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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키운 건 엄마인데, 왜 엄마를 비난해야 하나요?

<사랑 대신 투쟁 대신 복수 대신> (심미섭, 2025, 반비) 서평

by 그냥


페미니스트 청년 그룹 페미당당을 알고 있다. 단체명이 그들의 활동상과 아주 잘 어울린다고 생각해왔다. 이들이 주도한 ‘강남역 살인사건’을 추모하는 ‘거울 행동’은 내게도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젊은 여성들의 조직 없는 조직력에 놀라고 감탄하며 여성운동이 새로운 전기를 맞고 있다고 예감했다. 이 페미당당의 핵심 멤버인 심미섭의 글이 이 역시 그 다운 제목 <(사랑) 대신 (투쟁) 대신 (복수) 대신>으로 나왔기에 기쁘게 집어 들었다.


책은 저자가 지난 20대 대선 정의당 캠프에서 활동했던 117일간의 기록이다. 언뜻 공적이고 딱딱하겠거니 하겠지만, 그렇지 않다. 공식적 정당 활동 이력이 없던 저자가 대선을 돕기 위해 캠프에 합류했지만, 저마다 눈 돌아가게 바쁜 조직에서 저자에게 차근차근 일머리를 알려 주는 사람은 없었다. 눈치껏 일을 해나가는 과정에서 부딪치는 정당이라는 조직의 비합리적인 일머리는 진보라는 프레임과 모순되는 경우가 왕왕 있었고, 엠지인 저자의 워라벨 사수는 한 사람 손이라도 아쉬운 대선 캠프에선 대놓고 까이지는 않지만 일정 정도 눈엣가시였을 테다.


이런 공적 내적 갈등을 담은 에피소드는 저자의 놀라운 솔직함과 엠지스러운 해학으로 흥미롭고 진실되게 전해진다. 무엇보다 백미는 저자가 실연 후 끊임없이 데이팅 앱을 구동해 자아낸 연애 스토리인데, ‘BL’ 찜쪄먹는 서사로 독자를 당혹 어쩌면 매혹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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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공공연한 레즈비언 페미니스트다. 커밍아웃하든 아웃팅을 당하든 성소수자성을 가시화한 후 불이익을 보지 않기란 불가능하다. 계엄 정국을 일기로 기록한 황정은의 <작은 일기>에는 저자가 탄핵 집회장에서 성소수자성에 대해 발언하는 일화가 나온다. 민주주의를 지키겠다고 모인 집회장이지만 윤석열을 비판하는 데까지만 열려있는 적지 않은 시민들이 저자의 발언을 대놓고 불쾌해한다. 이 장면은 진보 연하는 민주주의 주창자들 역시 정상성 이데올로기에 갇혀있음을 명확히 보여준다.


이처럼 공기처럼 스며있는 성소수자 차별이나 혐오는 제법 쎄보이는 레즈비언 페미니스트조차 때때로 주눅 들게 만든다. 그랬으니 19대 대선에서 심상정 후보가 동성애에 반대한다는 문재인 후보에게 ‘1분 찬스’를 써 “동성애는 찬반의 문제가 아니다”라며 따끔하게 일침을 놓았을 때, 처음으로 어른을 만난 감동을 받지 않았겠는가. 당연한 메시지였는데 말이다. 고맙다는, 신세를 졌다는 이 정동은 이후 저자를 심상정 후보 대선 캠프에 연루시킨다.


그렇다고 팬심이나 봉사 정신으로 대선 캠프에 합류한 것이 아닌 바에야 대선 후보에게 백 프로 만족할 수는 없었을 터다. 중간중간 드러나는 대선 캠프의 난맥상이 심 후보와 전혀 관련 없달 수도 없는 노릇이고, 대선 캠페인 중 있었던 심 후보의 갑작스러운 잠적과 이후 행보에 적잖은 실망감을 내비치기도 한다.


책은 대선 D-DAY 하루 전까지의 기록이기에 심 후보의 실패와 이에 대한 감정은 드러나지 않는다. 지지하고 헌신한 대선 후보가 낙선했다고 그를 당선시키기 위해 애쓴 마음까지 떨어진 것은 아니다. 대선 당시 사표를 만들지 말라는 폭력적 논리로 윤석열을 막기 위해 심 후보를 찍으면 안 된다고 윽박지르던 아우성이 떠오른다. 소중하고 평등한 한 표를 그런 억지로 짓누르는 민주주의는 없다. 심 후보가 받은 적은 표는 이렇게 오작동시킨 민주주의의 결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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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스트이며 성소수자이며 활동가이며 배우는 사람 등, 저자가 해내는 여러 역할 중 내 마음을 가장 잡아끈 것은 딸이라는 위치였다. 이는 내가 그처럼 엠지인 딸이 있고, 그가 겪은 엄마와의 길항이 내 모녀 관계에도 비슷하게 전개되었기에 강하게 이입되었달 수 있다. 그가 심리 상담을 통해 받은 진단-당신의 문제는 아빠가 아니라 엄마다-에 눈물을 쏟아내며 던진 항변-나를 키운 사람은 엄마인데 아빠보다 엄마가 해원의 대상이라는 것은 불공평하다-은 구태의연한 모녀 갈등을 탈각시킬 가능성을 보이며 뭉클함을 안긴다.


저자의 엄마는 비 오는 날 우산을 가져다 달라는 딸의 부탁을 “그냥 비 맞고 와”라고 답하는 냉정한 슈퍼맘이었다. 어쩌겠는가. 미리 우산을 챙겨주지 않았음을 자책할지언정 우산을 가져다줄 수는 없는 사정인 것을. 남편은 돈벌이나 양육에 털끝만큼의 책임감도 없는 한량 글쟁이고 한 아이는 아팠고 일은 고됐다.


다행인지 ‘애늙은이’ 기질이 있던 저자는 비를 맞고 귀가하며 울지는 않았다. 엄마의 각박한 현실을 어느 정도 이해했던 것 같다. 그렇다고 엄마와 다정히 우산을 나눠 쓰고 가는 또래들이 부럽지 않기야 했겠는가. 이 쓸쓸한 동경은 슬그머니 침잠해 그의 마음 밑바닥에 엄마에 대한 복잡한 감정으로 남았을 테다.


저자처럼 우산이 없어 기어이 비를 맞고 가는 아이를 보면 딱한 마음이 드는가. 일기 예보에 신경 쓰며 아이 우산을 챙겨도 비 맞는 날은 반드시 온다. 어쩌겠는가, 맞는 수밖에. 그런데 비 좀 맞는다고 큰일이 생기가. 빗줄기에 큰일이라도 나는 양 우산을 들고 학교에 나타나 아이들을 에스코트하는 엄마들의 풍경은 단연 한국에서만 볼 수 있는 K-모성의 구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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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견 아름답다고 여겨지는 이 모성은, 우산을 가져다주는 엄마 VS 우산 안 가져다주는 엄마로 대립각을 세우고 좋은 엄마(행복한 아이) vs 나쁜 엄마(불행한 아이)라는 판결로 이어지게 만드는 강력한 여성 통제 기제다. 모성이 무슨 획일적인 빌트인 소프트웨어인가. 저마다 다른 환경과 계급과 관계 속에서 다르게 작동하기 마련이지만, 규범화된 모성이 아니라고 판단될 시 가차 없는 지탄이 쏟아진다. 내리치는 비난 중 가장 큰 타격은 단연 이 모성의 대상인 자식인 경우가 가장 많고 치명적이다.


딸애와 나도 사춘기를 겪으며 참 많이도 다퉜다. 딸애는 크면서 나의 모성을 종종 의심했고 심문했다. 아이의 불만에 내 탓이 눈곱만큼도 없던 것은 아니겠지만, 주로는 보여지는 엄마 상을 배반하는 나의 자애롭지 못함이 비난 대상이었다. 나는 위에 언급한 부분을 강력하게 어필하며 어떤 사랑도 당연한 것은 없다고 야단쳤다.


끝나지 않을 것 같던 갈등이 해결된 것은 딸애의 대오각성 덕분이었다. 어쩌다 외국에서 몇 년을 보내며 관찰하게 된 외국의 엄마들은 K-모성과 달라도 너무 달랐다. 딸애의 표현을 빌자면, 한국의 애들은 엄마를 하녀처럼 부린다. 다행이고 고맙게도 이 모순을 깨달은 딸애는 엄마를 인간으로 바라봐 주기 시작했다. 저자처럼 말이다. 그는 모녀의 상호관계성을 이렇게 말한다. “‘엄마’는 나를 키우고 나는 ‘엄마’를 키운다”고.

저자는 자신을 키운 사회적 엄마들을 생각하며 조금 더 나아간다. 엄마 대신 다정함과 격려와 카드(겨울 코트를 사주는)를 주는 이모(엄마의 절친). 용기와 정의를 가르친 페미당당의 동료들, 성소수자를 위해 ‘1분 찬스’를 써 정치의 진면목을 보여준 대선 후보, 불안해 울고 있으면 달려와 안아주는 친구들, 이 모든 여자들이 저자를 키운 엄마들이자 딸들이다. 그러므로 엄마와 딸은 언제나 마주하고 연대할 수 있다. 미진함이 있는 채로 말이다. 그의 결론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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