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8 비스트로, 그리고 디종의 밤
디종에서 보내는 두 번째 밤, 나는 디종 구시가지에 있는 작은 비스트로로 향했다.
프랑스에서 비스트로는 레스토랑에 비해 부담 없는 가격으로 와인과 음식을 함께 즐길 수 있는 식당을 말하는데, 이날 방문한 Dr.Wine은 와인샵과 식당을 함께 운영하는 곳이라 좋은 가격에 좋은 와인을 마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으로 무작정 찾아갔다.
구글맵으로 찍어보니 숙소에서 비스트로까지는 도보로 13분.
길을 나서기 시작할 때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는데, 디종의 밤 풍경은 촉촉하게 빛나고 있었다. 까만 밤하늘 아래에는 상아색 건물들이 눈부시게 반짝이고 있었고 눈에 보이는 모든 사람이 행복한 표정이었다.
아, 낭만이다!
나는 에너지로 가득 찬 광장을 지나 곧 비스트로 입구에 도착했다. 직원으로 보이는 남자에게 눈빛을 보내본다. 저녁 영업이 이제 막 시작해서 그런지 무척 분주해 보인다.
남자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내게로 다가오면서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윙크를 날린다.
You’re definitely Yoon, right?
그러고 보니 이번 여행에서 내 동행을 제외하고는 동양인을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나는 안내 받은 자리에 앉아 와인 리스트를 먼저 펼쳐본다. 두께는 그리 두껍지 않았는데 좋은 와인들이 제법 있었다.
나는 그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와인 한 병과 세트 요리를 주문하고는 비스트로 내부를 둘러본다. 세월이 흔적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바닥과 벽면, 그리고 묘하게 어울리는 빈티지 철제 테이블과 소품들.
어느새 손님으로 빈틈없이 채워진 비스트로는 웃음소리와 맛있는 음식 냄새로 가득 차 있었다.
2012 Domaine Dujac Morey-Saint-Denis 1er Cru
처음 마셔보는 도멘 뒤작에서는 엄청나게 응축된 빨간 향이 났다. 그 향에는 말린 체리와 라즈베리가 있었고, 장미꽃잎도 있었다. 뒤작은 정말 강건하면서도 두께감 있는 구조의 피노누아구나, 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여리여리한 빨간 맛이 여운으로 스친다.
이건 딸기일까?
매혹적이면서도 황홀한 한 모금을 마무리하자 비스트로의 음식이 하나둘씩 나왔다. 처음으로 나온 요리는 불고기에 일본식 소바를 버무린 느낌이었다. 무언가 반갑고 익숙한 맛이었는데 와인과도 제법 잘 어울렸다. 그리고 돼지고기, 송아지고기를 구워낸 요리들이 이어서 나왔다. 특별한 것 없는 맛이었지만 와인에 안주 삼아 먹기 좋은 음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음식을 먹는 동안 도멘 뒤작의 모레생드니는 점점 밝은 느낌으로 변해갔다. 타닌은 점점 동글동글해지는 느낌이 들었고 빨간 맛은 시간을 거슬러 신선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내일은 또 어떤 맛일까, 나는 반 정도 남은 와인병을 들어 직원에게 보이며 가져가서 마시겠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미리 준비한 리푸어 마개로 입구를 막았다.
한 손에 도멘 뒤작을 들고는 디종의 밤거리를 다시 마주한다. 시간이 제법 흐른 것 같은데 사람들의 열기는 그대로다.
디종의 밤은 예상보다 길고 반짝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