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예약은 10시였다. 늘 예약 시간보다 일찍 움직이지만 오늘은 늦장을 부렸다. 도착하니 10시 20분. 접수대에 "A 왔습니다."라고 말하며 코로나 검사 결과지와 방문증을 내밀고 대기자 화면에 내 이름이 뜬 것을 확인하고 대기석에 앉았다.
대학병원 재활의학과와 신경외과, 정신건강의학과를 거쳐 마취통증의학과를 다닌 지 올해로 9년이 되었다. 제법 오래 다녔지만 지금껏 예약시간에 제대로 진료를 받아본 적이 없다. 짧게는 30분에서 길어지면 2시간까지 대기하기도 한다. 지난번 진료 때는 거의 2시간을 기다렸다. 그러고 나니 오늘은 일찍 가고 싶지 않았다. 1시간 정도 늦게 가도 될 것 같았지만, 소심한 성격이라 한껏 늦장을 부린 것이 20분이다.
대기석에는 60대 어머님부터 70~90대 어르신들이 보호자들과 함께 앉아 있거나 베드에 누워 계신다. 그곳에서 나는 가장 막둥이 환자다. 대기할 때 핸드폰을 보는 것이 지겨워 오늘은 책을 가지고 왔다. 목이 아프니 오래 읽지는 못하고 몇 장 읽고 잠시 쉬고 또 몇 장 읽는다. 틈틈이 내 차례는 안되었는지 계속 체크한다. 옆자리 아주머니는 아주머니 오른쪽에 앉은 다른 아주머니에게 어디가 아파서 왔냐며 말을 붙인다. 대기 시간은 길어지고 가만히 앉아있자니 통증이 심해져서 나는 일어나서 스트레칭을 한다. 요즘은 앉아있는 것도 너무 힘들 정도로 통증이 심해졌다.
11시 20분쯤이 되자 드디어 내 차례가 되었다. 통증이 어느 정도인지를 묻고 오늘 시술할 곳들을 재점검한다.
병원에 다니는 횟수가 늘어감에 따라 주사는 점점 세지고 알약의 개수는 늘어난다. 담당 의사 선생님과 면담이 끝나고 예약일을 잡는다. 한 달에 한 번 이곳을 오지만, 이번엔 예약일이 두 달 뒤로 잡혔다. 예약일을 좀 당겨 달라고 부탁하다가 빈자리가 없다는 말에 뒤돌아 나와 다시 대기석에서 대기한다. 다시 책을 편다. 11시 45분쯤이 되자 다시 내 이름이 호명된다.
간호사 분의 안내에 따라 익숙하게 시술실 입구로 들어간다. 탈의실에서 환자복을 입고 머리에는 수술용 모자를 쓴다. 목과 등, 허리에 시술을 받기 때문에 상의는 단추가 뒤로 가도록 거꾸로 입는다. 시술 동의서에 사인을 하고 수술실로 들어간다.
수술실 문은 차가운 은색 스테인리스 재질로 되어 있어서 들어갈 때마다 겁이 난다. 수술대에 누워 시술을 기다린다. 시술을 기다리자니 약간 긴장되었다. 목과 등, 허리 부분을 마취하고 통증이 있는 곳의 신경을 찾아 블록 시술을 한다. 오늘은 운이 나쁘게도 마루타가 되었다. 담당의 선생님은 말로 지시를 하고 레지던트들이 시술을 한다. 그래서인지 한 번에 신경을 찾지 못하고 이리저리 살을 헤집는다. 허리 시술을 한 레지던트는 경험이 많지 않은지 신경을 잡는 게 영 서툴렀다. 그만큼 통증도 추가되어 허리 주사를 놓을 때는 침대 시트를 계속 움켜쥐고 발가락을 쥐었다 폈다 했다.
시술이 끝난 후에는 몸을 데구루루 굴려 옆에 있는 이동 베드에 몸을 옮긴다. 오늘은 주사를 많이 맞아서 예전보다 더 어지러울 수 있다고 한다. 회복실에 도착하자 간호사님이 잘 덥혀진 따뜻한 이불을 덮어준다. 이 이불의 포근함과 함께 한숨 자는 것이 가장 좋은데, 회복실은 산만하다. 여러 의료진들의 치료와 처치, 그리고 점심 식사 메뉴에 대한 대화, 시술이 끝난 베드를 끄는 소리, 시술 후 마취가 풀려서 신음하는 소리, 90대 환자가 의식을 잃지 않도록 계속 깨우는 소리... 아무리 한숨 자려고 해도 잠이 오지 않는다.
눈을 감고 누워 있자니 생각이 많아진다. '지긋지긋하다. 이놈의 병원 생활. 아, 병원 오기 싫어. 아, 진짜 병원 오기 싫다. 아, 병원 오기 싫어!' 나 혼자 소리 없는 아우성을 외친다. 소리는 없는데 눈물은 흐른다. 그러다 지쳐 가만히 있다가 내 몸의 감각을 느껴본다. 오늘 맞은 신경 주사 덕분에 통증의 60프로는 다소 잠재워졌고 40프로는 아직 남아있다. '신경주사야, 조금만 더 힘을 내라. 조금만 더 통증을 없애주렴...' 작은 바람과 함께 잠깐의 낮잠을 기대하며 조용히 숨을 쉬어보지만 여전히 잠은 오지 않는다.
"일어나실 수 있으시겠어요? 어지러우시면 말씀해주세요." 간호사님의 안내를 따라 회복실에서 나오니 2시 30분. 시술을 많이 해서 어지러우니 택시를 타고 집으로 바로 가야겠지만 갑자기 허기가 밀려왔다. 조용히 대학병원 근처 시장에 들러 만두 라제비를 시켰다. 뜨끈한 라면과 함께 엄마 손맛 수제비를 건져 먹고 만두를 한 입 베어 물으니 병자의 억울한 마음이 누그러졌다.
'그래도 이만한 게 다행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