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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냥 Jun 29. 2024

뼈가 묻는다, 나는 누구인가?

<본 헌터> (한겨레출판사, 2024, 고경태) 서평 에세이


십수 년 전 외조부모 무덤을 파묘했다. 외동딸인 엄마는 당신이 죽은 후 외조부모의 묘가 버려질까 노심초사했다. 당신 생전에 부모의 묘를 정리하고 싶어 하는 자식 된 마음이었다. 윤년 손 없는 날을 잡아 엄마의 숙원을 풀었다. 부모의 유골을 수습하고서야 엄마는 안도했다.       


엄마와 동일한 마음은 아닐 테지만, 묘나 묘비는커녕 어딘가 흔적도 없이 파묻힌 뼈를 찾아 그 뼈의 주인을 찾아주려는 사람이 있다. 그야말로 ‘본 헌터’, 그는 체질인류학자이자 충북대 고고미술사학과 명예교수인 박선주다. 그는 “식민지와 전쟁, 분단시대 권위주의 정부로 이어진 대한민국의 특별한 역사가 아니었다면 나도 이 일을 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라고 ‘본 헌터’로서의 발원을 밝힌다.    



“대한민국의 특별한 역사”라는 표현은 순화되었다. 일제 식민지와 6.25로 불린 한국전쟁이 이어진 현대사는 참혹한 제노사이드의 역사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부역자’나 ‘빨갱이’로 적법한 절차 없이 처형되었다.    

  

이러한 군경에 의한 학살의 진상을 밝히고 희생된 피해자와 유족들을 위로해도 모자랄 판에, 진실화해위원회 김광동 위원장은 “침략자에 의한 희생 더 고귀…먼저 보상받아야”한다느니, “적대세력 희생자 유족, 보상받으려 거짓말”을 한다는 망언을 내뱉었다. 진실화해위원회의 본령을 망실한 작태다.     

 

민간인 학살은 1950.9.28 수복과 1951.1.4 후퇴 시 극렬했다. 수도 서울을 빼앗기고 흥남에서 철수한 것이 시민의 탓이기라도 한 듯, 죽이고 죽이고 또 죽였다. 양민을 죽여도 되는 근거가 된 <이승만 대통령 긴급 명령>은 단 한 번의 재판으로 사형을 구형했고(1950. 11. 8까지 1298명이 사형당했다), 향토방위령의 휘장을 두른 민간 자위대가 대량학살을 저질렀다.   

   

이중 가장 피해가 극심했던 지역이 충남 아산이었다.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하자 국군과 경찰은 후퇴하면서 보도연맹에 가입된 민간인을 체계적으로 살해했는데, 아산에서만 300명이 넘게 죽었다. 이때 희생된 피해자의 유골과 유해 발굴에 관한 과정을 고찰한 내용이 한겨레 신문 고경태 기자가 쓴 <본 헌터>다.      


발굴은 되었으나 아직 신분을 확인할 수 없는 유해는 이름 대신 코드를 갖는다. 아산 배방읍에서 출토된 유해는 A4-5과 A4-6, 아산 염치읍에서 발견된 유해는 새지기 2-1과 2-2, 설화산에서 발굴된 유해는 은비녀 1 등으로 불린다.   

   


발굴된 유골은 뼈의 주인에 대한 매우 적은 실마리를 주는 삐삐선, 탄피, 버클, 단추, 비녀 등과 함께 나타났다. 참혹한 심정이 되어 수많은 뼈의 출토를 보자면, 아산 민간인 학살 피해 유족이었던 고 홍세화가 던진 질문을 되돌리게 된다(홍세화는 이 사건이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흔들었다고 회고했다). “왜 그때 동네 아이들까지 싹 다 죽였을까요?” 실제 아산에서 발굴된 유해 중 10세 미만이 가장 많았다. 

      

학살 당시 3살이었던 홍세화가 던진 질문에 그의 부친은 “구원과 텃세와 이권” 때문이었다고 회한했다. 1950년 경은 해방 후 좌우가 대립하던 치열한 이념 갈등의 시대였고, 좌파는 인민  해방의 도구로 소작쟁의를 벌였다. 지주와 머슴 그리고 소작 간의 갈등구조가 첨예했고, 씨족 간 마을 간 대립도 심화됐다.   

   

식민지 시기 동안 눌려있던 피해는 제대로 된 반민족자 처벌로 매조 짓지 못한 채, 친일 부역 행위자가 친미 애국자로 변신하는 것을 방조했고, 지체된 부정의는 이념의 탈을 쓰고 일부는 사사로운 원한을 푸는 도구로 타락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만큼만 복수했다면 이토록 처참했을 리 없다. 사적인 원한과 탐욕으로 추동된 살기는 눈과 이를 빼는 것으로 성이 안 차, 그 몇십, 몇백 배 되는 피의 살육으로 번졌다.      


내가 사는 곳의 인근 도시인 고양시에도 민간인 학살 피해 ‘금정굴’ 사건이 있었다. 1950. 10.9~10.31까지 고양 경찰서 경찰관, 태극단, 치안대원 등이 금정굴에서 153명이 넘는 민간인을 집단 총살했다. 박정희 정권 시기 금정굴 유해 발굴이 이루어졌지만, 유족단체가 이적단체로 규정되고 위령비가 파괴되는 등 참담한 가해가 뒤따랐다. 유족들은 다시 한번 ‘빨갱이’ 공포를 견뎌야 했다. 짓눌린 한은 시민과 유족의 결의로 1995년 다시 재개되었다. 피맺힌 우여곡절이었다.    

  


유족의 슬픔과 분노가 겨우 아물까 싶었다. 그런데 지난해 깜짝 놀랄 사건이 벌어졌다. 고양시 의회가 태극단(선양회) 예우 및 지원 조례를 제정한 것이다. 태극단은 ‘금정굴’ 학살의 선봉에 섰던 자경단이다. 이들은 희생된 피해자를 ‘부역자’ ‘빨갱이’로 매도하고 자신들이 만행이 애국의 차원이었다고 선언했다. 설사 ‘빨갱이’고 전시라 해도, 민간인을 즉결 처형해도 된다고 믿지 않는다면 있을 수 없는 자기 합리화이며, 이는 윤석열 정권의 진실화해위원회 위원장의 망언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      


어떻게 이런 부정의가 반복되는 걸까? 명백한 자료와 증거를 통해 사실로 입증된 역사적 사실이 정권이 바뀌면 날조된 역사가 되고 학살자가 애국자가 된다. 독립운동가 홍범도 장군이 ‘빨갱이’ 논란에 휩싸이고,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돌려 말하지만 결국 ‘자발적 매춘부’라 규정하는 학자가 등장하고, 학살 자경단을 애국 집단이라 참칭한다.      


‘본 헌터’ 박선주는 억울하게 희생되어 묻힌 뼈의 이름을 돌려주기 위해 뼈를 찾는다. 학자적 호기심이 원동력이지만, 유해들이 왜 억울하게 희생되었는지를 밝히고 반성할 수 있을 때, 그들의 죽음이 사회적 존엄을 되찾고 다시는 이런 비극이 반복되지 않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희생자들의 생명을 빼앗은 사람들은 희생자들이 모르는 이방인이 아니었다. 그들의 이웃이었다. 이는 비슷한 가해와 피해의 역사가 후손을 통해 다시 반복될 수 있다는 의미이며, 우리가 다시 비인간의 시간으로 회귀할 수 있다는 무서운 경종이지만, 모두 이를 망각한다. 망각만큼 무서운 전쟁과 살육의 도구가 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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