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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벼슬기 Sep 12. 2023

'노 키즈 존' 시대의 '예스 키즈 존'

야구라는 기쁨과 고통 16: 삼성 라이온즈파크

2023년 9월 2일(토)


Y가 취업했다. 야구장 메이트 Y의 취업 이후, 나는 다시 혼자가 되었다. 야구장은 혼자도 좋다. 그러나 꽤 오랜 시간 Y와 함께 하다 혼자 가려니 기분이 이상했다. 필드 안으로 들어간 친구와, 여전히 파울라인 바깥에 있는 내가 병존하는 느낌이었다.


전국 9개 구장 여행의 마지막 여정은 대구다. NC의 원정 경기 일정을 따라 잡다보니 그렇게 되었다. '대프리카'의 위용 때문에 한여름은 좀 무서웠는데, 그래도 9월 초로 잡힌 게 다행이다 싶었다.


나는 대구 출생, 창원 출신이다. 아빠의 고향이 대구이고, 일찍 친정 엄마를 여읜 엄마는 시댁 근처 병원에서 출산을 했다. 그러나 정말로 태어난 것 외에 살아본 적이 없고, 다섯살 이래로는 쭉 창원(옛 지명 진해)에서 자라 초·중·고등학교까지 다녔기 때문에 누가 고향을 물어보면 '창원'이라 한다. 그래도 명절이면 큰아버지댁이 있는 대구를 찾았고, 사촌들과 우방 타워랜드나 동성로에 놀러 간 기억 등등이 있다. 명절만 지나고 나면, 내 사투리 억양이 묘하게 달라져서 친구들이 놀렸다. 글로는 설명이 힘든 억양은 그렇다치고, 적어도 경상도의 남쪽에서는 쓰지 않는 "니 그카면 좋나?" 같은 것들.(경남에서는 '그라면'이라고 하지 'ㅋ'자는 잘 안 붙인다.) 나는 한 살 많은 (실제론 세 달 빨리 태어나 학교를 먼저 간) 사촌을 '오빠'라고 부르길 거부했는데, 그 때마다 그는 내게 "니 그카면 좋나?" 했던 것이다.


그러나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내가 서울로 대학을 와서 명절이면 우리 가족 만나기도 바빠진 뒤로는 대구로 친척들을 만나러 간 일은 거의 없었다. 사촌 오빠 결혼식을 제외하고, 족히 10년 만의 대구행이었다. 바다가 있는 부산이면 모를까, 대구는 부러 가는 도시는 못 되니까. 실로 간만에 찾는, 그것도 가족들도 없이 단독자로 찾는 대구였다.


야구는 오후 5시에 시작이건만, 그래도 간 김에 여행이란 걸 하고 싶어서 오전 7시부터 KTX에 올랐다. 하늘이 무겁게 착 가라앉은 날이었다. 비 예보가 하루에도 너덧번 수도 없이 바뀌어 '삼성라이온즈파크 날씨'를 치면 경기 시작 시간의 강수 확률이 60%였다가 10%였다가 했다. 그래도 '비구름대가 예상보다 남동쪽에 형성돼 대구엔 큰 영향이 없을 것'이라는 기상 담당 기자인 친구의 조언에 힘입어 무작정 출발했다. '설마 대구까지 갔는데 또 우취가 되겠어' 하는 안일한 생각(나는 6월엔 창원까지 가서 눈 앞에서 우취를 맞은 바 있다)으로 '못 먹어도 고' 했다. (나는 야구 앞에서, 수고를 마다않는 너그러운 사람이 된다...)


오전 9시 30분, 동대구역에 도착했다. 하늘이 한층 더 낮게 드리우고, 비가 거치적거릴 정도로 기분 나쁘게 내리고 있었다. KTX역에서 도시철도로 갈아타는 구간이 지상의 야외라 걸어가며 우산을 썼다. 이 정도면 야구는 충분히 한다. 나는 우비도 챙겨왔겠다 더 바라지 않으니 비가 오더라도 딱 이 정도만 왔으면 좋겠다고, 바라마지 않으며 동대구역 앞에서 기념 셀카를 찍었다.


성공적인 조식을 위해, 중앙로역으로 향했다. 나는 지역의 도시에 가면, 조식으로 국밥을 먹는 걸 선호한다. 속 한 구석이 따뜻해오매 든든한 기운이 오래 가기 때문이다. 동성로에 인접한 중앙로역 맛집을 검색하다가 '군위식당'을 발견했다. 상호명부터 느낌이 빡 왔는데, 아니나 다를까 요즘 맛집 유튜브계의 바이블이라는 '성시경의 먹을텐데'에 소개된 식당이었다. 그러고보니 나도 전에 그 편을 봤고, 잘 삶은 돼지 비계의 윤기에 침을 꼴깍 삼킨 기억이 났다. 주저없이 그곳으로 낙점했다.


중앙로역에는 뜻밖에 2·18 대구지하철 화재 참사 기억공간이 조성돼 있어 내 발길을 붙들었다. '2003년 2월 18일, 오전 9시 53분. 지하철화재참사로 192명의 사망자와 151명의 부상자가 발생한 사고 현장'. 내가 인식이라는 게 좀 생기고 나서 일어난 참사들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게 2001년의 9·11 테러와 2003년의 대구 지하철 화재다. 9·11 테러는 쌍둥이 빌딩을 여객기가 들이받는, 그 비주얼 쇼크로 말미암아 학교에서 아이들이랑 입에 침을 튀겨가며 누가누가 더 많이 아나 내기하듯 격렬한 토론을 벌였던 기억이 있다. 9·11 테러가 아스라이 먼 곳에서 일어난 영화같은 일, 정도로 치부됐던 한편 대구 지하철 화재는 1년에 한두번은 찾았던 출생지에서 일어난 일이라 피부로 더 와닿는 느낌이었다. 우리 동네에 지하철은 없지만, 만약에 내가 탄 버스에 누군가 불을 지른다면. 혹은 가끔 옆 동네 부산 가서 타는 지하철에 누가 불을 지른다면, 하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던 것이다.


중앙로역의 참사 기억공간은 새까만 벽에 아로새긴 시민들의 추모 글귀로부터 시작한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뒤에 붙은 다정한 하트 같은 것들이 20년 세월을 지나 더욱 마음을 아리게 한다. 기억 공간에는 사망한 이들의 위패가 태어난 연도와 함께 차곡차곡 쌓여 있는데, 이들이 살아 있었다면 지금 스무살은 더 먹었겠거니… 라고 생각하면 참사가 앗아간 20년 세월이 더욱 잔인하게 느껴졌다. 위패 앞에는 언제 올려졌는지도 모르게 바짝 마른 하얀 국화가, 놓여 있었다. 화염에 그을은 ATM기, 신문가판대를 지나쳐 마음이 더욱 복잡해졌다.


군위가 아닌 대구에 있는 군위식당은, 역에서 퍽 가까웠다. 도보로 5분 남짓. 양옆에도 돼지를 취급하는 식당인 듯 시장 골목에 돼지 삶는 냄새가 자욱했다. (냄새가 자욱하다는 표현이 맞는지 모르겠으나, 정말로 돼지 삶는 물의 증기가 눈에 보이리라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만치 전격적인 냄새였다.) 오전 10시도 안 된 시간에, 벌써부터 국밥 한그릇에 소주를 깐 이들이 보였다. 이른 시간부터 빈 자리를 찾기 어려울만치 제법 붐비는 식당이었다. 5분쯤 기다려 자리를 하나 얻었고 만원 짜리 '고기밥'을 시켰다.



고기밥은 수육 고기에, 국밥 국물을 따로 내주는 구성이다. 수육을 쌈 싸먹으라고 상추도 열장 가량 내준다. 요즘 물가를 생각하면 혼자 와서 부추, 고추, 양파, 마늘, 상추를 구븨구븨 펴놓고 먹으려니 죄송하다는 생각마저 든다. 수육 고기는 유튜브에서 보던 대로 윤기가 반질반질했는데, 입에 넣고 씹었더니 딱 견디기 좋을 만큼의 군내와 고소한 기름내가 환상적이었다. 새우젓에도 찍어먹고, 쌈에도 넣어 싸먹고 하며 요모조모로 열심히 먹었다. 대여섯점 남겨서는 국물에 '풍덩' 했다. 밥도 말고 다데기도 풀고 부추도 넣어 시뻘건 스타일의 국밥을 만들어 먹었다. 그러고도 고기는 결국 몇 점 남겼다. 아직은 내공이 부족한 탓이었다.


부른 배를 안고 식당 바로 옆에 있는 경상감영공원을 돌았다. 조선 선조 때 경상감영이 있었며 1910년부터 50여년 세월 동안엔 경상북도 청사가 있다는 곳. 대대로 경상도의 도청이 있었던 곳이다. 경상감영 관찰사의 집무실(선화당), 처소(징청각) 등을 느긋하게 돈다. 머리 위로 내리쬐는 햇볕이 점점 뙤약볕으로 바뀌고 있었다. 비는 그친지 오래다. 도심 속 작고 낡은 공원에서 실시간으로 물기가 말라가는 모습을 보는 일은 생동감을 선사했다. 또 공원 한 쪽에는 분수가 있어서 질세라 포말을 하늘로 흩뿌리고 있었다.



날이 뜨거워져오니 찬 커피가 땡겼다. 블로그들에서 본, 한옥 고택 형태의 스타벅스 지점을 찾아나섰다. 스타벅스 대구종로고택점의 안쪽 별관은 100년된 고택을 그대로 살려 지었단다. 한옥 형태의 스타벅스는 다른 곳에도 있어도, 고택을 살려 지은 곳은 이곳이 유일무이하다고. 아침과 점심 사이, 애매한 시간이어서인지 자리가 없어 못 앉을 정도는 아니었다. 나는 안쪽 뜰이 보이는 본관 창가에 자리를 잡고 평소와 다르게 달디단 아이스 바닐라크림콜드브루를 그란데 사이즈로 시켰다.


달달한 커피를 혀로 굴려가며 오래오래 마셨다. 이번 야구 원정에 들고 온 책은 장일호 기자의 에세이 <슬픔의 방문>이었다. 여행지에 들고 오는 책으로는 서사가 휘몰아치는 장편 소설, 이런 것보다는 짧은 단상들을 담은 에세이나 단편 소설이 좋다. 여행이 책 속 서사에 파묻혀선 곤란하기 때문이다. 책 읽는 중간중간 얼굴을 들어 주변 풍경도 보고, 쉬어갈 수 있는 책이 여행과 공존할 수 있다. 여러갈래로 추천을 받아 들고 온 <슬픔의 방문>은 또래, 여성, 기자라는 접점이 있어서인지 눈으로 밑줄 쳐가며 읽을 부분이 많았다.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이라 실제 밑줄을 치진 못했다.) 그 가운데, 하늘로 돌아간 '샤이니' 멤버 종현의 이름을 따다 아이 이름을 'Jonghyun'으로 짓고자 한 해외 팬의 사연을 소개하며 인용한 영화감독 홍상수의 말이 눈에 띄었다.  


"어차피 아무것도 그렇게 잘 알 수가 없습니다. 하여간 잘 안다고 해서 좋아하는 건 좀 문제가 있습니다. 먼저 좋아하고, 상관없이 좋아하는 거죠. 좋아하는데 그 사람에게서 조금씩 다른 면을 보게 되고, 그걸 보게 되는 과정도 즐기는 것, 그게 좋은 것 같습니다."


그가 말하는 '입덕'의 본질. 평생에 다시 없을 뜨거운 '입덕'의 과정을 거치느라, 전국 9개 도시를 돌고 있는 나의 가슴에 들어와 '콱' 박히는 문장이었다. 고택이자 스벅인 그곳에서의 시간은 북적이는 사람들과 관계없이 고요히 흘러갔다.



낯선 도시 가서 공산품 사기를 즐기는 나이기에, 대구 최대의 번화가인 동성로에서 쇼핑도 즐겼다. 뜬금 지오다노엘 가서, 가을 맞이 셔츠를 하나 사야지 했는데 맘에 드는 건 없어서 결국 돌아섰다. 동성로에서 유명한 빈티지샵들도 몇 군데 갔다. 기하학적 무늬가 예쁜 파란색 셔츠가 끌렸지만, 사이즈 미스로 조용히 내려놨다. 점심은 대구에서 유명한 '평냉' 집이라는 부산안면옥으로 가다가, 가는 길에 만난 라멘집이 시선을 끌어 마음을 고쳐 먹었다. 원래대로 가려던 곳으로 갔어야 했다고, 처음 마음이란 그래서 중요한 것이라고, 거기서 교훈을 얻었다.


다시 찌뿌드드해진 하늘을 바라보며, 라이온즈파크로 향했다. 동성로에서 대중교통으로 30분쯤 걸리는 거리에 있었다. 반월당역에서부터 삼성의 푸른 유니폼을 입은 사람들을 만났다. 삼성의 파랑은 질리도록 새파란 파랑인데, 그 채도와 명도가 클래식해서 가히 1982년 KBO 출범 당시부터 있었던 원년 구단다웠다. 삼성 소속 선수들 더러 '푸른피'가 흐른다고 하던데, 정말로 저런 색깔 푸른피라면 무섭겠다 싶을 만큼 서슬퍼런 파랑이었다. 그들과 한데 엉겨 대공원역에서 내렸다.


지하철역 에스컬레이터에서부터 삼성 선수들을 쭉 일별한 후, 드디어 라이온즈파크를 만났다. 원태인, 오승환, 오재일, 강민호, 구자욱이 그려진 큰 걸개 그림이 나를 맞았다. 북적북적한 사람들을 헤치고 팀스토어에 가서 굿즈들을 구경했다. 역사가 오래된 구단의 팀스토어에 오면 나의 관심은 항상 '레트로 유니폼'에 있는데, 삼성의 그것에는 심지어 한자로 '三星'이 아로새겨져 있어서 더욱 탐이 났다. (나는 그렇게나 옛것에 끌린다.) 그러나 기념만 하자고 비싼 유니폼을 사기에는, 자금 사정에 한계가 있어서 몇 번 만지작을 거듭하다가 나왔다.


지류 티켓을 끊어서 외야로 입장했다. 나의 자리는 1루 익사이팅존. 라팍은 광주 챔필과 더불어 원정 더그아웃이 1루에, 홈 더그아웃이 3루에 있는 구조다. 라팍의 익존은 잠실의 익존 마냥 누에서 한참 뒤에 있지 않고 주루코치 바로 뒤에 근접하다는 얘기를 듣고, 내야석 대신 익존을 예매했다. 가서 앉아보니, 잠실보다는 훨씬 내야에 바투 붙어 있어서 마운드에 오른 투수 피칭이나 타석도 제법 잘 보였다. (주루코치만 나의 시야에 있지 않는다면) 나는 익존에서도 두 번째 열, 더그아웃 바로 옆 자리였다. 익존 특유의 반지하뷰 때문에 그 앞을 지나다니는 선수들이 무대에 오른 배우 같아 보였다.


익존에 옹송그려서 넓디넓은 야구장을 올려다봤다. 외야쪽 벽에 그려진 이승엽 전 삼성의 레전드이자 현 두산 감독의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벽화 밑에는 핸드프린팅과 그가 세운 역사인 한일 통산 627 홈런을 기념한 대형 야구공도 있었다. 시선이 멈춰서는 그 곳에서, 줄곧 아이들이 섰고 부모들이 부지런히 폰카를 움직여 사진을 찍었다. 자신의 벽화가 있는 이곳 라팍에, 이제는 상대 팀의 감독으로 서게 된 이승엽 감독의 심정도 복잡다단하겠다 싶었다. 기사를 찾아봤더니 그는 아니나 다를까 "지금 나는 두산이 상대하는 프로야구 9개 구단을 같은 시각으로 봐야 하지만, 아무래도 현역 시절을 보낸 삼성과 대구에서 경기할 때는 특별한 감정을 느낄 것 같다"(연합뉴스 '벽화 새긴 라이온즈파크에서…이승엽 두산 감독, 삼성과 첫 대결' 2023.4.25)는 말을 남긴 바 있었다. 그러나 지난 4월 25~27일, 라팍에서 3연전을 치르기 전 그의 말은 뉘앙스가 달라졌다. "처음엔 그 벽화를 안 봤는데, 주위에서 얘기해서 한 번 보게 됐다. (중략) 그래도 큰 감회는 없었다. 내 스마트폰에 저장이 된 사진으로 이미 많이 봐서 그런 것 같다."(중앙일보 '대구 찾은 이승엽 "난 이제 두산의 일원…삼성팬들 이해해주실 것"' 2023.4.25)



이 감독의 말을 알 것도 같은 것이, 야구팬들 대부분이 그렇겠지만 일단 경기가 시작되면 경기 외에 모든 것은 은 시야 밖으로 사라진다. 야구는 철저히 '최강야구'의 캐치 프레이즈인 'Win or Nothing'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놈의 승리에의 집착 때문에 야구를 보는 나는 더러 멍청해진다고, 나는 자주 생각한다. 안타를 치기만 하면, 혹은 삼진을 잡기만 하면 그가 가졌던 모든 흠결이 싸그리 사라지고 그는 지상 최고의 '내 선수'가 되는 경험을, 야구를 보며 거푸 경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국에서 유일하다는 팔각 구장의 한 귀퉁이에 앉아, 이 생각 저 생각을 돌렸다. 확실히, 혼자 찾은 야구장에서는 생각이 많아졌다. 생각을 비집고 들어오는 타인의 존재가 없어서인가 보았다. 그 때, 갑자기 푸른피의 구장에서 웬 뻘건피 몇 방울이 나에게 들이닥쳤다. 정신 차리고 보니 옆에 앉은 어린이가 먹던 '소떡소떡'에 묻은 케첩이었다. 그 아이가 꼬치에 꿰인 소세지인지 가래떡인지를 입으로 발라내다가 타다닥, 소세지인지 가래떡인지가 넝쿨째(?) 뛰쳐나오며 나를 습격한 거였다. 옅은 청바지에 묻은 케찹 핏방울을 보고 있자니, 짜증 게이지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나에게 야구장은 내게는 좀 먼 인간 존재인 어린이 친구들을 만나는 거의 유일무이한 장소다. (내게는 자녀도 없고 조카도 없으며 아주 가끔 보는 친구들의 자녀들이 있을 뿐이다.) 모든 이들이 가진 날것의 감정이 다 뛰쳐나오는 곳이 야구장이지만, 어린이들이 보여주는 감정 표현은 더욱 날 것인 측면이 있어다. 내가 응원할 때 노골적으로(?) 귀를 틀어막는 상대팀 팬 어린이라든지, 원정 응원석에 앉아서 우리 팀 공격 이닝 때 '삼진'을 대놓고 부르짖는 어린이라든지. 그들과 다툴 만한(?) 일들은 다종다양하게 많았다. 그 때마다 나는 '맛대맛'으로, 나도 거세게 귀를 틀어막는다든지,  '안타'를 더욱 소리높여 부른다든지 하는 식으로 되받아쳤다.


어린이들과 행복하게 공존하는 데는 다소간 실패한 것과는 별개로, 나는 '~린이'들이 대접받는 공간인 야구장이 좋았다. '노 키즈 존'이 '조용하게 지낼 권리' 마냥 취급되는 현실에서, 몇 안 되는 '예스 키즈 존'이 야구장이기 때문이다. 실례로 야구팀들은 어린이를 위한 행사(어린이 회원 모집, 어린이날 이벤트, 시구 행사) 등을 별도로 운영하고, 선수들도 경기 준비에 여념이 없어도 어린이팬들에게는 꼭꼭 사인을 해주려고 노력한다. 그런 기억을 가진 어린이들이야말로, 구단의 가장 오랜 팬으로 성장하리라는 계산도 작용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마케팅적인 요소를 차치하고서라도 한국 사회에서 어린이가 어린이라는 이유로 환대 받는 곳이 얼마나 드무냔 말이다.


실제 우리 사회에서 '~린이'라는 말은, '특정 분야에 미숙한 사람'을 나타내는 용어로 어느새 굳어졌다. 그러나 야구장에서 '~린이'는 말 그대로 '~팀을 좋아하는 어린이'라는 뜻으로 혐오 표현이 아니다. 전국의 구장에서 엔린이, 엘린이, 두린이 등을 보며 나는 부럽다는 감정이 절로 들었는데, 어려서부터 야구를 알았다면 인생이 더욱 풍성했으리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좌절과 절망도 함께였겠지만, 다채로운 감정을 겪는 것이야말로 인생의 큰 자양분이 된다는 것에 한 치의 의심도 없다.)


그러나 그 케첩방울 앞에서, 눈을 부라리던 나는 정확히 '어린이'라는 이유로 그 아이가 미웠다. '어린이 특유의' 미숙함으로, 나에게 소떡소떡을 뿜는 민폐를 저질렀다는 생각이 순간 스쳤기 때문이다. 그 순간 아이 옆에 있던 아버지가 내게 물티슈를 건네며 연신 사과를 했다. 급히 바지에 묻은 케첩을 닦는데, 그 아이의 유니폼 소매에도 케첩방울이 선연했다. "저기, 여기도 닦으셔야 할 거 같은데…" 그 아버님이 아이의 소매를 물티슈로 훔쳤다. 아이의 얼굴이 수굿해졌다.


생각해보면 어른도 꼬치를 입으로 발라내다 보면, 소떡소떡쯤은 옆 좌석에 튀길 수 있다. 그러나 나는 그걸 오랜 편견으로 '어린이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고, '어린이'라서 더욱 화가 났다. 내게도 어린이는 짜증내기 만만한 존재였거나, 혹은 그 자체로 짜증 유발자였을까. 이게 '노 키즈 존'을 부르짖는 배제의 논리와 뭐가 다른가. 그 짧은 새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가만 보니 아이의 유니폼은 NC의 것이었고, 그 아버님의 선글라스는 전에 다른 구장에서도 본 일이 있는 것이었다. NC와 케첩으로 하나된 아이와 나는, 경기 내내 우렁차게 응원가를 부르고 '안타'를 외쳤다.


이날은 '딸기' 이재학이 부상 복귀 후 치르는 두 번째 경기였다. 삼성 선발투수는 '푸른 피의 에이스' 원태인. 경기장 앞에 대형 걸개그림일 걸려 있을 만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삼성이 믿고 의지하는 선수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도 WBC에서 간혹 그의 활약상을 봤던 터라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2회 말이 끝나자 느닷없이 굵어진 빗줄기로 경기가 중단됐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싶은 빗줄기였다. 나는 익숙한 듯 우비를 꺼내고 우산도 챙겨썼다. 좌석 밑에 아무렇게나 내팽개쳤던 백팩도 비에 젖을까 끌어 안았다. 그라운드 키퍼들이 다급히 방수포를 드리웠다. 빗물이 고인 관중석 곳곳에도 직원들이 날아와 빗물을 쓸어 보냈다. 관중들은 비를 피하기 위해 야구장 처마 밑에 들어가거나 화장실에 가서 밀린 요의를 해결하거나 하고 있었다. 나는 그 모든 걸 하는 동시에 편의점에서 파워에이드 한 병을 사와 장기전에 대비하기로 했다. 다시 속개되기만 한다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마음가짐이 됐다.


그렇게 한 시간쯤 흘렀을까, 빗방울이 잦아들었다. 전광판에 '그라운드 정비 후 19시 20분에 시작될 예정'이라는 안내 문구가 떴다. 키퍼들이 다시금 뛰쳐나와 방수포 위에 고인 빗물들을 퍼내기 시작했다. 더그아웃에서 선수들이 나와, 비 그친 운동장의 강아지들처럼(왠지 그래 보였다) 좌우로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경기장 처마 밑에 있던 관중들이 주섬주섬 자리로 복귀했다. 아예 이탈한 관중들은 많지 않아 보였다. 야구 한 경기를 위해, 각 팀의 선수들과 코칭 스태프들 뿐 아니라 얼마나 많은 이의 노고가 소요되는지를 목도하는 자리였다. 나의 노고도 포함하여.


다시 시작된 경기에서, 이재학은 돌아왔지만 원태인은 돌아오지 못했다. 상대 투수가 이재익으로 바뀌자, 갑자기 NC의 타선이 폭발했다. 하긴 88분이나 지연된 경기에서, 다시 마운드에 오르기란 투수들 모두에게 부담이었을테다. (원태인은 비슷한 상황에서 큰 부상을 당한 기억 때문에 조기 교체했다고 삼성의 박진만 감독이 다음날 이유를 밝힌 바 있다.) 딱 그 지점에서, 이재학의 피칭도 걱정이 됐다. 복귀 후 첫 경기였던 지난달 24일 SSG전에서 4이닝 7실점 하는 모습을 봤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그러나 이날 '딸기'의 피칭엔 뚝심이 있었고, 5이닝 6안타 1실점이라는 준수한 기록을 거뒀다.


오후 5시에 시작된 경기건만, 도중의 우천 지연으로 6시 30분에 시작하는 평일 경기 마냥 경기는 늘어지고 있었다. 조바심이 났다. 동대구역에서 10시 17분에 출발하는 행신역행 막차를 예매해놨는데, 라팍에서 동대구역까지 가는 30분의 시간을 감안할 때 경기를 다 보고 가기란 어림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기껏 대구까지 와서 경기 도중 뛰쳐나가는 것은 정말이지 피하고 싶은 일이었다. 특히나 클로저의 팬인 나로서는. 고민 끝 표를 취소하고 서울역으로 가는 막차로 다시 구매했다. 서울역에서 내려, 고양 가는 버스 막차에 올라탈 심산이었다. 서울역 가는 막차도 동대구역에서 10시 52분 출발로 빠듯했지만, 고양 가는 버스 막차도 시간이 빡빡했다. '버스를 놓치면… 택시를?' 싶으면서 할증 요금을 생각하자 머리가 아득해져 오는데, 핸드폰의 배터리가 실시간으로 닳고 있었다. 우천 지연된 그 1시간 20여분 간 핸드폰만 꼬박 붙잡고 있던 탓이었다. 집에서 경기를 보고 있던 Y에게 얘기했더니, 여차하면 서울에 있는 자기 집에서 자라고 했다. 그 말에 의지해 폰을 덮었다.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정신을 차려보니 7회 초, NC의 선두타자 김성욱이 왼쪽 담장을 넘는 솔로포를 날려 3-1이 됐고 이어진 김형준의 적시타로 4-1, 점수 차가 벌어졌다. 3점 차 세이브 상황이라 '그'가 나오겠다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8회, 1루쪽 파울라인 바깥, 즉 내 눈 바로 앞에 '그'가 나타나 몸을 풀었다. '그래, 여기까지 와서 그의 등판을 안 보고 가는 건 말이 안 되지'. 급히 차편을 바꾼 나의 센스를 칭찬하며, 그가 몸 푸는 양을 바라봤다. 계속 보다 보니 등판 전에 몸 푸는데 나름의 순서가 있음을 알겠는데, 처음엔 가볍게 던지기, 다음엔 까치발을 들고 좌우 밸런스를 체크해가며 던지기, 마지막으론 실전 피칭처럼 던지기로 이어졌다. 공은 보통 훈련지원요원들이 포수 마스크를 쓰고 받아줄 때가 많았는데, 이날은 대타 포수인 박대온이 받았다. 등판을 앞둔 투수의 곁에는 '가드'라고 해서 그쪽으로 날아오는 타구를 잡아주는 선수가 있는데, 보통은 직전 경기 선발투수가 담당한다. 이날은 훈련지원요원이 담당하고 있었다. 경기와 함께, 경기와는 별개로 이뤄지는 경기장의 요모조모를 관찰하는 데 부쩍 재미가 들렸다.


9회 초, NC 박건우가 솔로포를 날리며 스코어는 5-1로 벌어졌다. 9회 말, 세이브 상황은 아니지만 그가 출격했다. 군더더기 없는 투구로, 실점 없이 경기를 마무리했다. 원정 경기지만 NC의 응원단인 '랠리 다이노스'가 출동했기에, NC의 승전곡인 '마산 스트리트'가 라팍에 울려퍼졌다. '컴 온 컴 온 마산 스트리트여~'를 부르며 부랴부랴 짐을 쌌다. 핸드폰 시계가 10시 2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나의 열차는 동대구에서 10시 52분에 출발하는데. 겨우 30분 남짓한 시간이 주어져 있었다.


변수를 최대한 통제하기 위해, 길이 막히거나 할지도 모르는 버스 대신 지하철을 선택했다. 환승 시 시간을 최대한 절약하기 위해 어느 출구에서 내려야 가장 환승이 빠른지를 급히 검색했다. 그 와중에 핸드폰 배터리는 10% 남짓 남아 있었다. 동대구역에 내리니 시간은 10시 45분. 열차 출발까지 7분이 남아 있었다. 지하철 출구로부터 사력을 다해 뛰었다(이 때 나에게 사력이라는 것이 남아 있는지도 의문이었지만). NC 유니폼을 입은 세 사람의 가족도 나와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며 뛰었다. 소싯적 고등학교 다닐 때 지각을 피해보겠다고 들입다 뛴 걸 제외하고 이렇게 열심히 뛰어보는 게 실로 오랜만이었다. 에스컬레이터와 여러 계단을 건너 열차 앞에 섰더니 10시 50분이었다. 남은 파워에이드를 들이키며, 열차에 올랐다.


이날 나는 서울역에 도착해 처음으로 '막차'라는 얘길 들었고, 서울역도 막차 시간이 지나면 역사 자체의 셔터를 내린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집으로 가는 광역버스는 이미 끊긴 상황이었고, 대신 고양으로 가는 모든 정거장에서 서는 버스는 남아 그걸 타고 집에 갔다. 다음날 현생을 살기 위해서는, 서울 Y집에서 자는 것보다는 집으로 복귀하는 게 필수였기 때문에 좀 힘들어도 그걸 택했다. 덜컹거리며 집에 도착했더니, 시간은 오전 2시. 기면증이 올만치 무지막지한 졸음이 쏟아졌다. 그 와중에도 뒤늦게 몰려온 허기를 해결하기 위해 라면을 하나 끓였다. 야구장에서는 늘 배고프지 않다. 막이 내려야 배고픔은 밀려온다.


부른 배를 안고 누워, 잠에 빠져들었다. 늪처럼 깊디 깊은 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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