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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냥 Jul 03. 2024

창부, 임신, 중절이 꿈이라면 미친 건가요?

(장애여성의 성과 사랑과 재생산권리 ①)  <헌치백>과 <오아시스>

이치카와 사오의 <헌치백>과 이창동 감독의 <오아시스>     


지난해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한 이치카와 사오의 <헌치백> 읽고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소설은 한 중증 장애 여성이 섹스를 실행하기 위해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는 거래를 하는 이야기다. 이토록 적나라하고 강렬하게 장애 여성의 성을 다룬 판타지가 있다니 놀라웠다. 게다 작가는 자신의 페르소나인 주인공 중증 장애 여성의 입을 빌려, “다시 태어나면 고급 창부가 되고 싶다”, “평범한 여자처럼 아이를 임신하고 중절해 보는 게 나의 꿈입니다”라고 말한다.    

  

이치카와가 인공호흡기를 달고 전동 휠체어에 탄 채, 병약해 보이는 몸이지만 형형한 눈빛으로 인터뷰한 사진이 신문에 실린 것을 보았다.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과 유사한 모습의 중증장애여성이라는 것을 보니, 그가 왜 이런 충격적인 소설을 썼는지 단박에 알아챌 수 있었다.      



사실 충격이라는 것도 그런 위험한 섹스를 한 당사자가 장애여성이 아니었다면 무엇이 그토록 놀라웠겠는가. 이는 장애여성의 성과 사랑 그리고 권리에 대해 내가 터무니없이 무심하고 무지했기 때문이다. 장애여성의 성과 사랑에 대한 콘텐츠가 거의 없다 보니, 이들은 마치 존재하지 않거나 무성애적 존재로 여겨지고, “결코 여성이 될 수 없는 사람들”로 낙인된다.     

 

비가시화된 장애 여성의 성을 전면적으로 다룬 콘텐츠는 오래전인 2002년 이창동 감독의 <오아시스>가 있다. 장애 여성의 성과 사랑을 다룬 영화로 전무후무한 듯하다. 이 영화는 내게 그때도 지금도 문제작인데, <헌치백>을 쓴 이키카와가 이를 언급해 또 한 번의 충격을 주었다. 이 영화가 무척 좋았다고 했기 때문이다. 영화의 줄거리는 대강 이렇다.   

    

주인공 공주는 뇌성마비 장애 여성으로 가족에게 소외당한 채 홀로 살아간다. 어느 날 공주는 교도소에서 출소한 종두라는 남자에게 강간당한다. 종두가 혼자 외롭게 살아가는 장애 여성 공주에게 연민과 성적인 호기심을 느껴 밤에 몰래 스며들어 공주와 섹스를 나누고 싶었다 하여 성폭행이 성관계가 될 수는 없다.      



그런데 영화의 반전은 이후 공주와 종두가 진짜 연인 사이가 되어가는 데 있다. 종두는 공주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사랑하고 공주를 어디든 데리고 다닌다. 중중 장애인으로 집이라는 감옥에 갇혀 살았던 공주에게, 종두는 강간범일지언정 집 밖 세상을 보여주고 느끼게 해 주고 무엇보다 공주의 장애를 창피해하지 않는다.   

   

아이러니하게도 강간범 종두가 장애 여성 공주를 처음으로 인간이자 여자로 대해준 유일한 남자인 것이다. 여기서 관객은 고민에 휩싸인다. 공주가 종두의 강간으로 성에 눈을 뜨고 성적인 주체가 된다는 것인데, 이는 남자들의 전형적인 강간 판타지다. 이것에만 집중하면 종두는 죽여 마땅한 놈이다.     

 

그런데 강간 이후 공주의 성과 사랑이 그의 주체적 내면의 변화로 견인된다면(이것 역시 남성 중심적 성애 관점이긴 하다), 관객은 강간범 하나를 마음으로 죽이는 걸로 복잡한 분노를 삭힐 수 없다는 점에서 일대 혼란을 겪는다. 논점을 강간 이후 둘의 관계로 옮겨가면, 공주는 분명 관계적 인간이 되어있기 때문이다.    

  

종두와 바깥세상을 구경하고 비록 차별당하더라도 사람과 부대끼는 과정은, 자신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집안에만 가두어둔 오빠가 단 한 번도 해 주지 않은 인간다운 대접이기 때문이다. 장애인이라고 세상으로 나아가고 싶지 않을 리 없고, 사람과 관계 맺고 싶지 않을 리 없다는 진실에 직면하면, 공주가 당한 비존엄에 무한한 미안함을 느끼게 된다.   

   

마침내 종두와의 관계에서 친밀감을 획득한 공주가 자신의 의지로 행한 종두와의 성관계가 오빠에게 발각되면서, 장애 여성의 성과 사랑에 대한 진실은 피해로 변질된다. 종두가 강간범으로 감옥에 가게 되는 과정에서 공주의 성적 자기결정권은 철저히 뭉개지고, 섹스도 사랑도 가족의 통제 안에서만 가능한 장애여성의 권리 박탈 상태가 드러난다.  

    


앞서 말했듯 <헌치백>의 작가 이키카와는 이창동 감독의 <오아시스>를 흥미진진하게 보았다고 했다. 복잡한 감정이 들었지만 그렇게 말한 맥락을 이해할 수 있다. 창부가 되고 싶다거나 임신과 중절을 하고 싶다는 도발 역시, 충격이지만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우생학에 근거해 장애 여성의 임신 출산 양육 등의 재생산 권리를 폭력적으로 탈취한 일본 사회를 향해 내뱉는 장애 여성 항변일 것이기 때문이다. 비장애 여성의 성과 사랑이 무수히 많은 콘텐츠로 생산될 동안 장애 여성에 대해 다루어지지 않은 것은, 일본 사회가 장애 여성을 어떻게 비가시화하고 있는지를 방증하고 있는 것이니 말이다.


장애 여성의 성과 사랑에 대해 사회의 무지와 폭력은 몇 년 전 히트한 드라마 <우영우>에서도 드러났다. 주인공 우영우는 자폐 여성이지만 동료 남성과 연애하는 사이다. 그가 자폐인이지만 뛰어난 지능으로 변호사로 활약한다는 점에서, 그의 성적 자기결정권은 의심되지 않고 보호받으며, 이를 보는 관객은 그의 연애를 응원하게 된다. 여기서 눈에 띄는 문제적 현상은, 자폐 여성을 사랑하는 남자를 좋은 일을 하는 용기 있는 존재로 바라보는 비장애인의 경향이다. 한 마디로 멀쩡한 남자가 장애 여성을 긍휼히 여겨 구제했다는 사고의 발로가 아니겠는가.     


드라마의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다른 지적 장애 여성의 경우, 지능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그의 성적 자기결정권은 매우 위태롭게 여겨진다. 지적 장애 여성이 남자를 만날 때, 사회는 그가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는 주체라는 생각을 지우고 먼저 성폭력을 의심한다. 이러한 우려는 지적 장애 여성의 부모(가족)에게서 극대화된다. 성관계가 아닌 성폭력으로 인한 피해는 오롯이 지적 장애 여성과 부모의 몫으로 남기 때문이다.      



이는 현실이지만 그렇다고 지적 장애 여성의 사랑할 권리가 쉽게 박탈되어도 되는 걸까? 정상이라고 여겨지는 비장애여성이라고 성과 사랑의 난관에 언제나 현명히 대처하는 것은 아니며 실패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이는 장애 여성의 임신 출산 양육으로 이어지는 재생산권리와 밀접히 연결된다.      


* 장애여성의 재생산권에 대한 이야기는 ②편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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