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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냥 May 18. 2024

누가 '성매매 여성'을 죽음의 문턱으로 몰아갔는가

용주골 강제 폐쇄 현장에서


그날 그녀는 시멘트 바닥에 깨진 한쪽 머리를 한 손으로 감싸 쥐고 있었다. 깨진 머리에서는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좁은 길로 구급차가 들어올 수 없자 마을 사람의 등에 업혀 구급차로 이동했다. 파주시가 용주골 가림막을 철거한다고 집결지 종사자들을 을러대고 그 바람에 그녀의 머리가 깨진 그날은 ‘3.8 여성의 날’이었다.


       

그날 다친 그녀가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서성이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날 머리를 다친 후 “머리가 한 번씩 아프다”고 했다는데, 그제(5월 15일) 뇌경색으로 쓰러진 후 수술을 받았지만 위독한 상태다. 파주시의 줄기찬 압박(CCTV 설치, 강제 철거, 낮밤으로 이어지는 집결지 순찰, 경찰 단속 등)으로 생계에 타격을 입은 그녀는 과도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두 장애인 동생을 부양하던 그녀는 벌이가 없자 초조했다. 전주 선미촌에서 쫓겨온 후 겨우 용주골로 옮겨와 살아보려 했지만, 또다시 삶과 일터에서 쫓아내려는 세상에 울분도 컸을 테다. 문득 삶과 죽음 사이의 그녀가 되어 본다. 나라면 희망 없는 삶으로 돌아오고 싶을까. 그녀가 깨나지 못하는 것이 출구 없음의 현실 때문인 거 같아 말할 수 없이 미안하고 슬프다. 깨어났으면 하는 나의 기도가 그녀의 절망을 이기지 못할 것 같아 두렵다.     


그녀가 살아 돌아오지 못한다면 파주시는 그녀의 죽음에 책임을 져야 한다. 김경일 시장 취임 후 1호 사업인 집결지 강경 폐쇄로 ‘돌격 앞으로’를 외치느라 정작 종사자들의 삶은 안중에도 없었다. 실태조사 없이 종사자들과 대화 한번 없이 만들어진 허울 좋은 피해자 지원조례를 내세워 파주시는 마치 구세주인 양 행세했다. 발각되면 받은 돈을 토해내야 하는 탈성매매 각서를 쓰고 가장으로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종사자들이 백만 원 남짓의 지원금을 받을 수 있겠는가.      



그녀가 쫓겨난 선미촌에서도 집결지를 폐쇄하며 종사자들에게 지원금을 주긴 했다. 탈성매매 각서를 쓰지 않고 선미촌을 떠나도 지원금을 지급한다는 내용으로 파주보다는 포용적이었지만, 지원금을 받은 여성은 일부였다. 지원금을 받고 탈성매매를 하라고 종용하지만, 종사자 대부분은 지원금으로 가족을 부양할 수 없기에 받을 수가 없었다. 그녀도 지원금으로 장애인 동생 둘을 부양할 수 없기에 선미촌을 떠나 용주골로 왔을 것이다. 보통 사람들에겐 인생 막장이라고 여겨지는 용주골이 그녀에게 희망의 땅이었던 것이다. 이 역설이 그녀 혼자 짊어져야 하는 책임인가.     

 

‘용주골 닥치고 폐쇄’ 이후, 지역사회의 냉담과 지역 인권 시민단체의 무관심에 의아해 ‘다들 대체 왜 이러지’하면서 용주골에 드나들기 시작했다. 나는 선량한 인간이 전혀 아니다. 해서 파주 시민과 인권단체 특히 여성인권단체가 어느 정도 관심을 기울였다면, 나는 환갑이 다 되어가며 시난고난한 몸의 한계를 구실 삼아 시민의 책임을 슬그머니 밀쳐두었을 것이다. 그런데 인권침해 상황이 악화일로로 치닫는데도, 진보연 하거나, 인권 운운하거나, 하다못해 민주당 시장의 폭주를 견제할 만한 야당 쪽조차도, 모두 서약이라도 한 듯이 침묵하고 있었다.      


성매매에 반대하기 때문이라고? 나도 성매매에 찬성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성매매의 구조적 부정의와 성매매에 유입될 수밖에 없는 취약한 여성들의 개인적 상황을 동일시해 같은 무게로 단죄하는 것이 젠더적 관점은 차치하고 그저 인간적인 판단이기는 한 건가? 어째서 사람들은 이곳에서 살고 일하는 종사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려 하지도 않은 채 무조건 ‘착취당하는’, ‘주체성 없는’, ‘업주의 농간에 놀아나는’ 어리석은 이들이라고 단정하는가.      


파주시의 침입이 있을 때마다 폭력에 맞서기 위해 이곳을 드나들며 종사자들을 만났다. 만났다는 좀 어색한 표현이겠다. 보았다가 맞겠다. 가까이서 본 그들의 얼굴은 지치고 낡았으면서도 마지막 발악 같은 것이 언뜻 스치곤 했다. 싸움의 와중에 연대하러 온 시민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도 어색해 쭈뼛거리던 그들은 작은 목소리로 ‘고맙다’고 했다. 누구에게서도 ‘당신들도 시민이고 여기서 맨몸으로 쫓겨나지 않을 권리가 있다’는, 그들로서는 사뭇 낯설고 똑똑해 보이는 말을 난생처음 타인에게 말과 마음으로 받아안고는 혼자서 울컥했을 것이다. 지금껏 부정당해온 자신의 삶을, 가족에게조차 내보일 수 없는 삶을, ‘당신의 일이 불법이라고 당신 존재가 불법은 아니다’라고 도닥여 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에 혼자 가슴을 쓸어내렸을 것이다. 

     


선미촌에서, 수원에서 쫓겨나 이곳에 밀려온 여성들은 더는 당하지 않겠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갈 곳이 없기 때문이고, 간다고 해도 더 나은 곳이 없기 때문이다. 먹고살고 먹여 살릴 일이 그들에겐 경광봉을 휘두르며 감시하는 북파무장공작원보다, 눈을 희번덕거리며 을러대는 용역 떼거리보다, 민중의 몽둥이인 경찰보다 더 무섭고 다급한 일인 것이다. 그날, 그녀의 머리가 시멘트 바닥에 처박힌 그날, 그녀들이 맨손으로 부식된 철제 가림막 지지대에 자신의 몸을 묶다시피 한 것도 결국 호구의 무서움 때문이었다.   

   

그날, 시멘트 바닥에 머리를 처박힌 그녀는 절박했을 것이다. 장정인 남자 용역들이 이모나 엄마뻘인 가엾은 여자들에게 욕설을 퍼부어가며 가림막에 몸을 묶은 그녀들을 뜯어내려 하자, 그녀들은 거기서 죽을 각오를 했을 것이다. 싸울 도구가 몸 밖에 없는 취약한 여자들이 몸을 내던져 싸워야 하는 이 부정의한 현장이 민주사회이고 여성친화도시라는 곳에서 벌어질 수 있는 야만인가. 매일을 불안에 떨며 목숨을 걸고 싸우다 이제 부상과 스트레스에 패배해 죽어가야 하는 불행을 두고 보는 것이 시민 됨인가. 파주시는 한 여자를 죽음의 위기로 몰고 간 폭력을 당장 멈추라. 그녀가 삶으로 돌아오지 못한다면, 그것은 모두 당신들의 죄가 될 것이다. 죄는 반드시 죄과를 물으러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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