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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냥 May 11. 2024

말로 떠벌리는 진보말고 삶이 진보인 좌파는 어디에?

<잘못된 단어> (르네 피스터, 2024, 문예출판사) 서평


미국 컬럼비아대에서 시작된 ‘가자지구 학살을 멈추라’는 시위가 ‘반 유대주의’로 매도되었다. 시위대 내 유대인이 참여하고 있었고, 이들은 명백히 ‘반 유대주의’가 아니라 ‘가자지구 팔레스타인인에 대한 무차별 학살을 멈추라’고 외쳤는데, 시위생들이 마치 나치라도 되는 양 잡혀갔다. 농성에 참여한 200여 명이 경찰에 체포된 이후, 반전 시위가 미 전역 대학으로 확산되더니 2천 명이 넘는 시위대가 체포되었다. ‘입틀막’이 전 지구적 유행인가 보다.     


제목이 기억이 안 나는 넷플릭스 미드에서 본 한 사건. 한 교수가 나치가 했던 행동을 강의에서 흉내 냈다. 강의의 맥락상 필요했던 제스처였고 나치를 옹호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를 문제 삼은 한 학생이 이 교수를 반 유대주의자로 고발한다. 사건이 일파만파 되어 교수는 해임의 위기에 처한다.      


강의 과정상 나치 흉내가 꼭 필요했는지 따져볼 수는 있겠지만 무턱대고 ‘친 나치’로 몰아세우는 학생이나 명확한 조사 절차 없이 징계 절차에 들어가는 대학 행정에 깜짝 놀랐다. 드라마니까 그러겠지 했는데, 이런 ‘PC함’이 미국 내에서 실제 일어나고 있었다는 걸 이번 컬럼비아대 사건을 보며 상기하게 되었다.   

   


이렇게 금기어를 잘못 썼다가 치도곤을 당하는 일련의 사례가 미국에서 공공연하게 벌어지고 있다고 재미 독일 언론인 르네 피스터가 <잘못된 단어>에서 소상히 다루고 있다. 우파도 문제지만 ‘PC함’에 경도되어 할 말을 제대로 하지 않는 좌파의 반지성도 문제라고 매섭게 비판한다. 


공감되는 부분이 많았지만 교차성에 대한 문제 지적, “교차성 이론은 세계적 분열의 토대가 되었다. 현재를 분석하기 위해 고안된 도구가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을 솎아내도록 허용하는 이념의 원동력이 되었다”에는 동의 반 비동의 반이다.      


교차성 이론이 일면 피해성 배틀이 될 우려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교차성이 시스템 내부에 존재하는 위계화된 차별을 드러나게 한다는 점에서 분열보다는 개입의 순기능이 많다고 본다. 하지만 위계화된 차별을 드러냄에 있어 가시화된 차별만 강조하게 되면 비가시화된 차별은 목소리를 낼 수 없게 되는 문제가 분명히 생긴다. 저자가 말한 “솎아진다”가 분열의 도구로 작동되기도 한다.      



미국 사회를 속속들이 모르니 미시적 사례는 구체적으로 언급할 수 없지만, 흑인의 인권만 중시해 그 외 소수인종이 당하는 피해가 경시되는 경향이 분명히 존재한다. 2021년 애틀랜타 소재 한 마사지 업소에서 한국인 여성 4명이 아시아계 혐오로 살해당했지만, 이는 “Black Lives Matter”만큼 공명을 일으키지 못했고, 이런 현상을 비판했다간 인종차별주의자로 낙인 당할 각오를 해야 한다고 한다. “그게 흑인차별만큼 심각해?” 이런다는 거다.      


르네 피스터는 <슈피겔>의 미국 주재원으로 미국에서 생활하면서 목격한 과도한 ‘PC함’에 “보자 보자 하니 정말 너무하네” 하는 심정으로 미국 사회의 위선과 좌파의 ‘플라세보 행동주의’(구체적 사례는 일독을 권합니다)를 날카롭게 비판한다. 미 좌파의 “백인 정체성을 씻을 수 없는 원죄”로 정의하는 비이성적 가해 의식으로, 모든 판단이 단지 흑백 갈등, 흑인 혐오, 흑인 차별의 관점으로만 수렴된다는 것이다.  

    

르네는 흑인이 역사적 피해자이고 지금도 심대한 인종차별의 피해자이지만, 모든 사회적 개인적 관계가 흑백의 권력관계로만 구성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보통은 이럴 때 교차성의 렌즈로 보라고 권고하지만, 르네는 그것도 문제라는 지적이다. 어쨌거나 만사를 흑백 권력관계로만 판단할 수 없다는 데는 동의한다. 문제는 미 좌파가 인종차별주의자로 몰릴 게 두려워 이런 경도된 판단 기준을 비판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이런 이유로 책의 소제목이 ‘정치적 올바름은 어떻게 우리를 침묵시키는가’이다.  

      


시계를 한국 사회로 옮겨보면, ‘정치적 올바름은 어떻게 우리를 침묵시키는가’ 사례는 숱하다. 페미니즘 문제로 국한하면,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면서 가부장을 옹호하거나 성소수자를 혐오하는 사례는 넘쳐난다. 시계를 좀 더 좁혀 내가 사는 파주시로 좁혀본다면, 역시 사례가 많다. 파주시장이 민주당 소속이라는 이유로 그가 안하무인 막가파 정책으로 막대한 예산과 행정력을 낭비하고 여성 인권 침해를 일삼아도 어느 시의원 하나 어느 시민단체 하나 비판의 소리를 내지 않는다.      


시장이 민주당인건 민주당인 거고, 권력을 견제하고 감시하면서 할 말하라고 시의원에 뽑아주었더니 진영 논리에 잠식되어 제대로 된 비판하는 시의원이 한 사람도 없다. 국민의 힘 진영 시의원은 또 어떤가. 야당 진영에서라도 민주당의 잘못된 행정에 대한 가열찬 비판이 있어야 하지만 이쪽도 잠잠하다. 뭔 짬짬이가 있었던 건지 알 길이 없다. 시민의 돈으로 쓰지 않아도 되는 곳에 물 쓰듯 예산을 낭비하고 있는데 말이다.  

    

‘PC함’에 경도된 또 한 측은 시민단체, 특히 여성인권 시민단체다. 이들 대부분이 민주당 성향인 건 성향인 것이고 할 말은 해야 하지만, 대부분 시 예산에 기대 사무실과 사업을 운영하는 시민단체는 시장의 거수기로 전락해 버렸다. 성매매에 반대하는 것과 성매매 집결지 종사자들을 맨몸으로 쫓아내는 것이 동급의 의제가 될 수 없지만 모두 침묵한다.      



한국 사회도 미국 못지않게 할 말을 하는 사람이 사라지고 있다. 할 말을 했다간 큰 대가를 요구하는 사악한 세상으로 변질됐기 때문이다. 얼마 전 홍세화 선생이 영면했다. 그를 두고 누군가는 최후의 척탄병이었다고 회고하던데, 나는 그런 건 잘 모르겠다. 다만 그가 할 말은 했다는 것은 기억한다.     

 

그가 “낫게(better) 지자”라며 각인시킨 패잔병의 책임과 최후를 이해한다. 멋지게 지면 무슨 소용이냐는 사람은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경지다. 이길 수 없는 싸움이어도 해야 할 싸움은 해야 하며, 지는 게 명백해도 양심을 팔아서는 안 된다는 다짐. 의로운 사람은 하나둘 스러져가고, 그럴듯한 거짓말과 미움받지 않고 인기에 영합하려고 위선을 늘어놓는 사람들만 살아남아 드글거린다. 망할 놈의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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