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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귤선생님 Sep 27. 2024

솔직함 VS 무례함

  친한 친구와 술을 마시다가 정치 얘기가 나왔다. 종교, 정치, 지역감정이라는 세 가지 이야기는 암묵적으로 동의된 금기사항인데도 불구하고 그놈의 술이 들어가서인지 아니면 나이가 들어서인지 우리 둘 다 이성적이거나 논리적인 상황 판단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그만 각자의 정치 성향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평소에는 그렇게 서로 위해주던 사이었는데 정치 이야기에서는 한 발자국도 양보하지 않고 마치 광신도가 된 것 마냥 각자의 입장을 고수했다. 관계를 쌓는데 20년이 걸렸다면 무너뜨리는 데는 5분도 걸리지 않는다는 말처럼 서로에게 무례함을 내보이면서 십 년 넘은 우정이 한순간에 사라지는 걸 느꼈다. 그리고 한동안 우리는 연락을 하지 않았다. 아무리 바쁘더라도 서로의 생일에 축하메시지와 함께 선물 쿠폰을 보내주곤 했던 사이었지만 그 해 우리는 서로의 생일을 그냥 지나쳐 갔다. 지금은 각자 살고 있는 곳이 멀다는 이유로 명절 때만 가끔 보는 사이지만 이전처럼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그렇다. 우리는 이제 만나도 서로 즐겁지 않다.


  은퇴를 앞둔 선배 선생님과 함께 학교 식당에서 마주 보고 점심을 먹은 적이 있었다. 내 옆에는 30대 선생님이 앉아있었는데 밥을 먹다가 뜬금없이 선배 선생님이 "00 선생님 서른 넘었지? 그럼 빨리 결혼해야지. 여자가 서른 넘으면 괜찮은 남자 찾기 어려워. 얼른 결혼해서 아이도 낳고 그래야지. 요즘은 아이 낳는 사람이 국가 유공자라고도 하잖아"라는 말을 하는 게 아닌가? 후배 선생님은 "아, 네"라고 대답하고는 급히 밥을 먹는 듯하다가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나 나갔다. 후배 선생님이 나간 이후에도 선배 선생님은 여자가 당연히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아야 하는 거 아니냐면서 인생 선배로서 아끼는 마음에 조언을 한 거라고 말을 이어 나갔다. 나는 그 어떤 반박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듣고만 있었다.


 우연히 어떤 블로그에서 이런 글을 읽었다.

20대엔 무례함을 당하면 반격했고, 30대엔 왜 당신이 무례한가를 설명하려 했다. 

하지만 40대가 된 이후론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는다. 

20대엔 무례가 성격 탓인 줄 알았고, 30대에는 문화적 차이인 줄 알았지만,

이제는 무례가 무식과 낮은 자존감 때문이란 걸 알았기 때문이다.


  나는 이 글처럼 무례함에 대해 반박하지 않고 살아왔다. 친구와의 우정에 금이 간 일 때문이기도 했지만, 호박에 줄 긋는다고 수박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며 무례함에 대한 대응으로 '회피'를 선택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개그우먼 김숙이 출현한 티브이 프로그램을 보게 되었다. 그때 다른 출현자가 김숙에게 "얼굴이 남상으로 변하는 거지"라고 말하자 "어? 상처 주네?"라고 받아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김숙이 말한 그 짧은 한마디로 나는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동안 무례함에 대해 회피했던 게 좋은 방법은 아닐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만약 내가 김숙이었다면, "그래요? 그런 말 종종 들어요."라고 대답하거나 아니면 "그래도 사람처럼은 생겼다는 의미죠?"라는 웃기지도 않는 자기 비하적인 농담으로 응답했을 수도 있다. 무례함에 대해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넘겨 버리는 내 모습이 상상이 되자 기분이 좋지 않았다. 누군가의 말에 불쾌한 감정을 내보이면 마치 내가 뒤끝 있는 사람으로 여겨질까 봐 그게 싫었던 것도 같다. 별것도 아닌 것에 죽자고 달려드는, 흔히 말하는 '불편러'가 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한 예능에서 오은영박사가 출연자에게 "솔직함 속에 무례함이라는 가시가 있다"라고 충고한 적이 있었다. 가시는 찔릴 수 있고 상처가 될 수 있다. 그리고 나는 더 이상 찔린 상처를 가리며 무례함에 회피하고 싶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방금 그 말 되게 무례했어요. 기분 나빠요"라고 말할 용기는 아직 없지만 "아, 그 말은 좀 상처인데요"라고 받아칠 수 있는 당당함을 키우고 싶다. 열심히 연습하다 보면 언젠가 나도 드라마 굿파트너의 차은경 변호사처럼 어깨를 죽 펴고 상대방을 지긋히 바라보면서 "지금 이거, 선 넘은 거예요. 빨리 사과하세요"라고 말할 수 있는 날이 오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표지사진: 차건우 작가의 작품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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