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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엄마라서

엄마가 허리 수술을 하셨다. 허리 통증을 오랫동안 견디시고 견디시다 드디어 한계가 왔다. 3년 전 어깨 수술에 이어 두 번째 큰 수술이었다. 엄마가 어깨와 허리 수술을 하신 데에는 안타깝게 나도 일조를 했다.    

   



내가 출판사에 취업했던 '라테'에는 지금 말하는 인권이라는 것이 없었다. 성희롱은 생각보다 자주 있는 일이었고 야근은 밥 먹듯이 해야 하는 것이었으며 심할 때는 서너 달 동안 새벽 2, 3시에 퇴근해서 아침 7시에 출근하기도 했다. 종종 날을 새기도 했고 너무 졸리고 피곤한 때에는 의자 두 개를 맞대어 몸을 웅크린 채 잠시 눈을 붙였다. 어느 날은 새벽 3시에 계속되는 야근으로 힘들어 쓰러졌을 때도 집에 가지 못하고 '비상사태'라는 명목 하에 쓰러질 때 다친 손을 간단히 처치한 후 책상에 엎드려 쉬면서 날을 새야 했다.


'라테'의 상황이 이러니 육아휴직이라는 것은 입밖에 낼 수도 없었다. 혹자들은 출산 휴가 세 달도 제대로 쉬고 오질 못했다. 아이를 낳고도 야근이 일상인 회사를 다니려면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했다. 처음에는 아이를 봐줄 수 있는 도우미 아주머니를 찾았다. 하지만, 서너 분을 만나본 후에도 아이를 믿고 맡길 수 있는 분을 찾지 못했다. 이제 막 젖을 뗀 아이를 지방에 있는 친정에 맡길 수 없어서 서울에 계시는 시어머니께 부탁을 드렸다. 이때 어머님들 사이에서는 손주를 키우느라 힘을 빼지 말고 남은 인생을 즐기자는 분위기가 한창 대세일 때였다. 시어머니께서는 '친손주든 외손주든 절대 손주들을 키워주지 않겠다.'라고 하셨다. 나로선 안타까운 상황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나도 어머님과 같은 여자이고 아이를 키우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임을 알기에 충분히 이해가 됐다.   

  

다음으로 시골에 계신 엄마께 조심스레 부탁을 했다. 엄마는 도우미 아주머니를 구하기 위해 발을 동동 구르다가 육아 때문에 회사를 관둬야 될지도 모른다며 안절부절못하는 딸을 안타까워하셨다. 그리고 어렵게 꺼낸 부탁에 '기꺼이' 아이를 돌봐주시겠다고 했다. 엄마는 우리 콩이를 그렇게 3년 넘게 키워 주셨다. 자식들 다 떠나보내고 엄마의 인생을 새롭게 찾아가실 수 있는 60대에 다시 딸자식의 짐을 대신 지어 주셨다. 엄마는 우리 콩이를 엄마의 넷째 아이처럼, 아니 그 이상으로 정성을 다해 애지중지 키워주셨다. 지난 세월의 흔적으로 어깨와 허리가 좋지 않으신데도 콩이를 자주 안아주시고 업어 주셨다. 교육학과를 나와 소위 유아 교육과 유아 발달 심리에 능통했던 딸은 엄마에게 "지금 콩이에게는 할머니가 엄마인 상황이니까 콩이를 두고 아주 잠시라도 어디를 가면 안 돼요."라며 철없이 엄마에게 한참 육아 교육에 대한 설교를 해댔다. 그 탓에 엄마는 3년이 넘는 시간 동안 '할미'지만 실제로는 '콩이 엄마'로서 콩이와 한시도 떨어지지 않으시고 동고동락을 하셨다.      

할머니의 따스한 손길 하나하나를 오롯이 느끼며 자란 아이는 마음이 따뜻한 아이가 되었다.


그로부터 8년이 지난 요즘 엄마에게 "엄마, 콩이 키워주실 때 많이 힘드셨죠?"하고 여쭤보면 엄마는 힘든 기색 하나 하지 않으시고 '콩이를 키웠던 때가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라고 하신다. 말씀하지는 않으셨지만 막 젖을 뗀 아이를 도움 없이 삼 년간 키우시느라 얼마나 힘드셨을까? 20대 젊은 엄마들도 몸과 마음의 병을 얻기도 하는 그 고된 육아를 어떻게 견디셨을까... 이제 와서 돌이켜 보니 본인의 몸이 그리 아프신데도 불구하고 콩이를 그렇게 살뜰히 키워주실 수 있으셨던 것은 정말 '우리 엄마라서' 하실 수 있는 일이었다.


다행히도 허리 수술은 잘되었다. 한동안 휴식과 꾸준한 재활 운동을 하셔야 한다고 한다. 그 이후에는 엄마의 통증이 씻은 듯이 사라지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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