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1일부터 나는 필리핀 보홀에 와있다. 내가 속해있는 팀에서 뎁스 캠프 (한 호흡으로 깊은 수심을 내려가는 것이다)를 진행했다. 이제 다이버를 너머 강사로 강사를 너머 트레이너까지 가고자 하는 것이 나에 목표이기에 더 깊은 수심을 목표로 하고 내려가고자 했다. 나의 목표 수심은 50미터. 한 호흡으로 50미터를 가고자 했다.
난 레벨 1 다이버 일 때부터 50미터를 가고자 했고, 넷플릭스의 다큐를 보고는 100미터를 가고자 했다. (물론 호승심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평생을 하다보면 되지않을까? 그만큼의 시간과 돈과 열정을 바칠 준비가 돼있다.) 또 몸이 따라줬다. 이상하게 나는 수심을 잘 내려가는 편이었고, 이퀄도 본능적으로 프렌젤과 챠징을 했다. 20미터을 넘어 30미터, 36미터를 갔다. 이제 국내에 없는 수심을 넘어, 바다로 가야했다.
어? 이게 된다고? 하는 마음에 욕심이 생겼다. 첫날의 바다 다이빙은 사실 최악이었다. 물에 적응하느라 15미터밖에 내려가지 못했다. 바닷물은 밀도가 달라서 그런지. 환경이 달라서 그런지 어느 순간 어두워지는 바다가 너무 나도 무서웠다. 그렇게 난 바다가 무서울 사람일까. 그런 생각을 좀 했다.
잘하고 싶은데, 또 잘 안 됐다. 서핑을 인생에 비유하듯 프리다이빙 또한 인생에 비유한다고 한다. 처음의 난 서퍼로서 이해가 되지 않았다. 프리다이빙은 왜 또 인생과 같은 거야 하고 말이다.
아직 지금도 잘 모르겠다. 그냥 무리하지 않고 한 걸음씩 나야 간다는 그런 걸까? 어떤 게 인생과 닮아있는 걸까.
두 번째 날 PB를 찍었다. 39.8미터. 40미터를 갔으면, 아니 42미터를 갔으면. 그런 아쉬움이 너무나도 들었다. 내 최고 기록이었음에도 너무 화가 났다. 왜 그 0.2미터가 나를 하며 말이다. 더 화가 난 건 내가 턴을 하고 돌려다가 40미터의 캔디볼이 눈에 보였고, 그 캔디볼을 잡기 위해 더 내려갔다. 근데 이 행동이 수심 40미터에서 폐가 뒤틀어지기에 매우 위험한 다이빙이었다는 거다. 난 그동안 그렇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다음날도 다이빙에 들어갔다. 난 내 컨디션이 4번 이상의 다이빙을 하지 못할걸 알았다. 그래서 그냥 줄을 빨리 내려달라고 했다. 워밍업으로 컨디션과 체력을 소모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워밍업을 했고, 버디를 포함한 5번의 다이빙에서 32미터를 가고 출수했다.
그 다섯 번째 다이빙에서 나의 강사님인 이평님이 그렇게 말했다. "욕심부리지 마. 분명 캔디볼이 보일 거야. 그래도 이퀄이 안되면 그냥 올라와. 오늘도 무리하면 앞으로 네게 다이빙은 없는 거야"
라고 진심 어린 눈빛으로 내게 말씀해 주셨다. 그 단호한 말에 걱정이 묻어있었기에, 진심이 섞였다. 그래. 할 수 있는 만큼 내려가자 하는 마음으로 내려갔다. 32미터에 도착하고 이 이상 내려가면 내 목이 더 상하겠다는 게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그렇게 그날의 다이빙을 마지막으로 출수했다.
기도 스크레치가 난 줄 알았는데 모든 강사님들이 폐포손상이라 입모아 말했다. 이평님은 아무것도 하지 말고 물에도 들어가지 말라 말했다.
물에 들어가지 말라는 말에 "서핑은 해도 돼요?"라고 말했다가 "그냥 일어나서 밥 먹고 다시 자 "라는 말을 들었다.
절망적이었다. 내 목표 수심이 있는데, 더 할 수 있을 거 같은데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하지만 나중에 다른 강사님들과 교류를 해보니, 그도 그럴게 다른 강사님들은 이 캠프를 위해 몇 주 내지 몇 개월을 준비해왔다고 한다. 한 강사님은 이번 캠프를 위해 18킬로를 감량하기도 했다. 거기다 1년이 넘게 다이빙을 해왔던 숙련된 분들이기도 했고, 물질 해루질을 13간 해왔던 강사님도 있다.
그럼 난 뭘까? 난 뭘 노력했는가를 되돌아봤을 때 아무 노력도 하지 않았다. 한 달 정도의 시간 동안 풀장에 적당히 나갔고, 건강문제로 수면장애에 음식 섭취에도 어려움도 좀 겪었었다. 약에 취해 체중과 감량 생각은 하지 않고 아이스크림 7개를 먹은 채 잠들기도 했다.
다이빙컴(수심 및 다이빙타임을 체크하는 시계)을 처음 써봤고, 슈트도 2번째 입었으며 나의 중성부력이 몇 미터 인지도. 내가 여기서 무얼 할지도 모른 채 그저 내 고집만을 부리기 위해 온 듯했다. CO2테이블도 (이산화탄소 저항)을 이겨내기 위한 일종의 훈련) 돌리지 않음 채 왔으니 말이다.
미숙하고, 어리석었다. 내 건강은 물론, 남이 나를 믿을만한 버디로도 생각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거기에 내가 다이빙을 할 때 내 버디가 되기를 거절할 수도 있는 상황이기도 했다.
난 또 다이빙에서 나를 무리하게 몰아붙이고 있었다. 이 캠프가 끝나고, 부산 친구집에서 여독을 풀고 있는 지금에서야 그걸 깨달았다. 나의 다이빙도 나의 인생의 형태와 닮아있다는 걸 말이다. 누군가는 휴식을 가져가면서 천천히 조금씩 성장을 해간다. 누군가는 자신의 목적이 무엇인가에 맞춰 그 형태에 다이빙을 반죽해 간다. 누군가는 하나의 복수이기도 했다. 모두가 다른 형태의 다이빙을 가지고 있었다.
그럼 난 어떤 형태의 다이빙을 가지고 있는가? 사실 말하자면 내게 다이빙은 도파민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도파민일 수밖에 없었다. 또다시 무기력에 빠지고, 잔잔한 수영장에서 수영을 했다. 수영도 이젠 영 늘지 않는 듯 보였다. 날이 추워져 서핑도 못한다. 겨울 장비를 장만해야 한다. 하지만 늦가을서핑에서 뼈가 시린 추위를 겪고 나니 선뜻 바다에 들어가지 못했다. 내가 눈을 돌린 곳은 프리다이빙이었다. 단계별로 클리어해야 할 스킬들과 기술, 수치가 있고, 그 스킬을 마스터하면 레벨업이 된다. 그 레벨 업된 순간순간마다 도파민이 터져 나왔고 도파민에 절여져 자연스레 더 높은 곳으로 가서 더 잘하고 싶다는 하나의 욕심이 저 아래서 쏟고 쳐 왔다. "엄청 잘해서 이 즐거움을 남들과 나누고 싶어!!!!" 딱 이 마음이었다. 레벨이 높아지고 내가 더 잘해지니 사람들이 내게 물어본다. 그럼 난 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된다. 누군가 나를 필요하는 삶이 너무 좋다. 도움이 되고 싶다. 내가 잘하면 도움이 된다. 그게 내가 프리다이빙을 잘하고 싶어 하는 이유가 아닐까. 결국 나의 인생 모토와 프리다이빙의 모토가 같았다. 이로써 내 삶에 한 가지의 스포츠가 더 녹아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