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무구조를 바꾸면서 직접 움직이는 것보다, 퀵서비스나 택배를 조금 더 적극적으로 이용하기로 했다. 더 질좋은 서비스를 위해서. 내 몸이 편안해 지는 것은 두번째, 진짜 두번째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주행거리가 줄었고, 연비와 유지비용에서 어느정도 자유로워진 것이 그 다음 이유였다. 마지막으로 자동차로 밥 먹고사는 사람으로서, 조금이라도 더 재미있게 자동차를 타야 한다는 일종의 책임감을 갖게 되었다. 취미가 '일'이 되고나니 확실히 차가 싫어졌다. 최근 1~2년간, 이대로라면 내가 정말 좋아하는 일을 잃어버릴 수도 있겠다는 위기감을 느꼈던것이 사실이니까-
라는 핑계를 만들며.
이런저런 핑계를 갖다붙인 이유는 간단하다. 처음에 별 생각없이 가져온 '타던 차'인 쉐보레의 크루즈5는 생각했던 것 보다 '배달겸용'으로 꽤 좋은 차였기 때문이다. 동급의 다른 해치백들보다 짐칸으로 사용할 수 있는 용량이 더 넓었고 2.0 디젤의 시원한 가속성능이 마음에 들었다. 관리잘된 풀옵션이라 이것저것 다 달려있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물론 국산치고는 수리비가 비쌌고, 미션이 정말 말도안되게 구렸지만 세상에 완벽한 차가 어디있겠나. 부담안되는 가격에 사서 1년 넘게 큰 말썽없이 잘 버텨주었다. '도구'로서의 운송기기의 역할을 완벽히 수행했다. 다시말하면 차가 별로여서, 아니면 해치백이 싫어서 바꾼건 아니라는 뜻이다. 말 그대로 그냥. 아주 심플하게 그냥이었다.
크루즈5는 꽤 좋은차에 속했다. 수현상사에게도, 소설이에게도.
새로운 차를 들이는 조건은 비교적 간단했다. 짐이나 인원수같은 조건 없이 그저 휘발유차. 기왕이면 조용하고 편하면 그만이었다. 캠핑이나 차박같은건 궁금하지도 않았고, 인원이래봤자 하운드 한 마리와 나 하나면 족했다. 예상에 없던 여자친구 비슷한게(?) 생긴다 한들, 개 한마리 정도는 쿠페 뒷자리에 충분히 탈 수 있지 않은가. 사실, 차의 크기나 연식보다 나에게 중요했던 것은 오히려 구동계였다. 크루즈때 처음 경험해 본 소형 디젤은 생각보다 조용하고 탈만했지만 시내주행이 압도적으로 많은 나였기에, DPF경고등과 첨가제에 시달려야만 했다. 당연히 중고차를 살거니까, 연비가 아무리 좋다한들 수리비에서 다 까먹을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래서 새로 들이는 차는 '1500만원 언저리에 무조건 휘발유, 기왕이면 다시 6기통' 정도의 조건을 정했다.
퇴짜맞은 차종들. 현대 아슬란, 기아 K9, 렉서스 IS, 인피니티 G37
SUV나 웨건같은걸 살까 싶기도 했지만, 그렇게까지 큰 공간은 필요없을 것 같았다. 직업이 부품업자니까, 국산차 취향이긴 하지만 수입이라서 피할 이유도 없었다. 쿠페건 세단이건 상관 없었지만 프레임 사고이력이 있는 차가 싫어서 걸러내다보니, 자연스럽게 세단들만 남았다. 자동차로서의 가치만 본다면 IS,GS나 G37도 괜찮았지만 이 시점에 일본차를 타고싶지는 않았고, 국산 6기통 중에는 인기있어서 상대적으로 가격이 잘 방어되는 '그랜져사이즈'와 크루즈 전에 타던 '제네시스'를 빼고, 어정쩡한 포지션의 아슬란과 K9를 빼고나니 생각보다 금방 선택지가 간결해졌다.
완성도 높은 벤츠의 W212 E클래스와 자연흡기 6기통을 얹은 마지막 3시리즈인 E90, 개인적으로 사랑하는 현대의 에쿠스 정도가 남았다.
벤츠의 W212 E클래스, BMW의 E90 3시리즈, 현대의 에쿠스 신형과 구형
W212 E클래스는 잔고장도 없지만 국산만큼 많이 팔려서 일반인도 정비나 부품수급이 어렵지 않다. 쿠페가 취향이지만 E90 328은 컨버터블만 정식수입 되었다. F10 5시리즈는 직업상 너무 매일 보는 차라서 제외시켰다. 물론 3과 5중에 고르라면 '3쪽'이기도 하고.
에쿠스는 구형과 신형 모두 리스트에 넣었다. 모든 모델이 6기통이고, 자잘한 이슈가 생긴다한들 집앞에 있는 블루핸즈에 들어가면 될 일이었다. 뭔가 에쿠스는 구형이 진짜인것만 같은 느낌적인 느낌과, 신형은 실제로 소유했던 지인들이 워낙 호평했던 차종이다. 메인터넌스의 편의성과 옵션에서 수입차에 비해 압도적이다.
가져와서 일주일 쯤 지났을 때. 16만2천Km. 지금은 17만이 거의 다 되었다.
결국 고른건 2006년식 에쿠스였다.
물론 그 시절엔 좀 과하다 싶었는데, 15년쯤 지나고 다시보니 나름 클래식하다. '예쁘다'말고 '멋있다'의 느낌.
3.3 람다가 달린 후기형이고, 17만km쯤 탔으니까 이제 막 길이 들기 시작했다. 마지막 결정의 이유 역시 간단했다. 차를 알아보던 그 시점에 내가 본 차중에 관리상태가 가장 좋았다. 15년이 지난 차니까, 자잘한 사고나 신형에 비해서 떨어지는 옵션같은건 크게 신경쓰지 않고 골랐다. 가장 중요하게 봤던 부분은 초기 람다에서 많이 나타나는 엔진쪽 누유와 노킹 정도였던 것 같다.
수입차종들은 하체나 누유, 하드탑의 관리상태가 좋지 않은 경우가 많았고 신형 에쿠스는 기왕이면 '조금 더 조금 더' 좋은 것 찾다보니 2천만원 넘는 후기형을 찾고있는 나를 발견했다. 이러느니 '싸게사서 다 고쳐서 타는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으로 시승해본 구형 에쿠스가 얼결에 걸린 럭키였다. 앞 범퍼에 흠집이 작게 있었고 겨울이 되기 전에 타이어를 교환해야 할 것 같았지만, 실내 버튼이나 시트 관리상태가 좋았고 하체나 누유같은 기본 정비상태가 좋았다. 무엇보다 네비게이션 매립 빼고는 아무것도 바꾸지 않은 순정상태라는게 마음에 들었다. 심지어 바닥 카페트와 스페어타이어 역시 그대로다.
광활(?)한 넓이의 양질의 가죽시트는 소설이 혼자서 독차지 하는 중이다.
무엇보다 내가 기분이 좋은 건, '소설이'가 이 차를 상당히 좋아한다는 점이다.
전에 타던 차보다 시트가 넓어졌고, 뒷자석이 넓어졌다. 심지어 가죽의 질도 좋아졌다. 자연스럽게 드러누워 있는 소설이를 보고있자면 내가 기사가 된것같은 묘한 기분이 들기도 하지만 편안해 하는 모습을 보면 나까지 기분이 좋아진다. 뒷자리는 당연히 넉넉해서, 대형견용 캔넬도 들어간다. 그 차가 원래 그 용도냐고 주변사람들이 물어보긴 하지만 내가 이렇게 쓰면 되는거 아닌가. 에쿠스 뒷자리가 별건가. 어차피 운전하느라 나는 못앉으니까 개라도 편하면 됐지.
신주단지 모시듯이 귀하게, 흠집날까 신경을 곤두세워 써야한다면 그게 과연 나를 위한 럭셔리일까.
잔디밭과 모래밭에서 비오는 날 땀이 날 때까지 신나게 뛰어놀고, 차 뒷자석에 아무렇지도 않게 개를 태우면서 진짜 럭셔리에 대해서 생각했다. 예상하지 않았고, 의도하지 않았으나 얼결에 얻게된 전무후무한 가성비의 코리안 럭셔리에 대단한 만족감을 느끼고 있는 요즘이다. 어릴 때 보다 지금이 좋은게 바로 이럴 때가 아닐까. 남의 눈 신경쓰지 않아도 되고, 남의 눈 신경쓰지 않는 내 모습이 스스로 만족스럽기도 하고. 나름 괜찮게 나이먹는 중인가, 싶기도 할 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