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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K관 1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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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예지 변호사 Sep 17. 2023

프롤로그 : K관의 탄생

학부 4학년이던 때, 학교는 갑자기 지난 3년 동안에는 찾아볼 수 없었던 재미난 교양수업들을 잔뜩 개설했다. 교양수업에 진심이었던 나는 졸업학점을 초과하면서까지 교양수업들을 열심히 들었고, 4학년 2학기까지 교양수업을 듣는 철없는(?) 졸업예정자가 되었다.


그렇게 4학년 2학기에 수강한 교양과목 ‘영화의 이해’와 ‘영상과 시나리오’는 처음 수강신청을 했을 때와는 완전히 다른 의미로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수업이 되었다.


그 수업들을 들으면서 지금의 남편을 만났기 때문이다.


동갑인 데다가 영화, 일본어, 서태지로 이어진 공통관심사 덕분에 우리는 급격히 친해졌고, 그 해 겨울 연인이 되었다. 여느 커플들 모두 그렇겠지만, 우리의 데이트는 늘 영화관이었다. 매년 CGV의 VIP가 될 정도로 우리는 영화를 좋아했다. 영화 한 편에 추억 하나가 쌓여갔다.


그렇게 3년이 조금 넘는 시간 연애를 했고, 우리는 결혼을 했다.



결혼을 할 당시 나도 남편도 가진 게 하나도 없었고, 양쪽 집에서도 경제적인 지원을 아무것도 해줄 수가 없었다. 여전히 철이 없던 우리는 그럼에도 결혼을 하기로 했고, 내가 살던 원룸에서 소꿉장난하듯 신혼생활을 시작했다.


자취를 하고 있던 터라 살림살이가 다 있어서, 결혼을 한다고 해서 뭘 준비할 것도 없었다. 남들이 들으면 웃을지 모르겠지만 수저 열 벌, 수건 열 장을 산 것이 우리가 새로 산 살림살이 전부다.


이렇게 가난한 신혼부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금을 투자한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프로젝터”와 “스크린”!!! 보통은 남편이 이런 걸 사겠다고 하면 아내는 반대하고 그래서 싸운다는데, 어떻게 된 것이 우리는 같이 신이 났다.


둘이 낑낑대며 원룸 창문 앞에 스크린을 설치하고(스크린을 걸만한 벽도 없어서, 우리는 가장 큰 창문 앞에 스크린을 설치했다) 프로젝터를 들여놓고 처음 영화를 본 날은 ‘신세계’란 이런 것이구나 싶었다. 데이트하다가 헤어지지 않아도 되니 맘껏 영화를 봤다. 내 맘대로 영화를 상영할 수 있는 우리 집 극장 “K관”은 그렇게 탄생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스피커도 바꾸고, 프로젝터도 바꾸고, 우리의 “K관”은 점점 진화했다.


그러던 어느 날 철없던 아내는 어떻게든 되겠지 하고 대책 없이 로스쿨 입학시험을 치렀는데, 덜컥 합격까지 해버렸다. 갑자기 잠시 철이 든 남편은 우리 집 “K관”의 모든 기기들을 다 팔아서 등록금을 내주었다. 그렇게 “K관”은 3년 뒤를 기약하며 잠시 폐관을 했다.


그러나 3년이 될 줄 알았던 로스쿨 생활은, 나의 투병생활 2년이 더해지면서 5년 만에야 끝이 났다. 그 5년 동안 남편은 손오공이 원기옥을 모으듯 다시 야금야금 스피커, 케이블 등등을 사 모으면서 “K관” 재개관을 준비했고, 드디어 로스쿨 졸업하고 학교 앞을 떠나 이사한 집에서 “K관”을 재개관했다.



("K관" 재개관 기념 첫 상영작은 우리 부부 최고의 영화 "Dream Girls", 그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



방 두 개짜리 집에 살면서 방 한 개를 극장으로 만들 정도로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계속 철이 없는 부부는 이번에는 극장의자까지 주문하면서 ‘1열’을 갖춘 진정한 영화관을 만들고야 말았고, 시간이 지나 조금 더 넓은 집으로 이사한 덕분에 현재는 ‘2열’까지 갖추어 함께 즐거움을 나눌 수 있는 “K관”을 만들었다.


(2열까지 갖춘 "K관".  불을 모두 끈 후 영화가 시작하는 그 순간이 참 좋다)



결혼한 지 거의 20년이 다 되어가는 동안 남편과 나 각자 좋아하는 취미가 따로 생기기도 했지만, 여전히 함께 즐기는 취미는 영화 보기다(라고 하지만 어쩌면 영화관 만들기일지도 모르겠다 하하하).


이번에 8년 만에 시스템을 업그레이드하면서 더욱 신난 우리 부부, 아예 정기적으로 ‘무비 나이트’를 갖기로 했다. 같이 볼 영화도 미리 정하고, 영화를 보고 나서는 수다도 떠는 그런 밤.



(최근 몇 번이고 다시 본 "탑건 매버릭". 볼 때마다 수다가 이어진다)



남편에게는 시간이 지나며 조금은 무덤덤해진 K관에 대한 애정을 다시 불태우자고 하면서 ‘무비 나이트’를 제안했으나, 사실은 처음 만났을 때처럼 데이트하는 기분을 내고 싶다는 속내가 숨어있다.


기왕 다짐을 한 김에 ‘무비 나이트’에서 본 영화와 우리(영화와 전혀 무관하고, 그래서 그 내용도 전혀 전문적이지 않지만, 이제는 그냥 철은 안 들기로 작정하고 그냥 행복하게 살고 있는 그냥 40대 부부)의 수다를 브런치에 연재해 보기로 한다.



K관 1열.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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