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곽민지 Aug 04. 2020

그렇다더라, 「두 명의 애인과 삽니다」

"너, 그 책 읽으면 폴리아모리스트 되는 거 아냐?"




홍승은 작가님의 현재 진행형 폴리아모리 에세이 「두 명의 애인과 니다」를 읽었다. 폴리아모리 이야기를 책으로 내다니 싶었다가 책을 다 읽었을 때쯤엔 오히려 책으로, 단행본으로 마주해야 할 소재가 아니었을까 생각하게 되었다. 당사자도 오랜 시간을 거쳐 만들고 받아들인 세계를 짧은 말이나 글로 이해하기에는 어려운 지점이 많을 테니까.

읽는 내내 스스로 알게 된 나의 일면은, 자꾸 이 연애를 납득해보려고 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러면서 이랬다 저랬다 혼란이 왔다. '맞아, 이렇게 들으니 이럴 수 있네.' 했다가 '거봐, 이게 이렇게 쉽게 될 리가 없다니깐.' 했다가 '와, 정말 다른 모양의 사랑인 게 맞네.' 했다가, '거봐. 상처 받는 사람 나온다니까?'... 혼자 머리를 싸매며 읽다가 문득 내가 뭘 하고 있는 거지 싶은 생각이 들었다. 개인이 자기 삶을 말하는데 왜 내 의견을 자꾸 정리하는 거지? 타인이 하고 있는 연애의 대상이나 방식이 본인에게 납득돼야 한다는 생각은 얼마나 오만한가. 합의된 둘 혹은 둘 이상 사람들의 세계에 대해 판정을 내리는 것은 그 발상부터 얼마나 차별적인가. 정상 연애로 인정받지 못하는 관계의 서사를 들어보겠다고 책을 사놓고, 내게 생소한 이야기가 생생히 눈 앞에 펼쳐지니까 이걸 머릿속에서 처리할 프로세스를 꼬인 채 찾기 시작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그랬을 땐 그렇게 생각하지 말고 그저 덤덤하게 좀 들을 줄도 알라고 해놓고선, 결국 그 말도 내가 규정한 정상 연애에 포함되는 것을 남이 이해 못할 때에나 유효한 생각이었던 거다.


누군가 자신이 폴리아모리스트라고 하는 것이 모두가 폴리아모리스트가 돼야 하며 이게 독점 연애보다 우월하다는 의미가 아닌데, 익숙하지 않은 모양의 삶을 접했을 때 그 불안감을 핑계로 사회에서 없어져야 할 바이러스 취급하는 일이 얼마나 많던가. 폴리아모리가 퀴어의 범주에 들어가겠냐는 질문이 책 중간에 있었는데, 퀴어냐 아니냐를 떠나 어차피 사회와 미디어가 모범답안이라고 보여준 작은 원이 내 스타일이 아니라고 말한 모든 사람들이 처하는 상황은 비슷비슷하다. 내 삶의 모양을 드러내면 공격을 받고, 내가 누구인지 말하는 것이 남의 삶도 그렇게 계몽하려는 것이 아니냐는 눈총을 받고, 그래서 지워야 할 존재로 취급을 받고.

폴리아모리를 하는 사람이 100명이라면 100가지 다른 방식이 있고, 애초에 그 100가지의 관계를 폴리아모리라고 명명하는 것도 어찌 보면 편의에 의한 것이며, "폴리아모리 내가 영화에서 봤는데 결국 이런 사람인 거잖아"라고 한다면 그건 그 영화 한정이라는 것. 독점 이성애에서도 "연애"의 정의는 각자가 만든 세계에 따라 달라지는 건데, 다른 방식의 관계를 말할 때는 극소수의 예시를 보면서 저게 백과사전 같은 샘플이라 생각하고 공격할 구멍을 찾는 건 결국 혐오와 얼마나 다를까? 「두 명의 애인과 삽니다」에서 보여주는 이 주인공들 한정 폴리아모리에서 가장 중요한 사랑의 코어는 평등이고 다자연애보다 비독점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같아보이)ㄴ다. 물론 폴리아모리가 소수인 탓에 한동안은 이 사람들이 강제로 폴리아모리의 국가대표 혹은 샘플로 내몰려 니들의 폴리아모리는 틀렸다거나 이들을 기준으로 다른 폴리아모리스트가 공격받거나 하겠지만, 그걸 다 예측하고도 용기 내어 내 이야기를 내놓는 스토리텔러들을 나는 좋아한다.

이 책 주인공들이 하는 연애의 방식은 폴리아모리 하나로 좁혀지지 않는다. 동거하는 연애, 서로의 일이나 거취에 함부로 개입하지 않는 연애, 반려동물을 함께 양육하는 연애 등 다른 라벨도 충분히 붙일 수 있다. 관계와 사람은 무한한 다면체고 나도 어떻게 구르고 멈추느냐에 따라 이해되지 않는 소수성을 띠기도 하고 사회의 룰과 정상성에 사로잡힌 사람으로 보이기도 한다.

아마 그래서 이 책을 봤나보다. 결혼 안 하는 이야기 좀 했다고, 외형을 위한 다이어트를 그만두었다고, 봉 좀 탄다고, 타투 좀 있다고 온갖 얘기를 듣다 보니 그 얘기들이 다 피곤해서. 표준이 아닌 일면을 간직하고 있으면 그걸 삭제하라고 난리인 세상에서 내 눈에도 엄청나게 희한한 사람들 이야기가 나왔을 때 그걸 구경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

홍승은 님의 저자 소개란에 이런 말이 나온다. "함께 해방될 수 없다면 내 자유는 허상에 불과하다는 걸 안다." 당신이 당신 눈에 익숙하지 않은 것을 공격해도 된다고 믿고 그 말을 뱉을 때, 어떤 식으로든 희귀한 면을 품고 있는 우리 모두는 반드시 잠재적 타깃이 되고 우리 모두는 사회가 정한 대로 살지 않으면 큰일 난다는 공포를 이식받는다. 옷이, 스타일이, 말투가, 직업이, 결혼이, 비혼이, 출산이, 비출산이 그런 식으로 내 의지인지 모른 채 결정되기도 한다. 내 지인이 그 공격을 받고 있으면 더 직접적인 스플래쉬 대미지가 온다. 내가 직접 받게 된다면 말할 것도 없고.

정상 연애가 아닌 세계의 이야기를 전하는 잡지 「계간 홀로」, 동성부부의 결혼 이야기를 담은 「언니 나랑 결혼할래요?」, 축구하는 여자들의 이야기를 담은 김혼비 작가님의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 정도는 달라도 어쨌든 특이하거나 혹은 이상한, 어딘가 이질적이라 지적받는 내 삶의 일면을 꺼내어놓는 사람들 모두에게 응원을 보낸다. 나와 같은 성향의 특이성은 아니라도, 다양한 이야기가 세상에 던져질수록 나 자신도 나로서 받아들여질 거라는 희망에 찬다. 먹는 밥도 더 맛있고, 잠도 더 달다.

이 책을 읽고 내 새끼가 폴리아모리스트가 되면 어쩌지? 싶다면 언젠가 토크 행사에서 이야기한 말을 다시 돌려드린다. 콘텐츠 하나로 연애의 방향이 정해질 거라면 뭐가 걱정이에요? 세상은 이성애 독점 연애 서사로 넘쳐나는데. 티비 틀고 아무거나 보여주세요.


「두 명의 애인과 살고 있습니다」 253p


매거진의 이전글 마스크가 건넨 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