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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드롱 Mar 15. 2024

사막의 호텔에 가 보았나요

아직 발이 시린 봄에

어저께 산책을 할 때 개나리가 몇 점 피어난 걸 봤다. 분명 봄이다. 게다가 지구 온난화로 올해는 역대 가장 봄꽃이 빨리 핀다고 한다. 그런데 왜 이렇게 발이 시리지? 오들오들. 이상하다. 면역이 약해진 걸까? 늘 몸에 열이 넘치는 나,  아아만 먹는 나, 밤에도 창문 열고 자는 나인데.


구스점퍼를 걸치고 그래도 모자라 손을 덜덜 떨며 뜨거운 보리차를 컵에 담아 쥐었다. 그래도 한기가 가시지 않는 걸 보니 이 서늘함은 밖에서 오는 게 아니다. 혹시 내 몸속 어딘가에서 멀쩡히 작동하던 작은 난로 하나가 꺼져버린 게 아닐까.     


  


눈을 감고 가장 뜨거웠던 날을 생각해 본다. 그러면 저절로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그곳은 사람이 올까 싶은 사막 가운데 있었다. 나를 포함해 25세 동갑내기 처녀들은 생전 처음 미국여행을 온 거였다. 흙먼지 날리는 고속도로를 한참 달려 도착한 그곳은 희뿌연 핑크색 2층 건물에 수영장이 있는 낡은 리조트였다. 입구에는 라스베가스의 유명 호텔 <플라밍고>가 아닌 <플라밍-고>라고 적혀있었다.


객실 안의 풍경은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나 오래된 나무껍질처럼 벗겨진 복도의 페인트칠, 건물 사이사이에무심히 놓인 사슴, 부엉이, 기린 같은 동물 조각들이 생각난다. 건조한 모래바람에 닳아 코가 납작해진 아기천사 조각들은 선인장들 사이에 방치되어 있었다.  


우리는 땀을 흘리며 바비큐를 해 먹고 맥주를 마셨다. 날숨보다 들숨이 더 뜨거웠다.





밤이 되자 공기가 좀 서늘해졌다. 금 간 기둥이나 벗겨진 페인트도 그림자 속에 숨었다. 조명이 켜지자 호텔은 그제야 진짜 자기의 모습을 드러냈다. 촌스럽던 핑크색 외벽은 검푸른 저녁 공기와 닿으며 묘한 보라색으로 변했다. 둥그런 수영장 위로 알전구들이 조르륵 켜지자 버려진 것 같았던 동물조각들이 살아있는 것처럼 보였다. 팝업북처럼 정글의 실루엣이 일제히 고개를 들었다. 마치 루소의 그림 속 원시림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



우리는 알전구들과 별들이 담긴 수영장 가장자리에 앉아서 맥주캔을 땄다. 국제 사회적 기업 콘퍼런스에 참가하러 샌프란시스코에 온 김에 하게된 출장(?) 속 작은 여행이었다. 가난한 미대생들이었지만 우리는 우리가 가진 작은 믿음으로 세상을 바꾸고 싶은 꿈이 있었다. 그때 우린 가진 능력에 비해 희망과 믿음이 훨씬 맑고 컸다. 그걸 예쁘게 봐주신 여러 응원에 힘입어, 국내에서 수상을 하고 부상으로 콘퍼런스에 참여할 수 있게 된 거였다.



맥도널드 쿠폰을 모아 외식을 하던 날들, 점심값을 아끼려고 비빔밥 1개를 시켜 3인분으로 늘린 다음 나눠먹던 시간들을 떠올렸다. 사무실을 공짜로 빌려준다고 했던 곳에서 쫓겨났던 기억, 추운 겨울날 학원 한편을 빌려 쓰면서 1인용 접이식 침대에 세 명이 포개어 쪽잠을 잤던 날들. 사업기획서란 건 본 적도 없었으면서 밤을 새 가며 기획서를 쓰던 일, 경영이니 회계를 배우기

위해 오리콤 대표이사였던 멘토님을 소개받았는데 워낙 아무것도 몰라서 엑셀부터 배워야 했던 졸린 여름날.... 모든 게 맨땅에 헤딩이었던 상황이라 그렇게 이룬 성과들은 우리에겐 기적이었다.







우리는 수영장 물에 발을 담근 채 밤이 늦도록 우리의 고난과 모험, 행운을 되씹었다. 고생과 실수담들도 지나고 보니 운명적인 이유가 있어 보였다. 지구 위의 나, 신과 우주의 내 삶이 그토록 필연적으로, 강하게 이어져있다는 느낌은 그 이후에도 없었다. 밖에서 보면 초라할지언정 그때 우리는 주인공이었다. 그날 밤, 그 사막에서 제일 행복한 별들이 우리 아니었을까.   



어차피 태어난 이상 까짓 거 해보자의 정신으로 용감했던 그때의 나를 떠올린다. 회의감이나 무기력 따위 모르던, 무릎도 허리도 멀쩡한, 사람의 선함을 믿던. 가난한 우리를 말없이 품어줬던 사막의 그 짝퉁 호텔을 생각한다. 사막의 <플라밍-고 호텔>.



지금도 있을까? 나는 추울 때마다, 마음이 옹송그려지고 외로울 때마다 사막 속 그 오아시스를 떠올린다. 그립다. 숨 쉴 때마다 속을 덥혀주던 뜨거운 공기도, 별처럼 반짝이던 25살의 우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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