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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죽음, 다른 분노-페미니즘의 그늘

<신성한 나무의 씨앗> & <성스러운 거미> 리뷰

by 그냥


이란 종교도시 마슈하드에서 벌어진 성매매 여성 연쇄살인을 다룬 영화 <성스러운 거미>는 이란 종교와 사회가 어떻게 여성을 통제하려 드는지 폭로한다. 쿠란 어디에 성매매 여성을 죽여 이슬람 율법을 고양하라고 쓰여있는가마는, 마슈하드의 가부장은 ‘음란한’ 여성을 자의로 죽이고는 신의 뜻이라 간증한다. 이러한 종교와 가부장이 공모한 ‘페미사이드(여성살해)’는 세계 도처에서 여성의 삶을 위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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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마슈하드에서 성매매 여성이 살해될 동안, 테헤란에서는 한 젊은 여성(마흐사 아미니)이 히잡을 제대로 쓰지 않았다는 이유로 죽었다. 그것도 도덕 경찰이라 불리는 공권력이 처참히 살해했다. 2022년 9월에 벌어진 이 사건은 이란뿐 아니라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킬 정도로 충격적이었다. 이후 ‘히잡시위’가 들불처럼 번지며 이란 정권에 부담을 주었는데, 이 과정이 영화 <신성한 나무의 씨앗>에 선명히 그려졌다.



한 여성을 죽음으로 몰고 간 이란의 히잡 착용은 1979년 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자연스러운 복장 규범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누구를 위한 혁명이었을까. 언제나 그렇듯이 혁명의 수혜는 권력을 차지한 남성들이 독차지했고 여성들은 소외되고 억압당했다. 혁명 전 왕정의 권력이 여성에 의해 농단된 것이 아닌데도 여성에 대한 통제가 가장 먼저 적용되었다. 여성의 자유를 빼앗고 그 자리에 신권정치라는 이름으로 가부장 정권이 들어섰다.


신의 이름으로 여성을 통제하는 가부장 정권에서도 여성은 살아갔고 죽어갔다. 가난한 여성들은 <신성한 거미>의 여성들처럼 성매매로 호구지책을 하며 겨우겨우 살아가다 죽어갔고, 중산층이나 고위급 계층의 여성들은 가부장과 타협하며 살아갔다. 영화 <신성한 나무의 씨앗> 속 가정도 권총이 사라지는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전형적인 중산층 가정이었다. 그러나 위장된 평안을 흔드는 균열이 생기고, 그 균열이 한 가정의 사소한 가정사가 아니라는 자각으로 이어지자, 비로소 집의 여자들이 깨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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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 가정은 이란이 오랫동안 겪고 있는 경제제재로 경제가 매우 어렵다는 사실을 망각할 정도로 윤택하다. 아버지 이만(미삭 자레)은 고위층 진입이 확정된 수사 판사다. 그의 두 딸은 지금껏 여성의 규범을 잘 지키며 자라왔고, 이는 전적으로 전업주부인 엄마 나즈메(소헤일라 고레스)의 규율 덕이다.


나즈메의 손길을 받은 집은 고급 가구로 깔끔히 정돈되어 있고, 그녀가 정성스레 차려내는 음식은 풍족하다. 세상의 폭력이나 불평등에 눈 감은 그녀의 관심사는 조금 더 큰 집과 식기세척기일 정도로, 이 가정은 지금까지 이슬람의 율법이나 가부장의 권위가 전혀 도전받지 않은 듯하다.


보여지는 안온함과 달리 부모 말에 순종하듯 살아가는 딸들의 속내는 다르다. 공영방송의 프로파간다를 믿지 않는 딸들은 하루 종일 휴대폰 SNS를 통해 세상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집중한다. ‘히잡시위’가 공권력에 의해 처참히 진압되는 장면을 실시간으로 지켜보던 중, 마침내 큰 딸 레즈반(마흐사 로흐타미)의 친구가 산탄총에 맞는 위급한 사건이 생긴다. 나즈메는 응급처치를 도와주지만 가정의 안위를 위해 친구를 내보내려 한다. 이에 반대하는 딸들과의 갈등은 이만의 권총이 사라지면서 전혀 다른 국면으로 치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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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과 권력을 상징하는 권총을 잃어버린 후 이만이 겪는 패닉은 그가 총 없이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상징처럼 보여준다. 폭력에 기댄 권위주의를 상실한 그는 친구나 다름없는 동료 경찰에게 아내와 딸들의 심문을 의뢰함으로써 그가 수호하는 것이 가족이 아니라 총(권력, 남성성)이었음을 실토한다. 그리고 누구보다 이 진실을 뼈저리게 확인한 건 아내와 딸들이었다.


이만이 죄 없는 시위대를 즉결 처형하게 한 장본인이라는 사실과 그의 신상이 공개되자 그의 폭주는 점입가경으로 치닫는다. 생명의 위협을 느낀 그는 가족을 데리고 숨고, 은신처에서 권총을 숨겼다고 믿는 아내와 딸들을 시위대와 동일 선상에 놓고 심문한다. 누가 권총을 가져갔는가가 곧 누가 자신의 권위와 안위를 위협하는가로 등치해 시위대를 심문하고 사형에 처하듯 가족들을 위협하고 감금한다.



아버지의 위협과 폭력을 피해 달아난 둘째 딸 사나(세타레 말레키)가 어떻게 엄마와 언니를 구해낼 것인가 궁리하는 얼굴은 이미 신권정치에 대항한 시위대의 그것과 닮아있다. 아버지의 권위에 순종하는 듯했지만 그녀의 마음은 아버지의 권위주의에 이미 질릴 대로 질려 있었다. 머리 염색조차 허락하지 않는 아버지는 여성을 억압하는 권력의 대리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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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종일관 권총의 행방에 집중하는 영화는 이를 사나의 손에 넘김으로써 영화가 어느 쪽으로 방향을 틀지 예감하게 한다. 가부장의 도구로 가부장의 집을 부술 수 없다지만 이를 역으로 활용할 수 있음을 암시한다. 그녀의 지략으로 감금된 방에서 풀려난 나즈메와 라즈반은 압제자 가부장을 피해 달아난다. 이들이 서로를 쫓고 쫓기는 과정은 시위대와 공권력이 벌이는 싸움판을 연상시킨다.



마침내 이만의 손에 잡힌 나즈메가 짐승처럼 끌려가며 위협당하는 장면은 여성 시위대들이 당한 폭력과 연결되며 사나의 분노를 격발시킨다. 마침내 사나의 손에 부수어지는 이만의 권위는 억압당한 이란의 여성들에게 커다란 해방감을 던짐과 동시에 작은 희망과 연대감을 전달한다. 아버지를 죽여야만 아버지를 극복한다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교묘히 비틀어내면서 말이다.


나는 이란 여성들의 ‘히잡시위’를 열렬히 지지한다. 이렇게 싸워왔던 여성들의 삶이 소중하기 때문이다. 지금 읽고 있는 동일방직 여성노동자 50년 투쟁의 기록 <긴 투쟁 귀한 삶>에도 유신정권과 남성 노동자가 공모해 벌인 어마어마한 탄압을 뚫고 ‘여공’들이 얼마나 치열하고 용감하게 싸웠는지 밝힌다. 어디 이뿐인가. 유구한 여성 투쟁의 역사는 지난해 탄핵 정국에서도 그 빛을 발했다. 뜨거운 투쟁의 장에 언제나 연대한 여성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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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이런 착잡함을 밀어내기 어렵다. <성스러운 거미>에서처럼 성매매 여성이 죽었을 때에도 같은 분노로 ‘창녀 시위’가 들불처럼 번질 수 있을까. 히잡으로 여성을 가두려는 것이나 성녀와 창녀를 이분해 여성을 통제하려는 시도는 가부장과 종교가 공모한 동일한 여성 혐오에 깊이 뿌리박고 있지만, <신성한 거미>에서는 오직 한 여성만이 ‘페미사이드’와 싸웠다. 반면 히잡 사건으로 ‘빡친’ 이란 여성들의 시위대는 수천수만을 넘기며 지금까지 싸우고 있다. 이 대비는 직면해야 할 불편한 진실을 드러낸다.


내가 살고 있는 파주의 용주골 성매매 집결지에는 매일 공권력의 위협 속에 살고 있는 성매매 여성들이 있다. 공권력은 성매매 착취 파라미드의 가장 꼭대기에 있는 건물주에게는 막대한 예산을 쏟아부으면서 오갈 데 없는 종사자들에게는 한 푼도 주지 않았다. 미아리 집결지에도 하루가 멀다 하고 강제집행의 위협이 가해지고 있고, 이로 인해 살길이 막힌 한 싱글맘 여성은 급한 생활비를 사채업자에게 빌렸다 어마어마하게 불어난 빚을 갚지 못한 채 악랄한 추심을 겪다 어린 딸을 두고 목숨을 끊었다. 오늘은 그녀의 1주기 추모일이다.



이처럼 맨몸으로 쫓겨나야 하는 성매매 여성들은 공권력과 생활고로 극심한 고통 속에 놓여 있지만, 이들과 연대하는 시민들은 매우 소수다. 우리가 이 모순을 직면하고 극복하지 못하는 한, 보호받을 여성과 보호받지 못할 여성이라는 분할을 획책한 가부장과 영원히 결별하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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