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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벼슬기 Dec 03. 2023

야구장에서 열린 여고 동창회

야구라는 기쁨과 고통 19


'벼슬기작가님 난 오땅이야 기억하니'


브런치에 야구 이야기를 연재한 지 5회차쯤 되던 지난 6월, 한 통의 '페메'(페이스북 메시지)를 받았다. 그의 본명은 오땅이 아니지만 오땅 만큼 다소간 특이한 이름이었고, 나는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었다. 그는 나의 여고 동창이었다. 쾌활한 성격으로 이른바 '무리'를 가로질러 누구하고나 격의없이 지내던 애였다. 고교 졸업 이후 내가 고향을 떠나오면서는 도통 만나지 못했지만, SNS로나마 한 번씩 서로의 생일을 축하해주는 사이이기도 했다. 그 드문드문하던 연락을 감안해서도, 그에게서 연락이 온 건 10년 만의 일이었다. 반가운 마음에 '기억하지!!!!! 오랜만이야!!'라고 느낌표를 한가득 넣어 답장을 보냈다.


직접 대면하지 못한 세월을 감안하면, 16년 세월을 건너 날라온 오땅은 불현듯 내게 '야구' 얘길 꺼냈다. 그 즈음, 브런치에는 오직 내 계정 하나만을 구독하면서 꼬박꼬박 '라이킷'을 누르는 유령 계정이 있었는데 알고 보니 그게 오땅이었다. 그는 '엔씨사랑이 나만큼인거같아서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라며 '혹시 마산에 야구보러오고싶은데 같이갈친구필요하면 연락해 ㅎㅎ'라고 말했다. 오땅은 여전히 그 동네, 우리들의 여고가 있는 창원에 살고 있었다. 이미 지난 5월 엔팍을 한 번 찾은 나는 여름에, 또 한 번 가겠다고 했다.


대화의 말미에 그가 덧붙인 장문의 메시지는 이랬다. '종교권유x, 결혼식x, 돌잔치x, 장례식x, 카드만들기x, 돈빌리기x, 옥장판x, 다단계x, 보험x, 보증x, 건강식품x, 정수기x, 온리 야구같이보자구....ㅎㅎㅎㅎ' 세월을 건너 뜬금없이 팝업된 옛 인연이 으레 요구함직한, 불순한 것들이 거기 다 적혀 있었다. 다행히 나는 어느 하나 거기에 속하지 않았고, 야구 얘기에 신나하는 오땅 또한 그 중 하나일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그날 대화를 신기해하며, 1년에 두 세번은 만나는 또다른 고교 동창들인 레페와 류샤가 있는 단톡방에 전했다. 다들 '미용하던 친구' 오땅을 기억했고, 나처럼 그의 호탕했던 웃음 소리를 어렴풋하게 떠올렸다. 불현듯, 한번쯤 다같이 엔팍에서 '리유니온'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함께 보자고 애들에게 제안했다. 창원 사는 레페는 나 따라 지난 5월 엔팍을 찾았다가 야구에 눈 뜬 바 있고, 류샤는 야구장 경험이 전무했을지언정 15년 만일 만남을 신기해했다. 모두 찬성이었다.


내가 올리는 페이스북 브런치글 공유 링크에 꼬박꼬박 '좋아요'를 누르는 이 중에는 '까사장'도 있었다. 까사장 또한 나의 여고 동창으로, 창원에서 네일샵을 운영하고 있다는 사실은 레페에게 전해들어 익히 알고 있었다. 까사장이 간혹 페이스북에 올리는 사진 가운데는 엔팍에서 찍은 인증샷 뿐 아니라 광주 기아 챔피언스필드까지 가서 남의 경기(롯데 vs 기아)를 직관한 흔적까지 있었다. 까사장도 나만큼 야구에 진심이구나… 오땅이 나한테 그랬던 것처럼, 용기 내어 까사장에게 카톡을 보냈다. '혹시 시간되믄 마산에 경기 보러 갈래?' 그렇게 졸업한 지 15년 만에 급 '창원중앙여고 야구동창회'가 결성이 됐다. 자영업자인 까사장, 주말만 쉬는 회사원인 류샤의 스케줄을 고려해 9월 9일 토요일로 날짜는 낙점이 됐다.


나는 야구동창회 전날인 8일에, 미리 마산에 내려갔다. 실은 올해만 세 번째 엔팍행이었다. 지난 8월 4일, 전날 있었던 부산 사직에서의 롯데전 이후 다음 날 창원 홈경기가 펼쳐지자 선수단을 따라 나도 이동했기 때문이다. 그 때는 Y와 함께였다. 올해는 실로 다양한 사람들과 야구장에 가는구나 싶었다. 레페와 먼저 만나, 8일에 열린 롯데와의 저녁 경기를 봤다. 어디 내놔도 자랑스러운 쾌적한 엔팍의 1루 더그아웃 뒤 110블록 자리에서, 레페와 목청이 찢어져라 응원을 했다. 이번 엔팍행을 계획하며 꿈꾼 나의 버킷 가운데는, 외야의 불펜 보기가 있었으므로 8회부터는 외야로 이동해서 불펜 투수들이 몸 푸는 양을 살펴 봤다. 야구장의 웬만한 시야에는 다 그물망이 있는데, 외야 불펜에는 그물망이 없어 잠자리 눈을 하지 않고도 편히 선수들의 피칭을 구경할 수 있었다. 'NC의 필승조' 이용찬·김영규가 서로 마주 보며(이용찬은 우완, 김영규는 좌완이라 가능한 시나리오다) 연습 피칭을 하고 있었다. 일주일 내내 모기업인 NC소프트에 출시한 신규 게임 '퍼즈업 아미토이'를 홍보하는 병아리색 유니폼을 입고. 그래도 가을이라고 부는 실낱같은 산들바람에 몸을 맡기며, 공룡만한 병아리들의 피칭을 구경했다. 피칭하던 이용찬이 급히 뛰쳐나가, 8회에 이닝 도중 등판했고 '4-3' 한 점 차 승리를 지켜냈다. 

퍼즈업 열기가 한창이었던 9월의 엔팍.

다음 날인 9일이, 명실상부한 야구동창회 날이었다. 이날은 롯데와의 더블헤더 경기가 예정돼 있었는데, 모두 모여 함께 보기로 한 경기는 2차전이었다. 마산 어시장 어귀의 호텔에서 숙박한 나와 레페는, 땡볕에 1차전도 보겠답시고 이른 아침부터 호텔을 나섰다. 생애 첫 '오픈 프랙티스'(경기 3시간 전 부터 입장해 선수들의 훈련 모습을 볼 수 있는 프로그램) 티켓을 끊어 오전 11시부터 입장하기 위해서였다. 10시 30분에 도착했는데도, 입장을 기다리는 줄이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뙤약볕에 실시간으로 정수리가 익어갔다. 우리 뒤에 줄을 선 여중생(으로 추정되는)들이 "열자마자 뛰어가야 해"를 자주 되뇌이길래, 어딜 뛰어가냐고 물어봤더니 "더그아웃이요"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더그아웃 근처에서, 선수들이 싸인을 해준다는 거였다. 정각 11시에 맞춰 입장이 시작됐지만, 나는 그들처럼 뛰진 못했다. 30분 기다리는 동안 이미 체력이 바닥났기 때문이다. 그라운드에는 전날 밤 10시까지 뛰고도 불과 13시간 만에 다시 나와서 몸을 푸는 선수들이 보였다. 타격 연습을 하고, 캐치볼을 하는데 그들의 표정도 피로 탓인지 더위 탓인지 지쳐 보였다. 나는 10여 분 만에 사인 받기를 포기하고, 레페에게 점심을 먹으러 가자고 말했다. 이건 팬심을 넘어 돈 받고도 못할 짓이라고, (물론 내 돈을 쓰고서도 하는 덕질이라 더욱 강력한 것이겠지만) 밥을 먹으러 가며 나는 레페에게 두고두고 말했다. 그날의 더블헤더 1차전은 NC의 올해 첫 매진 경기였으며, 우리의 자랑스러운 캡틴 손아섭이 KBO리그 역사상 첫 8년 연속 150안타 기록을 세운 경기였다. 뙤약볕 한가운데서 "다이노스 오빠!"를 목청껏 외쳤다.


아이들과 모두 만나기로 한 시간은 오후 3시였다. 5시에 열리는 더블헤더 2차전에 입장하기 두 시간 전에 입도 풀 겸, 근황도 나눌 겸 NC파크에 있는 스타벅스에서 만나기로 했다. 오랜만에 본가인 창원에 들른 서울 사는 류샤, 가게 문을 일찍 닫고 나온 까사장, 알바 마치고 부랴부랴 온 오땅, 그리고 나와 레페가 만났다. 레페와 류샤를 제외하곤 16년 만이었는데도, 그들의 얼굴을 보자마자 2004~2006년 어드메의 창원중앙여고 교실로 소환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 때완 달리 화장기가 짙어진 친구도, 그때와 비슷하게 화장기 없이 맨송맨송한 친구도 있었지만 그 샷 그대로 책걸상 줄지어 서 있던 고교 교실을 소환할 수 있을 정도로 익숙한 장면이었다. "어, 안녕!" 요즘 말로는 ENFP, 당시로는 '명랑하다'고 표현했던 성격을 가진 오땅이 포문을 열었다. 우리는 응원 열기로 뜨거운 엔팍 스벅의 한 귀퉁이에서, 우리들만의 이야기로 뜨거웠다.


음료를 하나씩 앞에 놓고, 각자 어떻게 사는지를 쭉 브리핑했다. 네일샵을 운영하는 까사장, 프리랜서 기자로 사는 나, 서울에서 언론사 PD 겸 기자인 류샤, 전직 보육교사인 레페, 바이럴 마케팅 회사에 다니다가 잉글리시쉽독이라는 대형견을 만나 인생에 터닝 로인트가 온 오땅. 야구가 나에게는 삶에 느닷없이 날아든 같은 것이었다면 오땅과 까사장은 경남민에게 롯데가 전부였던, '얼라' 시절부터 '아주라'에 익숙한 이들이었다. NC 투수 임정호를 좋아해서, 2015년부터 시범경기까지 다 따라 다녔다는 오땅과 선수들 응원가를 네일샵에 늘 틀어놓고 바로 전날이었던 박건우 생일 파티도 가게 식구들과 자체적으로 했다는 까사장의 이야기를, 뉴비인 나와 레페, 류샤는 넋놓고 들었다. 고교 졸업 후 서울로 유학 가 줄곧 살았던 나와 달리, 고향에서 계속 발 붙이고 살았던 친구들은 학교 선생님들과 동창들 소식 등 모르는 게 없었다. 그 시절 MBTI 상 'I'에 가깝던 친구들도 십수년 세월을 건너 어느덧 사회적으로 단련된 'E'같은 모습들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타고난 기질이 바뀐 것이 아니라, 밥벌이에서 축적된 생활근력 때문이라는 것을 나는 알 수 있었다. 공교롭게도 우리 중에 결혼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5시부터 우리가 함께 관람하기로 한 롯데와의 더블헤더 2차전이 시작되기에, 시간에 맞춰 출입구로 향했다. 1차전을 보고 나오는 사람들에 2차전 입장을 기다리는 사람들로 출입구는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5명이 찢어져서 여러 출입구를 수소문한 결과 외야쪽이 가장 사람이 적다는 사실을 발견해 그쪽으로 쪼로록 줄지어 섰고, 20여분 기다린 끝에 곧 입장했다.


우리가 앉은 자리는 109블록 28열이었다. 내가 대표로 예매를 맡았었는데, 1루쪽 홈 응원석은 사수했지만 열띤 예매 열기로 인해 앞자리까지는 사수하지 못했다. 우리가 앉은 쪽은 스피커 바로 밑이라 귀가 왱왱 울릴 만치 앰프를 타고 흐르는 응원가 소리가 컸다. 게다가 좌석의 한중간이라 옆줄에 앉은 사람들을 다 밀치고 화장실 한 번 가기가 진땀 나는, 진격의 자리였다. 저녁 무렵인데도 한낮의 열기가 남은 가운데, 준비성 철저한 까사장이 챙겨온 쿨링패드를 다들 목 뒤에 하나씩 붙였다. 국소적이지만, 없는 것 보단 훨 나은 냉감이 목부터 찌르르 흘렀다.


1차전에서 우리가 수다를 떠는 새 NC는 5-2로 롯데에 패배했다. 연달아 질 수는 없었다. 직관을 다닌 이래 가장 많은 쪽수로(물론 회사를 다니던 때 같은 부서 사람들과 단관을 한 경험이 있긴 하나 당시에는 야알못이었으니 빼도록 한다) 야구장을 찾은 나는 그 자체로 신이 나서 더욱 고함을 질렀다. 원정팬으로서 항상 홈팬들에 치인 한줌단의 일원이었던 내가 엔팍에, 그것도 고등학교 동창들을 대거 대동하고 왔을 때는 '똥개도 자기 집 앞에서는 반은 먹고 들어간다'는 말을 실감할 수 밖에 없었다. 평소에는 하지도 않는 복식호흡으로, 우렁차게 환호를 내질렀다.


클리닝 타임쯤 해서, 쿨다운을 위해 나와 까사장이 먹을 걸 사들고 왔다. 닭강정과 피자 같은 엔팍 대표 먹거리였다. 차를 가지고 온 오땅을 제외한 나머지는 맥주도 마셨다. 얼굴이 점점 더 불콰해지는 한편, 머리를 때리는 응원가는 더 커져만 갔다. 흥분이 가속화됐다. 양팀의 선발 투수(최성영, 한현희)가 모두 조기 강판한 가운데, 불펜들 물량 공세가 가열차게 진행 중이었다. 우리는 각자가 좋아하는 선수의 대리인이라도 된 것 마냥 굴었다. 선수가 잘하면, 그 선수를 좋아하는 친구에게 환호를 보내고 못하면 더욱 면박을 주는 식이었다. 주원과 건우를 좋아하는 까사장이 주로 표적이 되었다. 주원이가 헛스윙을 돌리면 "아 쫌! 느그 주원이 와 그러노?"하며 까사장에게 면박을 주고, 그랬던 주원이가 안타를 치면 까사장이 기세등등해 "역시 내 새끼!!!!!!!!!!!!" 하는 식이었다. (진지하게 주원이 이름의 커피차 부를 생각을 했다는 까사장은 자기가 주원이를 낳은 것도 아닌데 '주원맘'을 거듭 자처했다.)


회를 거듭할 수록, 가장 쫄리는 건 클로저의 팬인 나였다. 지난 4월 롯데전 블론의 기억, 이 너무 강렬했기 때문이다. (시즌 초 평균자책점 '0'이던 그가 첫 실점, 첫 블론을 한 게 롯데전이었고 이후 그는 마음을 다잡는다는 뜻으로 머리를 밀었다.) 6-5, 한 점 차 리드를 이어가던 9회초 그가 등판했다. 당시 나는 올타임 스탠딩 응원을 하다 왼쪽에 앉은 여고생(혹은 여중생)으로 추정되는 이들의 기세에 밀려 8회서부턴 앉아 있던 상태였다. 그 여고생들의 응원은 다소 폭룡적인데가 있었는데, 어찌나 팔을 뻗는 기세가 가열찬 지 그 동작에 내가 몇 번 맞았을 정도였다. (특히 '쌔리라'처럼 외야를 가리키는 동작 등을 할 때) 그가 등판하자 여고생들이 "아씨, 이용찬!"하면서 풀썩 주저 앉았다. 이어서 필설로 담기 힘든 욕설을 이어가는데, 그와 동시에 조용히 내가 일어섰다. 그의 유니폼을 들고. 그들은 흘긋 나를 보더니 귓속말(그러나 다 들리는)을 이어갔다. "야 옆에 이용찬(유니폼)" 그 뒤로 그들은 '입꾹닫' 했다. 참말로 착한 학생들이라고, 속으로 생각하며 유유히 그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소리도 낼 수 조차 없는, 떨리는 마음으로 그의 피칭을 지켜봤다. 본디 나는 밤 9시 40분이 막차인, 서울행 KTX표를 끊어놨는데 도무지 그걸 타기는 어려운 시간이었다. 나의 망설임을 알아본 레페가 말했다. "슬기야, 걍 우리 집에서 자고 내일 가." 클로저 팬의 번민은 매번 그렇게 시작되지만, 결국엔 야구에 지고 만다. 예매 취소 버튼을 눌렀다. 오늘도 NC의 승리를 바라는 마음으로, 야구에 졌다.


퍼즈업의 샛노란 유니폼을 입어, 거대한 대왕 병아리 같은(병아리라기 보다는 노란색 공룡이 있다면 그에 가까운) 그가 선두타자 윤동희를 상대로 포크볼로 차근차근 카운트를 잡더니, 직구로 삼진을 잡았다. 오? 뭔가 '되는 경기'인가. NC팬들이 응원단장의 선창 없이도 먼저 나서서 "이용찬!"을 외쳤다. 나는 이어 안권수 타석때부터는 줄곧 서서 그의 모습을 핸드폰에 담느라 정신이 없었다. 오늘 세이브를 거두면 통산 150세이브라는 위업을 달성하는 날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마운드에서 꽤 먼 자리라, 영상에 노이즈가 엄청난데도 아랑곳 않고 찍었다. 그간의 시행착오를 통해, 내 눈으로 담는 순간이라는 것이 얼마나 찰나에 불과하며 쉽사리 잊히는 것인지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방송사 중계나 엔튜브가 아닌, 내 시점 그대로의 화면을 담고 싶었다.


안권수 땅볼 아웃, 이어 안치홍 타석. 볼, 볼, 스트라이크, 파울, 파울. 두 번째 파울은 높은 궤적을 그리며 1루관중석 쪽으로 떨어졌는데, 제법 잘 맞은 타구였다. 안 돼, 다음 타석은 전준우야. 오늘 홈런도 쳤다고. 롯데 홈런 트라우마가 있는 나는 맘 속으로 '제발'을 외쳤다. 그리고 6구. 148km/h짜리 직구가 휘몰아치며 포수 미트 속으로 쏙 들어갔다. 루킹 삼진이었다. 그가 불끈 주먹을 쥐었다. 잘 없는 포효였다. 그리고 관중석에서는 늘 포효하는 내가 어김없이 또 환호성을 내질렀다. KBO 역대 10번째 통산 150세이브를 거둔 순간이었다.


엔팍에서 승리 시 타자 1명 투수 1명 수훈 선수 인터뷰를 하기에, 나와 까사장은 그걸 보러 응원단상 앞으로 우르르 몰려갔다. 타자는 이날 적시타를 때렸던 서호철, 투수는 단연 이용찬이었다. 인터뷰 후에는 팬들과 기념 촬영이 있는데, 이용찬 촬영 때는 사람 숲을 헤치고 또 헤치고 나아가 필사적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경기장 복도에선 류샤와 레페, 오땅이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오땅의 차를 타러 주차장으로 유유히 향했다. 오너 드라이버인 오땅 언니가, 우리를 창원 곳곳에 내려줄 터였다. 차에 탄 동시에, 저마다 오늘의 소감을 쏟아냈다. 홈 응원석에 난입해 소리를 꽥꽥 지르는 매너 제로인 원정팬하며, 선수들 출퇴근길에 사인을 받았던 기억 등등에 대한 무용담이 이어졌다. 엔팍 앞 사거리에서 신호 대기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한 무리의 소녀들이 우리를 향해 환호성을 질렀다. "뭐지?" 알고 보니 우리 차선 바로 옆에 대기하고 선 차가 선수들의 차였고, 그걸 보고 팬들이 소리를 지른 모양이었다. 역시 저런 패기는 저 나이 때만 오는 것이며, 우리는 아무리 소리를 지를래야 저 정도까지는 목청이 안 나온다고, 이 근처 어디에 선수들이 많이 산다던데 아마 거기로 가는 차인가보다고 여러 얘기들을 의식의 흐름에 따라 주워 섬겼다. 우리들의 소녓적 추억이 서린 정우상가에서 류샤와 까사장이, 레페의 집인 법원 근처에서 나와 레페가 내렸다. 고생한 오땅에게 여러번 감사 인사를 하고, 다음에 만날 것을 기약했다. 서울에서 NC가 가을야구를 하게 된다면 한 번 꼭 오라고, 우리집을 베이스캠프로 제공하겠노라고.


이후로 우리는 그 다섯명이 들어간 톡방에서 잊을만 하면 한 번씩 야구 얘기를 한다. 특히 NC 팬 계정을 운영하는 나를 위해 까사장과 오땅은 엔팍에 가는 틈틈이 나에게 영상을 제보해주었다. 이날 매진 경기를 방문했다, 이후 예매권 이벤트에 당첨돼 한 번 더 엔팍을 찾은 나는 우연히 엔팍에서 오땅과 다시 한 번 조우하기도 했다.(서로가 오는 지를 인지하지 못한 상태에서 맞닥뜨렸다.) 십수년 세월을 건너, 인연은 참으로 희한하게 흐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앳된 소녀시절을 지나, 저마다의 근력으로 땅에 발 디디고 살아가는 친구들의 얼굴에서는 나무의 나이테 같은 여정이 느껴지는데, 그게 또 멋지고 대단해 보였다.


이래서들 야구 응원팀은 출생과 함께 정해진다고 하는 걸까. 나처럼 뒤늦게 야구에 입문한 이도, 고향팀을 좋아함으로써 뿌리를 저절로 상기하게 된다. 그렇게 만날 것이었던 사람들과, 다시 만나게 해준 야구가 고맙다는 생각이 적이 들었다.


NC의 야구는 끝났지만, 내년에도 엔팍에서만 볼 수 있는 NC를 보러 또 엔팍에 갈 것이다. 당연히, 야구 동창회도 자연스레 또 열릴 것이다. 그걸 생각하면, 야구 없는 이 겨울이 그렇게 암울하지만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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