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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눈썹달 Apr 13. 2024

피할 수 없어서 즐겼더니

명언의 부작용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라는 명언은 미국 심장 전문 의사 로버트 엘리엇(Robert S. Eliet)의 저서 <스트레스에서 건강으로 -마음의 짐을 덜고 건강한 삶을 사는 법>에서 나온 말이라고 한다.


살면서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놓였을 때, 피할 수 없으면 즐기려는 마음을 갖는 것이 정신 건강에 더 낫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실제로 하기 싫지만 할 수밖에 없는 일, 싫지만 피할 수 없는 상황으로 힘든 경우가 많으니 큰 공감을 얻게 되었던 게 아닐까 싶다.



최근 회사에서 3개 부서 통합 워크숍이 있었다.


이 사내 행사는 부서 단합대회의 성격이 짙고, 윗분이 선호하는 방식에 따라 운동회와 레크리에이션 위주로 진행된다. 운동회는 이해할 수 있지만 레크리에이션의 핵심으로 꼭 들어가야 하는 '노래 대전'은 직원들을 늘 곤혹스럽게 한다.


직원은 노래를 부르고 윗분이 심사하여 점수를 매긴 후, 높은 점수를 받은 사람이 소정의 상금을 수상하는 방식이기 때문.


매일 크고 작은 평가 속에 사는 직장인들인데 그 시간에까지 누군가의 앞에서 노래하고 평가받아야 한다는 사실에 모두들 질색한다. 한 사람만 빼고.


직원들은 오랜만에 다 함께 모이는 자리이니 서로 대화 나누며 알아가는 시간을 조촐히 갖기를 바랐건만 윗분께서는 꼭 노래 대전을 넣으라 명하셨다.


내가 파악한 그분의 생각은 이렇다. '자신이 그렇게 판을 깔아줘야 직원들이 스트레스도 풀고 신나게 논다.'

실상 직원들은 그런 '워크숍'이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부터 끝날 때까지 스트레스받고, 울며 겨자 먹기로 하는데 말이다.



이런 상황이라면 우리는 하는 수 없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자.

1년에 한 번이니 눈 질끈 감고 참여하자.


그래서 다들 열심히 했다.


사실 날씨도 좋았고 막상 칙칙한 사무실에서 일만 하던 사람들과 야외에서 같이 시간 보내니 좋기도 했다.


노래 대전을 견디기 위해서 틈틈이 맥주를 홀짝거리며 민망함에 대한 감각을 둔화시켰고, 노래할 때 홀로 고군분투할 선수들을 응원하느라 추임새 넣어가며 탬버린도 치고! 이왕 하는 거 무념무상으로 임했다.


그랬더니 그렇게 싫던 시간이 재밌어졌다. 역시 한국인은 흥이 있는 민족이었다. 좋아서 한 건 아니었지만 에라 모르겠다 해버리니 흥이 오르면서 오히려 즐겁게 놀게 됐다.



여기까지는 좋았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명언대로 즐겼으니까.


그런데 그렇게 즐기는 광경을 보고 윗분께서 흐뭇하셨는지, 행사가 다 끝나고 마무리하는 시간에 이런 말씀을 하셨다.


"여러분들이 그렇게 함께 즐기는 모습을 보니 참 행복했어요. 여러분들도 같은 마음이었지요? 모두의 refreshment를 위해서 올가을에 한 번 더 만나기로 해요."



피할 수 없어 즐겼더니, 피할 수 없는 상황이 다시 예고되어 버렸다.


직원들의 속도 모르고 행복했다는 윗분과, 너무 열심히 했다며 푸념을 읊조리는 직원들.


좁혀지지 않는 간극으로 여전히 평행선을 달리는 직장 생활이다.


가을의 일은 가을에 생각하는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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