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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S 고객 상담 중지


"고객님, 오늘부로 고객 상담 서비스가 중지되었습니다. 다른 창구를 이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중고등학교 때부터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상담을 요청했다. 말수가 적고 주로 듣기만 하는 편이라 친구들은 나를 편안해했다. 대학교 때도 마찬가지였다. 지방에서 올라와서 경제적으로 힘든 생활을 하고 있는 선후배, 짝사랑을 하고 있는 친구, 학교 조별 활동에서 제 역할을 하지 않는 사람 때문에 과제 수행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친구, 집안 사정 때문에 등록금을 못 내서 휴학하는 친구 등이 그들의 고민을 털어놓았다.      


이러한 상황은 직장 생활까지 이어졌다. 회사에서는 서로 의견이 맞지 않는 사람들, 인사고과 점수가 좋지 않아서 승진에 누락된 사람, 일을 못하는 사람과 팀이 되어 괴로워하는 사람, 감정 기복이 심한 사람과 일해서 힘든 사람, 이간질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골치 아파하는 사람, 현재 하고 있는 업무가 자신과 맞는지 고민하는 사람, 퇴사하고 싶은 사람, 이직하고 싶은 사람 등이 나에게 어려움을 이야기하고 조언을 구했다.


필요한 때의 적절한 조언은 상담자에게 힘이 된다


그리고 어느새 팀장이 되니, 여기에 새로운 팀원들의 업무 면담과 개인 생활 상담까지 덧붙여졌다.      

이러한 상황을 겪다 보니, 상담하는 사람들도 늘어나고 개인당 요청하는 상담 횟수나 시간이 점점 길어져서 언제부터인가 스스로 좀 지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인성이 부족한가? 힘든 사람들 잠시 상담해 주는 것이 뭐 그리 힘들다고... '    


이런 마음가짐에도 불구하고, 정말 지치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대부분 같은 사람이 같은 문제로 계속해서 상담을 청하는 경우였다. 그런 경우는 대개 답이 정해져 있고 자신도 그 답을 알지만, 결심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었다. 가령, 남자 친구가 바람둥이이거나 유부남인 것을 알았는데 어떻게 해야 되느냐라는 고민을 털어놓은 사람들은 헤어지는 것이 답임을 스스로 알고 있으면서도, 일 년 내내 그 남자와 헤어지지 못한 채 그러한 고민을 털어놓았다.      


몇 년에 걸쳐 계속 퇴사하고 싶다는 이야기만 계속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당장 오늘이라도 회사를 그만둘 것 같았지만, 지켜보면 그들은 회사를 관두지 않고 계속 다니면서 회사나 동료의 험담을 계속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런 사람들은 주변 사람의 에너지를 빼앗아 간다.     


이러한 상담을 청하는 사람들은 문제 해결을 바라는 것도 아니었고 자신의 감정을 어디엔가 쏟아부을 곳이 필요했으며 그것이 늘 상담을 청하면 귀 기울여 주는 ‘나’였다.


응급실 입구에서 가장 가까운 베드에는 의사가 와서 가장 먼저 처치해야 하는 아주 위급한 환자가 누워 있다


몇 년 전에는 오빠가 중병을 앓아 생사를 오가는 상황이 생겼다. 언니는 전화 너머로 내가 최대한 당황하지 않게 소식을 전했다. 병원에 도착하니 오빠는 응급실 입구 첫 번째 방에 의식을 잃은 채 누워 있었고 우리 가족은 의사 선생님으로부터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엄마는 정신을 잃어. 허공을 보고 고개를 저으며 '아니야, 아니야.'라는 말을 반복했다. 아빠와 언니, 그리고 나는 오빠를 잃을지 모른다는 공포에 휩싸여 눈물을 흘리면서도 정신을 붙잡기 위해 노력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그저 일상생활을 하며 퇴근 후에는 응급실 앞에서 면회 시간만을 기다리며 10분 정도의 시간에 가족 네 명이 시간을 나누어 의식 없는 오빠에게 따듯한 응원의 말을 하고 나오는 것이었다.  이런 상황이니 우리 가족은 물론이고 나의 심신은 매우 지쳐 있었다.


하지만, 회사 사람들 대부분에게는 이러한 급박하고 슬픈 상황을 상세히 알리지 않았다. 내가 오빠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는 상황이기도 했고 회사 팀원들에게 알려 괜한 심려를 끼칠 필요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나의 이러한 상황을 알지 못하는 한 팀원이 자신의 고민을 상담해달라고 요청했고 나는 조용히 회의실로 들어갔다. 여느 직장인에게나 연차별, 시즌별로 오는 업무와 직업에 대한 고민 상담이었다.  그때 그 상담을 마치고 나오면서 나는 한 가지 깨달았다. 내가 힘든 때에는 다른 사람에게 진정한 위로나 조언을 건넬 수 없다는 것을...       


그동안 나는 상대방이 상담을 청하면 팀장으로서, 선배로서, 후배로서 당연히 도움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했다. 하지만, 내가 힘들 땐 나 스스로의 일에 집중하고 거절도 할 줄 알아야 한다. 또한 필요하면 오히려 상황을 다른 사람에게 알리고 도움을 청해야 한다.      


이제 난 '만인의 상담원 역할'은 그만두려고 한다. 그 시간들을 나를 위해 쓰면서 그동안 고갈된 에너지를 다시 채울 예정이다. 고갈된 에너지를 다시 채운 후에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다시 그 에너지를 나눠 줄 수 있을 것이다.          




상담은 문제 해결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사실 대부분은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심리적 위안을 주기 위한 활동이다. 상담은 좀 더 마음의 여유가 있는 사람이 마음의 여유가 없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상담을 요청할 때 그 누군가가 자신보다 여유가 있는 사람인지 한번 헤아려 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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