부분들이 많이 완화됐다. 은연중에 있던 정상가족을 기반으로 한 구성부터 깨지기 시작한다. 해롤드는 유사 엄마로도, 유사 아빠로도 존재하지 않는 캐릭터로 변한다. 엄마와 미망인 묘사 – 옅은 금발에 매부리코와 전혀 다른 외관적 특징을 갖게 되면서 이들의 도상과 하나로 묶이지 않고, 캐릭터가 여성이기 때문에 아버지로도 묶이지 않는다. 가족 구성에 포함되지 않고, 자유로워진 해롤드는 온전하게 캐릭터로써 존재할 수 있다. 이건 해롤드 개인 서사와도 밀접하게 연관된 지점이다. 극 중에서 해롤드는 트릿을 보고 자기 자신을 봤다고 말한다. 추운 겨울 그리운 엄마품을 뒤로하고 거리를 배회하던 ‘앵벌이 키즈’를, 동류를 알아봤다는 말이다.


해롤드도 마찬가지예요. 여성으로서 갱스터 무리에서 살아왔지만 그 속에서도 유리천장이 있었겠죠. (중략) 거거서 자기랑 똑같이 살 수밖에 없었던 여자아이 트릿을 만나요. 트릿이 여자로 불릴 수 없었던 이유를 직감적으로 알았고, (중략) 사실 이게 한국이라서 생긴 혼란이라고 생각해요. 원래 대본에는 '딸', '형' 이런 호칭이 없거든요.


최유하배우의 인터뷰 내용처럼 해롤드가 여성 캐릭터가 되면서 ‘동류’라는 말에 더 많은 의미가 담겼다. 거리를 헤매는 아이들을 많다. 안타깝게도 그랬다. 그중에서 트릿이 해롤드의 눈을 사로잡은 건 해롤드가 여성이고, 트릿 또한 여성이기 때문이다. 해롤드는 분명 트릿에게 연민을 느꼈다. 그 연민은 트릿을 향한 것이기도 하고, 자기 자신을 향한 연민이기도 하다. '동류'를 알아본 해롤드는 마치 거울을 보듯 트릿을 마주했기 때문에 트릿의 어설픈 납치극에 장단을 맞춰 트릿의 집으로 들어온다.

 


트릿이 '해야 했던' 일


  집 안에서, 트릿은 필립을 학대한다. 전형적인 가스라이팅을 일삼으며 트릿이 집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철저히 통제한다. 트릿이 필립에게 갖는 감정은 복합적이다. 첫 번째로, 트릿은 필립이 자신을 떠나가지 않기를 바란다. 아주 절박하게. 그래서 필립이 떠날 수 있는 모든 루트를 차단한다. 알레르기를 지어내며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게 하고, 너는 내 보호 하에 안전하다는 인식을 계속 심는다. 두 번째로, 트릿이 경험했던 세계를 필립은 겪지 않길 바란다.

  최유하 배우 인터뷰에서 언급됐듯이, 트릿에게 세계는 유쾌한 공간이 아니다. 트릿이 어머니에게서 오던 얄팍한 보호마저 받지 못하게 됐을 때, 그가 마주한 세계는 불유쾌했고, 트릿은 그 ‘자본주의’ 세상에서 철저하게 약자였다. 트릿이 머리를 짧게 자르고 필립에게 자신을 형이라고 부르게 시킨다고 해서 이 사실이 변하는 건 아니다. ‘부모 없는’ ‘빈곤층’ ‘여자’ ‘애’에서 ‘부모 없는’ ‘빈곤층’ ‘애’가 됐을 뿐이다. 트릿은 자신이 겪었던 불유쾌한 세계를 필립에게 소개해주고 싶지 않다.

  트릿에게 필립은 언제나 아가였고, 자신이 보호해야만 하는 존재다. 트릿은 아무도 필립을 데려가지 못하게 문을 막고 스스로의 손을 더럽혔던 그 기억에서 멈춰 있는 존재다. 내 손에 남겨진 동생을 보호해야 한다는 강박이 트릿을 어떤 면에서 괴물처럼 만든다. 트릿의 입장에서 바깥세상은 정말로 필립의 기도를 부풀게 하고 혀를 축 내밀게 할 것처럼 위험해 보일지도 모른다. 트릿이 겪었던 세상은 너무 험한데 필립은 지나치게 천진하다.


트릿은 필립이 상처 받기를 원하지 않으면서 필립이 스스로 걸을 수 있게 돼서 자신을 떠날까 두려워한다.

 

 하지만 아이러니는 여기서 온다. 필립을 아무것도 모르게 고립시킨 게 바로 트릿이다. 트릿은 필립이 자라서 스스로 생각하고 걸어 나갈 수 있는 나이가 됐을 때도 필립을 어린아이로 남겨둔다. 일부러 필립의 독립성을 차단하는 핑계들을 줄줄이 만들어내며 말이다. 트릿은 필립이 상처 받기를 원하지 않으면서 필립이 스스로 걸을 수 있게 돼서 자신을 떠날까 두려워한다. 그리고 이런 이유를 바탕으로 트릿은 필립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까지 세뇌시킨다. 나는 저 아이를 가둔 게 아니야. 보호하고 있는 거야. 나는 널 보호해주는 거야. 내가 경험한 이 세상에서 네가 다치지 않게 보호하는 중이야.

  이렇게 보호라는 명분 아래에서 갇혀 사는 필립을 보며 트릿은 만족감을 느낀다. 아직 너무 여리고 약하기 때문에, 트릿의 보호 아래에서만 숨 쉴 수 있기 때문에 필립이 갇혀 사는 건 당연한 게 된다. 이 권위적 관계 속에서 트릿은 분명히 우월감을 느낀다. ‘오늘 진짜 날씨가 좋았 거든.’ ‘넌 안됐다. 이런 날씨에 집에만 있어야 하고.’ 필립은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까, 심지어 나 없이는 숨조차 쉴 수 없으니까. 영원히 내 옆에 있을 것이다. 글도 읽을 수 없고 세상 물정이라곤 아무것도 모르니까. 필립에 대한 자신의 분리불안을 감추기 위한 가스라이팅과, 결과에 대한 우월감. 그러면서도 필립에게 진심으로 이 세상을 보여주고 싶지 않은 마음까지. ‘그 사건’ 이후로 트릿은 안부터 곪았다.



격려라는 행위


  엄마를 잃어본 슬픔, 동생을 잃기 직전까지 간 경험 등 트릿은 큰 사건에 대해서 충분히 슬퍼하고 이겨낼 시간 없이 자신과 동생을 보호해야 했다. “저는 격려 필요 없어요. 임무만 주시면 돼요.” 누군가가 떠나는 걸 두려워하니 당연히 낯선 사람이 오는 것도 싫어한다. 트릿에게 어떠한 변화는 더 나쁘게 된다는 말과 같다. 변화는 누군가 떠나거나, 상황이 더 악화된다는 뜻이다. ‘나는 안정적인 거 원하지 않아. 그냥 지금 당신 수중에 있는 돈만 원해.’의 대사는 그걸 뜻한다. 트릿은 변화를 원치 않는다.

  해롤드의 ‘넌 여태까지 네가 해야 할 일을 잘 해왔다.’는 트릿을 위로하는 말이면서 트릿을 질타하는 말이기도 하다. 해롤드는 질타를 하지 않았으나 트릿은 그걸 위로 섞인 질타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이 말을 들으면서 한편으로 죄책감을 느꼈을 거란 뜻이다. 필립에게 가하는 행위들이 잘못됐다는 건 누구보다 트릿 본인이 기민하게 알고 있다. 하지만 트릿을 집어삼킨 불안감 – 필립마저 나를 떠나고 이 세상에는 나 혼자 남겨질지도 모른다.- 이 정상적인 사고를 불가능하게 했다. 해롤드는 트릿을 보며 이미 자신과 같은 처지라는 걸, 저 아이도 이 세상에서 기를 쓰고 살아가고 있다는 걸 감지했다.

   나아가서 트릿의 강박과 분리불안, 필립에게 갖는 복합적인 감정을 해롤드라면 이해했을지도 모른다. 이미 한계까지 내몰린 트릿이 어떤 식으로 필립을 대하게 됐는지-절대 그게 좋은 방법은 아니지만. 단지 연극적 구성으로 봤을 - 해롤드라면 기민하게 간파했을 것이다. ‘여태까지 네가 해야  일을 해왔다.’ 너를 내가 이해한다. 너의 행동마저 나는 이해한다.라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듣는 트릿은 죄책감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다. 그걸 알기에 해롤드는 넌지시 말을 곁들인다. 혼자는  된다는 , 둘이 같이 있어야 한다는 , 그리고 그걸 위해서 해롤드는 트릿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이  격려를 해줄  있다는  말이다.


트릿은 끝까지 해롤드의 격려를 거절한다.(사진은 필립과 해롤드)

  

트릿은 끝까지 해롤드의 격려를 거절한다. 해롤드는 '고개를 젓지 않아도 된다.' 라고 말하지만 트릿은 고개를 젓는다. 트릿은 격려라는 행위가 두렵다. 해롤드는 유난히 상호 접촉이 많은 캐릭터이다. 어깨를 주물러주는 것만 얘기하는 게 아니다. 서슴없이 다른 사람과의 물리적 거리를 좁히고 들어온다. 트릿에게 이러한 공간의 침범과 접촉은 두 가지 경험으로 분리된다. 한 번은 아주 어릴 적에 느낀 엄마의 손길. 두 번째는 ‘그 사건’ 때 주머니칼에서 전해지던 느낌. 그리고 그 이후 거리에서의 무수한 접촉. 소매치기를 하고 다니니 보통 누군가가 트릿의 어깨를 잡는다면 그건 경찰일지도, 지갑의 주인일지도 모른다.

  극 중에서도 나오듯이 트릿은 정강이를 차이거나, 누군가와 대립하거나, 그게 아니더라도 누간가가 트릿을 먼저 만지는 것이 아니라 트릿이 먼저 누군가의 주머니에 은밀하게 접촉해야 하는 세계에서 산다. 손이라는 건 트릿에게 이런 의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릿은 해롤드가 내민 손이 그것과 다르다는 걸 알고 있다. 해롤드가 필립을 위로하는 방식을 보며 트릿 또한 해롤드에게 칭찬받기를 원한다. 트릿은 인정 욕구를 느끼지만 접촉은 거부한다. 하지만 해롤드에게 칭찬과 격려는 같은 것인데도 말이다. 트릿은 사랑받고 싶은 동시에 그걸 두려워한다. 엄마의 손길을 알기 때문에 해롤드의 손이 얼마나 따뜻할지 넌지시 알 수 있지만 바깥의 세계에서 겪었던 무수한 접촉, 그리고 그 손이 언제 떠날지 모른다는 슬픈 경험이 트릿이 겁을 먹게 만든다.



해롤드가 가져보지 못한 과거의 가능성, 필립.


  해롤드가 필립을 대하는 방법은 상냥하다, 어두운 색깔의 바닥 타일만 밟을 수 있다면 바닥에 카펫을 깔자. 신발 끈을 묶을 수 없으면 로퍼를 신으면 돼. 네가 길을 찾지 못한다면 내가 지도를 줄게. 상냥하고, 친절한 방법이면서도 아무나 제시할 수 없는 방법이기도 하다. 네가 있는 모든 곳을 내가 안전하게 해주겠다는 마법 같은 말들 뒤에는 더 마법 같은 전제조건이 붙는다. ‘네 곁을 떠나지 않으마.’ 아마 해롤드의 이 말은 진심이었을 것이다. 해롤드는 필립이 괜찮아질 때까지 카펫을 깔고, 로퍼를 사주고, 지도에 표시를 해줄 수 있는 사람이다. 손이 많이 가는 아낌의 방법이다. 해롤드가 멋있는 점은 여기에 있다. 해롤드는 이 모든 걸 해줄 수 있는 사람이다. 옅은 베이지색 로퍼를 사주고 옷을 모조리 바꿔주며, 필립이 원할 때 언제나 같이 산책을 나갈 수 있는 인물이다. 그렇기에 필립에게 해롤드의 존재는 마법과도 같다.

  해롤드는 필립을 보며 자신이 가져보지 못한 과거를 투영한다. 시카고 고아원 출신이 아메리카 익스프레스 카드를 마음대로 쓸 수 있게 되기까지의 시간은 감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험한 여정이었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트릿은, 이미 그 고난을 아는 ‘아이’이다. 하지만 필립은 그렇지 않다. 해롤드는 필립에게서 트릿과 자신과는 다른 길을 봤다. 타의이기는 했으나 필립은 바깥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필립은 천진하다. 해롤드가 자기 자신도, 트릿도 받지 못한 애정과 보호와 사랑을 그저 한 없이 줄 수 있는 존재인 것이다. 마치 해롤드가 어느 겨울에 봤던 창문 안 따뜻한 가정의 아이처럼 말이다. 해롤드의 마법은 그렇게 시작된다. 해롤드는 필립에게 ‘마법’을 부리며 따뜻하고 풍요로운 가정을 모사한다.

  하지만 이 방법들이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는 없다. 해롤드는 ‘보호’를 해줄 뿐, 영구적인 해결책을 제시하진 않는다. 필라델피아 지하철 코인을 사는 방법을 알려주는 게 아니라, 지하철 코인을 사서 마법처럼 필립 앞에 나타난다. 해롤드가 영원히 필립에게 마법을 부릴 수 있었다면 괜찮았을지도 모르겠지만, 그건 불가능하다. 실제로도 필립은 지도를 찢기고 만다.


  해롤드의 ‘마법’에서 벗어나 필립이 스스로 근본적인 해답을 깨닫는 시기는 2부, 트릿과의 대립 이후이다. 트릿이 지도를 찢어버린 후 필립은 스스로 말한다, ‘언젠가 저는 지도 없이도 길을 찾을 수 있게 될 거예요,’ 필립의 누군가의 도움 없이 가방을 쌌을 때, 필립은 온전하게 설 수 있게 됐고 근본적인 해답을 스스로 깨닫는다.

  그렇기 때문에 해롤드의 죽음 후에 쓰러진 트릿을 위로하는 사람이 필립이 될 수 있다. ‘격려’가 필요한 트릿에게 ‘격려’와 함께 위로를 건넬 수 있는 존재가 된 것이다. 트릿이 필립마저 자기 곁을 떠난다는 생각에 무너지고, 트릿 앞에서 불안감을 온전히 드러냈을 때 필립은 성장해 있었다. 둘은 서로에게 이전과는 다른 방법으로 의지하게 된다.

  해롤드가 사준 로퍼를 벗고 다시 신은 운동화의 끈을 필립이 묶어주는 행위는 앞으로의 이들 관계를 축약해서 보여준다. 신발끈을 묶지 못하는 걸 다른 사람들에게 들켜도 된다. 신발끈을 묶어줄 사람이 있으니까. 해롤드가 이 둘에게 전해주려고 한 격려와 삶을 살아가는 방법들은 아이러니하게도 해롤드의 죽음으로 이들에게 전달된다. 서로에게 솔직해지고 서로가 서로를 보듬고 의지할 것, 서로가 서로에게 격려를 건넬 것. 그걸 알았기 때문에 필립의 강박적인 행위는 해소된다. 이제 필립은 어두운 색 타일만 밟지 않아도 된다. 타일 밖으로 자유롭게 나올 수 있다. 해롤드의 뜻대로, 트릿과 필립은 성장했다. 해롤드가 도와주지 않아도 이제 둘은 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서로룰 위할 수 있고, 같이 나아갈 수 있을 만큼 성장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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