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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rape Jul 29. 2023

먹어야 힘이 나지

돼지고기 수육

토요일인 오늘. 책을 들고 좋아하는 카페로 갔다. 그야말로 시간을 내서 책을 읽으러. 창가 쪽 자리에 앉아 책을 읽다가, 바깥을 보며 멍 때리다가. 나름 책의 내용에 집중하다가 응원과 위로를 얻던 중. 또 하나 하고 싶은 게 생각났다.


'맛있는 걸 만들어 먹어야겠어.'


뭔가 깔끔하고 담백한 걸 먹고 싶었다. 처음에는 콩국수를 떠올렸는데, 아빠가 먼저 저녁 메뉴로 콩국수를 제안해서 깜짝. 부족한 재료를 사러 나가면서 콩국수와 어울릴 메뉴가 또 무엇이 있을지 고민했다. 그렇게 흘러 흘러 떠오른 메뉴. 바로 돼지고기 수육이었다.



마트에 가서 괜스레 정육 코너를 기웃거리니 직원분이 오늘 할인을 한다며 수육을 해보는 게 어떻겠냐고 물어왔다. 아니, 이 분은 또 내 생각을 어떻게 알았지? 콩국수를 먼저 제안한 아빠도 그렇고. 그렇게 나는 콩국수와 돼지고기 수육에 필요한 재료들을 사서 돌아왔다. 처음에는 삼겹살 부위를 생각했다가, 정육점 직원분의 추천으로 목살 부위를 쓰기로 했다.


수육에는 시간이 걸리기에 오자마자 바로 준비를 했다. 된장, 다진 마늘, 소주를 섞어 소스를 만든 다음 통목살에 골고루 발라준다. 그리고 30분 정도 재워둔다. 그 사이 고기 잡내도 없어지고 숙성도 된다고. 다음으로는 채소를 손질했다. 양파와 대파를 채 썰어 준비했다.



내가 시도한 조리 방식은 무수분. 냄비에 채소를 깐 다음 고기를 올리고, 다시 채소를 더해 뚜껑을 덮고 약불로 한 시간 가까이 오래 끓이는 것이다. 나는 이전에 선물 받은 캄보디아산 백후추도 함께 넣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서 채소에서 수분이 나오고, 고기에서는 기름이 빠져 담백한 수육이 완성되는 방식.



수육을 삶는 동안, 내게 인내심이 부족하다는 것을 새삼 알았다. 잘 되고 있나, 타지는 않았나. 수육 냄비를 몇 번이나 들여다봤는지. 그 사이 텔레비전이라도 편히 봐도 될 텐데. 온 신경은 가스레인지 약불 위 수육 냄비에.


그렇게 약 한 시간이 지나고. 노릇한 색깔로 물든 돼지고기의 한쪽 귀퉁이를 썰어보았다. 부들부들 촉촉. 무사히 완성!



조심조심 나머지 고기를 썰었다. 칼이 무뎠는지 깔끔하게 썰리지 않아 속상했지만. 이 정도면 선방이었다. 알배추 몇 장도 씻어 함께 접시에 담았다. 고기에 된장 소스가 배어 별도의 쌈장을 곁들이거나 하지 않아도 어느 정도 간이 맞았다. 그렇게 콩국수와 함께 배부르게 저녁을 먹었다.


그동안 점심 도시락을 싸느라 간단한 조리를 한 것을 제외하고, 이렇게 요리를 해본 적이 얼마만인지. 새로 일을 시작하며 적응하느라, 고민하느라 에너지를 쓴 탓에 틈만 나면 쉬기 바빴다. 지난 3개월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새로운 루틴이 시작되어 하루마다 시간이 쏜살같이 지나갔다. 정신을 차려보면 어느새 샤워 후 머리를 말리고 있었다. 매일 저녁 샤워를 하고 머리를 말릴 즈음에야 감각이 살아났나 보다.


그러던 어느 날, 이렇게 아무것도 못하고 있는 내 모습이 싫었다. '일 때문에 내가 하고 싶은 걸 못한다고?' 뭔가 억울했다. 그동안 힘이 없어 글을 못 쓰고 있었다면, 지금은 글을 써야 힘을 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하고 싶은 걸 해야 나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아.'


돼지고기 수육을 만들어 먹은 것도, 지금 오랜만에 브런치에 글을 쓰는 것도 이런 비장한 마음이 들어서다.


어느 하루는 기분 전환을 하고 싶어서 카페에 나왔다고 하자, 친구가 내게 말했다. '신나게 찬양하면 신이 난다'라고. 사람이니까 기분에 따라 움직일 수 있다. 하지만 나쁜 기분이라면 거기에 마냥 사로잡혀 있을 수 없다. 무언가 작은 시도로. 다시 신나질 수 있도록 나를 움직여야 한다.


그렇게 나는 오늘 책을 읽고, 또 요리를 했다. 처음 시도하다시피 한 요리가 나름 성공했을 때, 또 예쁘게 접시에 담아 사진을 찍을 때 뿌듯했다. 남이 보는 내가 아닌, 나 스스로에게 집중하고 힘을 북돋워준 날.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대해 여전히 겁이 나곤 하지만. 이렇게 뭐라도 해봐야지. 뭐라도 하면 어떻게든 되니까. 힘이 나야 먹는 것보다, 먹어야 힘이 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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