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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ya Jun 15. 2023

기록하기로 했습니다.

김신지



기록은 두리뭉실한 우리의 모양을 또렷하게 해 준다. 나는 특히 기록의 그런 점을 좋아한다. 분명 뭘 좋아하고, 싫어하는데 정확히 그게 뭔지 모를 때가 많다. 그럴 때 우리가 기록하는 글과 사진은 그런 생각을 꽤 그럴싸한 모양으로 다듬는 역할을 한다. 


얼마 전에 돌탑에 대한 작은 글을 쓴 적이 있다. 돌탑을 보면 다른 사람이 쌓아둔 많은 소원 위에 더 큰 소원을 쌓곤 했다는 내용이다. 글을 쓰다 보니 돌을 쌓을 때는 생각하지 못했던 감정과 질문들이 떠올랐다. 항상 돌탑을 보면 멀리서라도 돌을 주워와서 소원을 빌곤 했는데 정작 그 소원이 이뤄진지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기록은 단순히 나의 시간을 쌓아두는 것뿐만 아니라 내가 생각한 지도 몰랐던, 또 그때는 생각하지 못했던 생각들로 살을 붙이고 다듬어 그날과 나를 또렷하게 만든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책을 읽을 때 밑줄 쳐둔 문장을 한번 손으로 필사하고, 다시 한번 컴퓨터로 옮겨 적으면서 내 느낀 점을 정리해 두는 편이다. 그럼 그 문장들이 일상에서 문득 떠오르기도 하고 책에 대한 기억이 오래 남는 편이다. 일기를 쓰거나 사진을 찍는 일은 나의 하루를 다시 한번 필사하는 것과 비슷하다. 오늘 하루 좋았던 문장과 오래 기억하고 싶은 문장을 다시 한번 적다 보면 그때의 계절의 모양이 생기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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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에 관한 책을 읽으면 기록을 하고 싶어 진다. <기록의 쓸모>를 처음 읽고 기록하기로 다짐을 하고 (역시 기록은 다짐이 필요하다.) 계절마다 사진을 정리해 두고, 좋아하는 책의 문장을 쌓아두다 보니 어느새 블로그에 글이 100개 정도 쌓였다. 그만큼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도 뚜렷해졌다. <기록하기로 했습니다.>를 읽다 보니 생각만 해두고 기록하지 않았던 것들이 불쑥 생각났다. 여름에 찍어둔 나만의 열매 도감, 구상만 하다 그만둔 여러 사진집, 일주일에 작은 꼬집글 쓰기 등... 여전히 기록하지 않은 일이 기록하는 일이 편하지만 다시 기록하기를 다짐한다!


그런데 가끔은 기록이 너무 크게 느껴질 때가 있다. 매일 쓰던 일기를 하루라도 안 쓰면 초조하고, 좋은 책에 대한 기록을 남겨두지 않으면 괜히 찜찜하다. 그렇게 쌓인 찜찜함이 한가득이다! 하지만 책에 나온 모든 문장을 기억할 수 없듯이 모든 날을 기억하고 기록할 수는 없다. 자주 실패하고, 멈춰도 그 작은 파편들이 모여 나의 모양을 완성할 것이라고 믿으며 오늘도 기록하기로 했다.





오랫동안 한 자리에 쌓여온 시간에 감탄하는 것. 그 시간을 볼 수 있도록 남겨둔 한 사람의 성실함에 감탄하는 것. 일기의 대단한 점은 아무래도 여기에 있는 것 같아요. 하루치는 시시하지만 1년이 되면 귀해지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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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드를 훑어보면 내가 어느 계절에 어떤 순간을 좋아했는지, 언제 조그만 기쁨을 느끼며 웃었는지 선명히 보입니다. 그걸 알고 있다는 건 중요한 일이에요. 한 사람의 어른으로서 자기를 챙기며 산다는 건, 스스로 조금 더 자주 웃게 해주는 일일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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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좋아진 것도 아니고 예전부터 좋아하던 것들입니다. 하지만 단순히 적어두는 것만으로, 그 순간들은 제 인생에서 좀 더 선명해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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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삶을 기록하는 건 멋진 일일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나로 살아서 할 수 있는 기록이자, 나밖에 할 수 없는 기록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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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는 늘 못된 속을 뒤집어 보여주듯이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고 말했지만, 지금은 종종 생각합니다. 나는 결코 따라잡지 못할 거라고요. 어떻게 살아도 인숙씨만큼은 살아내지 못할 거예요.



<기록하기로 했습니다. - 김신지> 23.06.11 완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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