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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일희 Mar 08. 2024

용주골에서 귀한 'MZ'를 만났다


지난 늦가을부터 뜻밖의 청년들을 뜻밖의 장소에서 간헐적으로 만나고 있다. 처음엔 한 카테고리에 동질적으로 묶이지 않는 사람들, 그것도 젊은이들의 생각은커녕 낯을 익히는 것도 쉽지 않았다.      


딸 벌이거나 조카 벌이이지만, 나이도 직업도 젠더도 다 제각각인데다, 또 딸 벌 조카 벌이면 뭘 어쩌겠나. 딸인들 조카인들 어디 쉬운가. 내 자식조차 ‘재들은 다른 인류야’라 도리질하며 가족 간에도 문화와 소통의 차이를 겪는 ‘라떼’ 세대이고 보면, 디지털 원주민과 디지털 이주민이라는 정체성의 차이가 현격한 저 일군의 젊은이들이 난감할밖에.      


활동명(별칭) 외 서로 아는 것이 많지 않은 이들의 면면은 사회 주류적 관점에서 보자면 조금 어긋나 있다. 거의 모든 일상을 온라인에 공개하는 ‘MZ’의 특징인 튀려는 욕구가 보이지 않는다. 남들 먹는 걸 먹어야 하고, 남들 입는 걸 입어야 하고, 남들 가는 델 가 봐야 하는, 그래서 마침내 이 모든 활동이 최종 귀착되는 소비를 온라인에 공개하고 ‘좋아요’를 받아야 직성이 풀리는 신자유주의 소비 주체의 속성이 드러나지 않는다.  

    

주머니가 가벼워서인지, 애초 소비에 관심이 없어서인지, 외관이 ‘MZ’스럽지 않게 수수하다. 외모 꾸밈이 없고 거의 대부분 의복도 단지 방한용일 뿐(물론 겨울이어서이겠지만) 겉치레가 없다. 어쩌다 이용하는 대중교통수단에서 마주치던 패션 잡지에서 쏙 뽑아낸 것 같은 세련되지만 정형적인 젊은이의 외관이 아니다.  

    

이들에게 또 하나 흥미로운 특징은 잘난 체가 없다는 것이다. 아는 체 잘나가는 체가 없고 정말 특이하게도 젊은이들의 언어인 욕이 들리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기도 없기도 한 듯 보이는데, 그러면서도 서로 친숙하고, 또 그러면서도 서로 반말을 하지 않으며 서로를 아무개 님이라 부르며 존중한다.      


하나 더 이 젊은이들의 도드라진 특징을 말하자면 이들이 일제히? ‘비건’이라는 점이다. 동물을 사랑하고 존엄함이 인간에게만 있지 않다는 믿음으로 동물권을 주창한다. 또한 이들 상당수는 성소수자다. 여자든 남자든 명백히 둘 중 하나여야만 정상으로 간주되는 사회에서, 이들은 가까운 가족에서부터 친구 지인들로부터 여러 번 내쳐지는 경험을 했을 테다. 그래서일까. 이들에게선 때 이른 초월감이 스며있다. 사회 주류가 규정하는 젊은이다움, 여자다움, 남자다움 등을 탈각하기 위해 무진 애를 쓰느라 에너지가 고갈되어 정기가 사라진 조루함이랄까.      


그런데 신기하게 다들 착하다. 나대는 ‘관종’의 언어가 아닌 소심한 소수자의 언어를 쓴다. 안전한 공간에서 확보한 ‘장소 안도감’ 속에서 소수자 정체성을 발현하고 미움받을 각오 없이 일상을 나눈다. 유일하게 자부심을 느끼는 공간에서 서로의 존재를 승인하는 이들은 젊지만 젊지 않다. 신둥건둥 하지만 한편 다정하다. 이런 젊은이들이 모인 곳이 어디일까? 독자께선 맞춰보시기 바란다.      


이들이 모였다 흩어졌다를 반복하며 서울이든 지방이든 개의치 않고 결집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누군가를 지켜주고 싶어서다.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짠’하고 나타나 누군가를 지켜왔다. 동물들을 학대하는 곳에서 인간의 사악함을 고발했다. 힘없는 세입자를 쫓아내려는 자본의 권력에 ‘몸빵’으로 싸웠다. 불법자가 될 수밖에 없는 이주민을 감금하고 추방하는 공권력에 대항했다. 장애인을 탄압하는 현장에서 드러누웠다 들려 나갔다. 


부정의가 공권력이라는 휘장을 두르고 폭력을 휘두르는 현장에 출몰해 약자와 소수자를 짓밟는 광경을 똑똑히 목격하고 기억해 전사이자 증인이 되어왔다. 이 ‘MZ’들이 집이자 일터인 곳을 빼앗길 위기에 처한 여자들의 삶을 지키기 위해 꾸역꾸역 모여들었다. 기지촌의 유산으로 관의 비호와 묵인 속에 잔존해 온 성매매 집결지에, 이제 와서 종사자 여성들을 ‘불법’이니 내쫓겠다는 권력의 으름장에 맞서기 위해 결집했다.   

   

이들의 지켜주고 싶은 마음, 돌보고 싶은 마음의 정동은 조금씩 다를 테다. 내가 몰이해를 부끄러워할 줄 모르고 ‘닥치고 폐쇄’를 외치는 파주시와 집결지의 종사자 여성들과 단 한차례의 의견 교환도 없이 파주시 편에서 폐쇄의 기치를 쳐든 성매매 여성 지원 센터 <쉬고>의 반페미니즘에 극도의 분노와 부끄러움으로 나섰듯이, 이들도 각자의 정의감과 분노를 안고 연대의 길에 나섰을 것이다.      


이 집단에 일사불란한 진두지휘 같은 것은 없다. SNS의 연대 요청에 기꺼이 자신의 몸과 시간과 에너지를 기증한다. 상대의 도움을 받았기에 돌려주는 배타적 상호부조가 아니라, 오늘의 증여가 제3의 타인을 돌보도록 순환되기를 기대하는 호혜와 연대의 발로이다. 연대의 증여자들은 하나하나가 싸움의 주체가 되어 온몸으로 방어선을 구축한다.      


자 이제쯤이면 이 귀한 ‘MZ’들이 모여든 곳이 어디인지 독자들은 짐작할 것이다. 파주시 용주골 성매매 집결지다. 종사자들을 마치 재앙의 오염원이라도 되는 양 파주시민은 발도 들이지 않는 이곳에, 소수자라 불리며 생채기 난 이들이, 사회적 소외와 고통이 정체성이 된 이들이, 교조화된 페미니즘과 관료화된 ‘PC’함에 동의하지 않는 이들이, 어떤 대가도 없이 성매매 여성들을 지키겠다고 모여들었다. 


이들의 모습은 흡사 거대한 골리앗에 고작 짱돌 하나 움켜쥐고 들판에 나선 다윗의 형상이다. 와라, 거인이여 권력이여, 우리를 무너뜨리고 짓밟고 가라. 들판은 다시 우리와 같은 다윗들로 채워질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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