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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rape Mar 07. 2023

하늘만 비추는 바다

제주도에서 받은 선물

약 2년 만에 타는 비행기였다. 목적지는 제주도. 공항 내 공간에 울리는 방송음부터 게이트 바깥으로 보이는 비행기들. '나도 저걸 탈 거다!!'라는 설렘. 얼마만의 비행기 여행인지.


하지만 친구와의 여행이 아닌, 부모님과 함께하는 가족 여행이었기에 적잖은 긴장감(?)도 있었다. 웬만한 불편함과 시행착오가 없어야 한다는. 나와 동생은 언제고 맘먹으면 제주도에 갈 수 있지만, 부모님은 쉽지 않으실 것이기에. 일정의 기준은 부모님으로 하자고 동생과 정한 상태였다.


제주도에 도착한 첫날. 우리 가족의 유일한 프로 운전자(?)인 아빠는 일을 마치고 오후에 따로 오실 예정이었다. 그때까지 엄마, 동생, 나 세 모녀는 뚜벅이와 택시로 다녀야 했다. 그렇게 공항 근처에서의 점심과 카페까지, 지도를 찾고 어플로 택시를 불러가며 부지런히 일정을 소화했다.


오후 4시 30분이 조금 지났을까. 드디어 첫날 숙소에 도착했다. 현지 음식을 먹고 바닷가와 바람을 한창 느끼면서 온 터라 제주도에 온 것을 실감하고 있었지만. 숙소에 들어서니 어떠한 긴장이 풀리는듯했다.


애월 바닷가에 닿아있는 한 민박. 바닷가를 향한 통창으로 탁 트인 풍경을 볼 수 있었다. 그야말로 아무것에도 방해받지 않는 바닷가. 이곳을 숙소로 정한 가장 큰 이유. 해가 질 때의 노을 뷰는 더 기가 막히다고 했다.


아빠가 도착할 때까지 일종의 자유시간이 생긴 셈이었다. 바닷가를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던 나는 무작정 혼자 산책에 나섰다. 핸드폰도 배터리가 불안해서 충전기에 꽂아두었으니, 맨몸으로만 나간 셈이다. 지금 생각하면 무슨 용기로 그렇게 나섰나 싶다.


하지만 뭔가 핸드폰에도 매일 것 없이 자유롭게 다니고 싶었다. 핸드폰을 가져가면 또 사진 찍을 욕심에 사로잡힐 게 뻔하니. 손목시계로 시간도 확인할 수 있고, 바람도 그리 차갑지 않은 듯해 외투도 숙소에 둔 채로 발걸음을 옮겼다.


해안가를 따라 난 담장길을 따라 비잉 둘러서 현무암들이 놓인 바윗길로 들어섰다. 일몰 시간이 다가오는 만큼 해는 점점 해안선에 가까워졌고, 그만큼 눈이 부셨다. 일단 발길 닿는 대로 계속 걸었다. 나도 모르게 심란했던 기분도, 바람을 쐬러 빼꼼 나온듯한 기분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가보자. 그렇게 한 방향으로 마냥 걷다가, 이내 숙소로 돌아갈 생각을 하며 바윗길로 들어선 입구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이때, 바윗길에는 나보다 앞서 걷던 한 여성분이 있었다. 그분도 여행을 온 것 같았다. 내가 걷던 방향을 바꾸었을 때, 어느새 엇갈린 방향으로 걸어오던 그분과 마주치게 되었다. 그때 그 여성분이 내게 말했다.


"저쪽으로도 가보세요. 하늘이 그대로 다 비쳐서 예뻐요."


그러면서 자신이 앞서 가봤던 한 해안가를 가리켰다. 거리가 꽤 있어 나도 갈까 말까 망설였던 곳. 하지만 추천도 받았고(?) 마다할 이유도 딱히 없었다.


현무암 바윗길의 경계선. 마치 바닷물이 고인 듯한 느낌이 들었던 곳. 바위들의 그림자로 인해 처음부터 잘 보이지 않았지만, 집중해서 보니 바로 위의 하늘과 구름이 비쳐 보였다. 이걸 말씀하신 거였구나.




그렇게 시선을 들어 너른 바다까지 한눈에 담았다. 비단 여기뿐만 아니라, 바다는 그 위에 있는 하늘을 그대로 비추고 있을 것이다. 다만 너무 깊어, 그 짙어진 바다색에 하늘빛이 감춰진 것일 뿐. 그렇게 오롯이 자기 곁에 있는 것을 비추고 있는 바다. 그 평온함이 부럽기까지 했다.


이따금 바람으로 물결이 생기기도 했다. 하지만 바다가 하늘을 비추는 것은 변함이 없을 것이었다. 내가 느끼는 심란함 또한 그저 내 감정인 것이겠지. 내가 잡지 않고 놓아주면 그냥 흘러가버릴. 잠잠히 하늘만 비추는 바다처럼, 내 마음을 잘 지키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저, 주시는 마음만 오롯이 받고 지킬 수 있기를.


가족끼리 여행을 와서 이렇게 혼자 있는 시간을 가지다니. 지금 여기서만 받을 수 있는 선물을 받은 셈이었다. 그 여성분의 안내가 없었다면 나는 그 순간을 마주할 수 있었을까? 그 우연 또한 마냥 신비롭고 감사할 뿐이다.


(이번 여행에서 잊을 수 없는 순간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때는 사진이 없다. 핸드폰이 충전 중이었으니. 내 기억 속에만 남아있는 만큼, 더욱 이렇게 글로 남길 수밖에 없었다. 여기 함께 남긴 사진은 그 바닷가를 숙소 가까이에서 바라보던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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