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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벼슬기 Nov 14. 2023

남의 우승 관찰기

한국시리즈 5차전 LG vs KT 영화관 관람

※삐딱선 주의


11월 5일부로 나의 야구는 끝났다. 그날 NC의 야구가 끝났기 때문이다. 팬들에겐 축제였던 한국시리즈를, 야구를 모르는 사람처럼 멀리서 지켜보았다. 중계도 보지 않았고, 승패도 쓸데없는 구글 알람 등으로 내 의지와 관계없이 알게 됐다. 첫 패배 이후 LG가 승승장구 하는 걸 쳐다보면서, KT에 분한 마음이 살짝 올라오는 것 빼곤 괜찮았다. "이럴려고 NC에 이겼냐?" (NC는 LG에 정규시즌 상대 전적이 9승 6패로 앞섰고, 모든 NC팬들은 'KT만 넘으면…' 하는 마음을 시종일관 가지고 있었다.) '근데 이렇게 못하면 정말 곤란하잖냐' 정도의 마음으로, 의지와 관계없이 흘러드는 한국시리즈 관련 정보를 애써 외면하며 지내고 있었다.


그러나 LG가 우승까지 단 1승을 남기게 된 5차전을 앞두고는, 그거는 한 번 봐야 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경기 자체는 궁금하지 않았다. 근데 29년만의 우승을 목전에 둔 LG팬들의 모습, 혹시나 LG가 우승한다면 그들은 어떤 모습일지가 좀 궁금했다. 연일 매진을 거듭하는 직관 티켓까지는 욕심나지 않았다 기온이 영하까지 내려가는 엄동설한의 한복판에, 사랑도 없이 그를 어떻게 지켜본단 말인가. 그러나 영화관 응원이라고 하는 것은 좀 궁금했다. 암전된 듯 어둡고 조용한 영화관에서들 도대체 응원을 어떻게 하는 것인지는, 나의 오랜 기자적 호기심으로 좀 궁금해졌다.


그래서 나는 한국시리즈 5차전이 열리는 11월 13일, 영화관 표를 예매했다. CGV 신촌아트레온이었다. 실제 직관처럼 유니폼이나 팀 춘잠 등을 입는다길래 전날 자기 전에 'NC 유니폼을 꼭 챙겨가야지' 하고 마음 먹었다. 그러나 다음 날, 나는 버스 정류장엘 가서야 유니폼을 챙기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NC의 경기였으면 그건 집에 다시 돌아가야 할 사유였지만, '뭐 안 챙기면 어때…' 싶었다. 남의 경기에 이러면 어떻고 저러면 어떻단 말인가. 그냥, 버스에 몸을 실었다.


영화관 응원을 위해서, 죽여야 하는 시간이 무려 6시간이었다. 낮 12시에 내가 서울서 봐야할 용무는 끝났기 때문이다. 고양에 가면 따뜻한 홈 스윗 홈과 더 따뜻한 내 고양이가 있는데, 굳이 남의 야구를 보겠다고 저자에서 헤매야 하나… 물론 글자 그대로 저자는 아닌, 어디 카페에 짱박혀 있을테지만. 만약 CGV에 당일 예매 취소가 가능했다면, 나는 아마 이쯤해서 취소하고 집에 갔을 것이다. 그러나, 예매취소는 전날 밤 12시까지가 데드라인이었다. 나는 사서 고생하는 나의 팔자를 한탄하며, 영화관 근처 스타벅스에 자리잡았다.


6시 30분이 임박해오며, 나는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맛있는 음식(짬뽕)을 먹고,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당도가 높은 음료(흑당버블밀크티)를 들고 CGV로 갔다. 입구에서부터 LG의 유광잠바 멤버들이 스멀스멀 나타났다. 맥주를 바리바리바리스타처럼 싸매고. 아하, 영화관에서도 맥주를 먹을 수 있구나. 나는 입구에서 비장한 마음으로 유료 보조 배터리만 하나 챙겼다. 핸드폰을 들여다 볼 일이 많을 것 같으니, 미리 챙겨야했다.


최대한 귀퉁이로 고른 내 자리에 찾아 들어갔다. 김성근, 김응용, 김인식 '3김'의 시구가 진행 중이었다. 나는 자리에 앉자마자 뭐가 잘못 됐음을 인지했다. 일단 영화관에서 열리는 생중계 응원 때는 영화 상영 때처럼 모든 조명을 끄는게 아니라 양 사이드의 조명을 켜둔다. 그 조명이 나처럼 난시가 있는 사람에게는 불번짐을 선사해서, 가뜩이나 화질이 좋지 않은 가운데(영화 볼 때의 그 화질을 상상하면 안 된다. 빔 프로젝터로 쏘는 듯한 영상이라고나 할까) 영상이 더욱 얼룩져 보였다. 아, 집관만 못하구나… (물론 나보다 앞자리에 앉거나 (나는 뒤에서 두번째 열에 앉았다), 난시가 없는 사람에게는 큰 화면이 주는 쾌감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적어도 나에게는 그랬다.)



그래 뭐, 남의 야구를 자세히 볼 필요는 없지 하며 메가커피에서 한 흑당버블밀크티를 쪽 빨아 올렸다. 달짝지근한 흑당이 나를 위무했다. 나의 양 사이드에 사람이 차곡차곡 채워졌다. 젊은 여성팬 두 명과 나보다는 나이가 많을 것 같은 중년의 남성팬. 다들 LG 유니폼과 유광점퍼를 입은 채였다. 영화관 전체로 봐도 LG 유니폼 입은 사람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주위가 어둑한 가운데긴 하지만, KT 유니폼을 입은 사람은 단 한 명도 못 봤다. 신촌도 서울이어서, 그런가 보았다. 집 근처에서 볼 걸 그랬어… 라는 생각이 스쳐갔다.


영화관 생중계 관람은, 그저 야구장을 실내로 옮겨온 형태라고 보면 된다. 수시로 화장실을 들락거리고, 맥주도 마시며, 핸드폰도 보면서, TV에서 응원가가 흘러 나오면 같이 따라도 부른다. 영화 관람 때 '쉿' 하는 분위기와는 전혀 다르다. 경기 초반부터 LG가 맹타를 휘두르며 선취점을 내자, 처음에는 응원에 쭈뼛쭈뼛하던 LG팬들도 목소리를 크게 내기 시작했다. 특히 타석에 '홈런 타자' 박동원이 등장했을 때는 기대가 고조되면서 응원가를 부르는 목소리도 더욱 커졌다. "시원하게~ (쏴!) 쏘아올려~ (쏴!) 무적LG 박동원~" 박동원은 홈런은 못 쳤지만, 고조된 응원가에 걸맞는 시원시원한 스윙을 선보였다. 신기한 것은 반주가 없는(화면으로만 미미하게 들리는) 영화관에서는 응원가의 키가 여자 키에 맞춰진다는 거였다. 왜냐면 객석을 메운 여자들의 수가 남자들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았기 때문에. 남자들은 여자 키에 맞춰 "시원하게~" 하느라 새된 목소리를 냈다.



반면, NC 상대로는 무적이었던 고영표가 3실점 하는 모습은 NC팬의 마음을 쑤셨다. 어떤 NC팬은 NC를 이긴 KT이기에 LG의 승리를 바랄까 싶지만, 적어도 나는 KT 편이었다. 둘 중에 하나를 고르자면. 나의 옛사랑은 박경수이고, 나는 서울시민이 아닌 경기도민이며, 불혹의 박경수가 은퇴 전 한 번 더 우승을 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기왕이면~' 수준의 얕은 바람이어서, 나는 그 영화관에서 가장 느긋하게 경기를 관람하는 사람이었다. 거푸 삼진을 먹는 박뱅을 보며 'ㅉㅉ' 하는 것 외에는 미동도 없이, 고요하게 화면을 바라봤다. 그런 나를 신기한 듯 좌우가 흘끔 댔다.


4회쯤 되니까 솔솔 졸음도 몰려왔다. 스타벅스에서 입구 근처에 앉는 바람에 추위에 시달리다가, 에어컨 온풍이 휘몰아치는 영화관에 오자 '삼한사온' 중 사온을 맞아 간만의 훈풍을 쐬는 덕장의 황태 마냥 몸이 녹았기 때문이다. 생중계 응원 때 영화관은 굉장히 공기가 후텁텁하다. 그 들큰한 훈풍에 거푸 맥주를 마신 이들의 트림이 공기 중에 섞이면서. 공기청정기를 갖다두면 고양이 화장실 앞에 둔 것 마냥 계속 빨간불일 것이라고… 나는 단언할 수 있다. '집에 갈까?' 하는 사이 박해민이 5회 안타를 때려내 사람들 고함이 터져나왔다. 고영표를 강판시키는 안타였다. 고개 숙인 차민이 아버지 모습이 졸린 눈에 들어왔다. 빠른 발로 야구하는 LG를 맞아 거푸 1루에 견제하던 모습이, 오늘 경기 참 쉽지 않겠다 했는데… 4이닝 5실점, 고퀄스치고는 실망스러울 수 밖에 없는 스코어였다.


내내 졸린 가운데 내가 눈을 부릅뜨고 쳐다본 것은, 오직 박경수의 타석이었다. 배트 스피드가 전만 못해, 수비가 중요한 경기 후반에 교체 멤버로 투입되는 일이 많았던 그는 오늘만큼은 스타팅 멤버였다. 4회 LG 선발 켈리를 맞아 거의 모든 구종의 공을 커트해내며, 박경수는 끈질기게 출루에의 의지를 불태웠다. 결국 10구 승부 끝 볼넷으로 출루하는 그를 보면서 '그래, 저게 베테랑이지' 했다. 2년 전, KT의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끌었던 그였다. 그리고 지금은 자신을 성장시켰던 팀을 상대로 배트를 휘두르는 그. 이런저런 감상에 젖어 있기에는 눈앞의 출루가 중한 그일테지만, 그 급박한 와중에 혼곤하게 졸린 내가 그 감상을 대행했다.


사실 고영표 강판 때부터, 승패는 기울어져 보였다. 끝날 때까지 끝나지 않는 게 야구라지만, KT의 타선은 도통 출구를 찾지 못해서 팬도 아닌 내가 답답할 지경이었다. 득점은 오로지, 상대의 폭투에서만 비롯됐다. LG의 더그아웃에 웃음이 넘실대기 시작했다. 5회말, 1루에 나가 있던 김현수가 주루사했다. 객석에서 '깔깔' 웃음이 터져나왔다. "으이그 현수야~" 경기가 타이트했다면 바로 욕을 박을 뻔한 상황이지만, 이곳 신촌의 CGV는 너그러움이 흘러 넘쳤다. 나는 Y에게 보내는 카톡에 이렇게 썼다. "이야, 곳간에서 인심나네~"


9회 초, 6:2로 승기를 잡은 LG에서 고우석이 마무리로 등판했다. 객석에서 탄식 비슷한 것이 터져나왔다. 한국시리즈 내내 실점이 많았던 그다. 그래도 4점 차고, 오늘 내내 침묵한 KT의 타선을 생각했을 때 이변은 없어 보였다. 0점 조정에 실패했는지 등장하자마자 볼3개를 꽂아넣던 고우석은 이후 스트라이크를 하나씩 잡아가며 평정을 되찾았다. 박경수 3루수 파울플라이 아웃, 조용호 삼진 아웃. 세 번째 타자 배정대가 나올 즈음에 사람들은 다들 핸드폰을 꺼내기 시작했다. 마지막 아웃카운트 화면을 찍기 위해서였다. 나도 켰다. 마지막 아웃카운트를 바라보는 그들을 찍기 위해서였다. 


고우석의 152km/h 직구를 받아친 배정대의 타구가 떼굴떼굴 굴러가더니 2루수 신민재가 그걸 잡아냈다. 그가 폴짝 뛰었다. 영화관에 있던 LG 팬들이 벌떡 일어났다. 나도 덩달아 일어났다. 절반은 괴성을, 절반은 '흑흑흑흑흑' 하는 숨죽인 울음 소리를 냈다. 꼿꼿하게 선 나는, 굉장히 'T스럽게' 그런 그들을 바라 보았다. 사실은 조금 어리둥절했다. 인간의 희로애락이란 이렇게나 개별적인 것이로구나… 그 가운데 내 눈에는 2루수 앞 땅볼치고 1루까지 진루했다가 더그아웃에서 뛰쳐나오는 LG 선수들 사이에 갇히다시피한 배정대가 들어왔다. '끝내주는 남자' 배정대는 지금 이 순간 무슨 생각을 할까. 



나는 그날 CGV 신촌 아트레온 5관에서 가장 빨리 나온 사람이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 가는데, 몇몇 NC팬분들로부터 DM이 와 있었다. 나는 영화관 풍경을 찍어 '셀프고문 중'이라는 스토리를 올렸었는데, 그걸 보고 나를 위로하는 내용이었다. 보통은 '왜 굳이 거길 가서 고통을 자처하느냐'는 내용이었는데, 그러게요, 저는 원래 그런 사람이라… 나도 이런 마조히스트적 성향의 기원을 알 길이 없었다. 이들은 내가 어려운 원정길에 올랐을 때(어이없는 점수 차의 스윕패 같은) 꾸준히 위로해주던 분들이었다. 역시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하려면, 정규시즌 1위를 해서 체력을 비축해야 한다'는 등의 이야기를 나누며, 쓰린 속을 달랬다. 생각해보면 가을 야구 유일의 지방 구단으로서, 그 먼 원정길 다니느라 우리 선수들이 얼마나 고생했냔 말이다. 'NC만 아니면 지하철 시리즈'니 어쩌니 하는 얘기로 빈정 상했던 기억도 재팝업됐다. 짜증이 콱 몰려왔다.


고양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며 추위에 곱은 손으로 핸드폰을 들여다봤다. 단톡방 가운데 2살 아가를 둔 친구가 말했다. "남편(LG팬)은 29년을 기다려서 우승을 봤는데, XX이는 1년 만에 봤네" 옛날 말로 강산이 2.9번은 바뀌었을 시간인 29년, 신생아가 서른을 목전에 둔 어른이 되기까지의 시간인 29년, 29년 동안 최소 29번은 졸였을 마음. 그제서야 나는 영화관에서 봤던 눈물의 의미가 조금씩 이해가 됐다. 그리고 NC가 우승을 한다면, 나도 여지없이 울 것이었다. 운명공동체란, 그런 것이니까. 이렇게 희로애락은 철저히 개별적이기도, 또 동질적이기도 한 것이었다.


인스타그램을 항해하다보니, 여지없이 또 소고기를 먹는 우리의 손캡의 스토리가 보였다. 그래, 비시즌 동안 소고기 마이 묵고 체력 마이 비축하이소. 그리고 또 달려 봅시다. 추워서 곱아드는 손으로 외투 깃을 부여잡으며, 내년 시즌에 대한 의지를 불태웠다.


속 좁은 타팀팬이라 좀 삐딱선으로 썼지만, 그래도 축하드립니다. 이 화면이 그날의 중계 가운데 가장 와닿는 컷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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