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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ya May 15. 2023

고요한 포옹

박연준



시인의 글은 '처럼의 글'이다. 남들과는 다르게 보기 때문일까, 아니면 너무 많은 것이 겹쳐 보여서일까. 그들 눈에는 나무 한 그루에도 인생이, 꽃 한 송이에도 사랑이 피나보다. 그래서 시인의 글을 사랑한다. 시인의 눈으로 걸으면 길마다 기쁨이, 슬픔이, 기특함이 주렁주렁이다. 


나의 처럼의 문장들


요즘 다시 생각이 많다. 생각이 많다는 것은 생각이 적당하지 않다는 것. 적당치 않다는 것은 남은 것들이 부유한다는 것이다. 탁한 호수처럼. 나도 맑은 바다이고 싶다. 부유하는 것들 아래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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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 숨기는 마음이라면 봄은 드러내는 마음이다. 눈이 오면 나무의 팻말은 숨는다. 가지가 흔들리던 소리도, 겨우내 시들었던 잎들도. 봄이 오면 꽃잎은 선생님에게 이름이 불리고 싶은 아이 같다. "나 벚나무예요." "나 산수유나무예요." 하고 꽃들은 말한다. 봄이 철 없이 드러낸 마음은 여름의 녹음 속에 숨는다. 또 가을에 드러난 마음은 겨울에 내리는 눈 밑에 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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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이 크게 뛰면 그 소리에 감정들도 놀라 자기 자리를 못 찾나 봐. 가라앉은 감정들도 꼭꼭 숨겨두었던 기억들도 이리저리 부유해. 사랑의 자리에 분노가, 노여움이 있어야 할 자리에 역겨움이 있었어. 마치 거기가 원래 자기 자리였던 것처럼. 어쩌면 가장 증오하는 것은 가장 사랑했던 것이었을지도 몰라.




모서리를 사랑하는 고양이에게 물었다 / 너는 땅을 찢고 태어난 초록도 아니고 / 가지 끝에서 터져 나오는 열매도 아니지 / 공룡처럼 알을 깨고 나오지도 않았어 / 너는 어떻게 우리에게 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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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은 알지 못함에서 기인한다. 두려움은 안개와 같다. 쉽게 퍼지고 덩치를 불리며 사람을 아득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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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는 직접적이고 유용한 표현 수단이지만, 그 때문에 한계를 가진다. 미술작품은 이미지와 형상만으로 의미를 확장하거나 의미 너머로 월담할 수 있다. 쉽고 고요하며 순식간에 다른 세계로 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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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하는 사람은 누구보다 잘하고 못할 수가 없다. 딱 자기만큼(정확히는 자기 안목과 성실함만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내가 연연해야 할 건 나, 내 삶, 내 생각이다. 너, 네 삶, 네 생각은 다른 차원에서 생각할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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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고 싶은 나와 되기 쉬운 나 사이에서 균형 잡기, 요새 내가 열중하는 공부다. 어려운 건 언제나 되고 싶은 나다.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 어떻게 살고 싶은가. 이 질문이 계속 공부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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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사랑하는 사람치고 별 볼 일 없는 사람은 없다. 책을 읽는 일은 남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일, 다른 존재에 관심을 가지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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펼쳐진 책은 날아가는 책이다. 머릿속으로, 공중 위로, 다른 세상으로. 펼쳐진 책은 힘이 세다. 힘이 세야 날아갈 수 있다. 꽂혀 있는 책은 기도하는 책이다. 읽어주소서. 쌓여 있는 책은 잠든 책이다. 포개져 잠든 동물 새끼처럼 무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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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술을 마시는 이유는 지금 있는 자리에서 한두 뼘 올라선 기분을 느끼고 싶어서다. 공중에 발이 약간 떠있는 기분. 내 문제가 내 문제만은 아니기를 바라는 기분! 기분에도 꼭지가 있다면 술은 잠긴 꼭지를 반 바퀴 정도 풀어준다. 잠겨 있던 기분은 느릿느릿 놓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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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을 다치는 이유는 손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마음을 다치는 이유는 마음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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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이 '사건'으로 지나간 후, 그다음 여진처럼 밀려드는 자잘한 슬픔(혹은 개켜진 슬픔)은 타인과 나눌 수 있다. 감당하기 버거운 슬픔 앞에서라면 한사코 혼자이고 싶다.



<고요한 포옹 - 박연준> 23.05.14 완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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