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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원호 Dec 04. 2019

두 개의 섬 4화

순환에 대하여

순환에 대하여





그는 피로감 가득한 몸을 뜨거운 온천에 뉘었다. 하루 종일 어깨를 짓눌러오던 긴장감이 그제야 조금 가시는 기분이 들었다. 돌로 된 거북이의 머리에서는 뽀오얀 온천수가 콸콸 쏟아져 나왔다. 매캐한 유황냄새와 우윳빛 물결이 이곳이 땅 속에서 솟구치는 진짜 온천임을 매 순간 증명하고 있었다. 그는 편안한 한숨을 조금 내쉬었고, 그러자 돌덩이처럼 굳어진 두 어깨가 바르르 떨리며 조금 편안해졌다. 그는 그만의 작은 행복을 맛볼 수 있었다.

푸른 호수에서 채 몇 시간 떨어지지 않은 곳에는 유명한 온천 마을이 있었다. 푸른 호수가 보석처럼 빛나는 것은 지하에서 강물과 만나는 온천수 덕분이었고, 그 온천수는 인근에서는 굽이치며 마을을 따라 흐르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는 작고 고요한 온천 마을을 기대하며 어귀에 들어섰지만 곧 그 규모에 입을 벌리고 놀라고 말았다. 도깨비들이 지킨다는 산등성이에는 거대한 온천 호텔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고, 그 사이 계곡들로는 구수한 향기와 열기의 유황천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마귀와 악마들이 잔치를 벌여서 지옥천이라는 이름이 붙은 계곡은 실제로도 매캐한 냄새와 앞을 분간할 수 없는 수증기 덕분에 인외마굴 같았지만, 그 입구를 지키는 높이 9미터의 거대한 수문장 덕분에 마귀들이 마을을 습격하는 일은 없었다.


그는 9미터에 달하는 도깨비 신상을 올려다보며 다양한 생각을 할 수 있었다. 그가 알고 있는 도깨비란 선하고 장난 많으며 남을 해치길 두려워하는 덩치 큰 어린아이 같은 존재였지만, 겨울섬의 도깨비들은 그것과는 조금 다른 것 같았다. 크고 부리부리한 두 눈을 부라리는 이 무시무시한 존재들은 한입에 소도 베어 먹을 수 있을 것 같은 끔찍한 이빨과 흉신악살 같은 미소를 온 얼굴에 머금고 있었고, 큰 뿔과 종기가 가득한 메주 코로 눈 앞의 모든 것을 위압적으로 위협했다. 그것은 친구나 어린아이라기보다는 악마나 고대 종교의 수호신들을 닮아 있었기에 그는 이런 잡귀가 마을을 보호한다는 것은 영 께름측한 일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큰 곰도 한방에 으깨어질 것 같은 흉악한 방망이를 보며 그는 찬찬히 온천의 마을로 걸어 들어갈 수 있었다.


무지막지한 계곡들과 도깨비 거상 앞에는 황홀한 대저택들이 줄지어 위용을 뽐내었다. 섬의 전통적인 방식으로 지어진 그 고택들은 부유한 사람들이 온천욕을 즐길 때를 위해 만반의 준비를 갖춘 장소였다. 그보다 덜 금전적으로 여유로운 이들은 그 뒤에 갖추어진 작은 건물들에서 온천을 즐겼다. 일반 가정집 같기도 하고 전통 여관 같기도 한 자그마한 온천시설들은 때론 군락을 이루고 때론 미로를 형성하며 부드럽게 퍼져나가고 있었다. 기실 온천수야 땅 밑에서 올라오는 것이니 상류의 온천이나 하류의 온천이나 큰 차이는 없을 테지만, 높은 곳에서부터 마치 부가 흘러나와 고이는 듯한 마을의 형상에 그는 내심 고소를 그치지 못했다.


그가 고른 곳은 하류의 온천여관 중에서도 큼지막한 노천탕이 유명한 곳이었다. 겨울 섬에서 좋은 온천욕을 즐기는 것은 그의 숙원 중 하나였던 터라 그는 결코 아쉽지 않은 단 한 번의 사치를 이곳에서 즐겼다. 그리고 뜨거운 온천탕에서 별을 올려다보며 열기가 사지백해에 퍼져나가는 것을 음미하며 그는 자신의 선택에 대해서 만족스러움을 느낄 수 있었다. 비록 상상했던 눈 내리는 하늘과 뼈가 에는듯한 날씨는 아니었지만, 낙엽이 흩날리는 가운데 가을바람을 맞으며 즐기는 온천도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이었다.


그는 어려서부터도 목욕을 끔찍하게 좋아했다. 그것은 아마 그가 지독하리만큼 예민하여 모든 상황에 있어서 긴장을 하는 종류의 사람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항상 긴장과 더불어 살았다. 시간을 맞추지 못할까 봐 긴장했고, 말실수를 할까 봐 긴장했으며 상대의 말실수에 상처를 받을까 봐 긴장했다. 또한 그는 다칠까 봐 긴장했고 다치게 할까 봐 긴장했으며 다칠 수 있는 상황을 충분히 고려해두지 못해서 예상 밖의 일이 생겨날까 봐 긴장했다. 그에겐 사람을 만나는 것도, 약속을 하는 것도, 무언가를 사거나 배우는 것 마저도 모두 긴장이었다. 


그런 그에게 긴장되지 않는 일이 있다면 책을 읽는 것이었고, 긴장을 풀어주는 일이 있다면 물속에 들어가는 일이었으니 어찌 보면 그가 지금과 같은 사람이 된 것은 필연적인 결과였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물속에만 들어가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예민함이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그는 차츰 물속에 삼라만상의 이치가 모두 녹아있다고 믿기 시작했다. 특히 그것은 목욕탕에서 자주 느낄 수 있는 종류의 일이었다. 뜨거워진 수증기가 위로 치솟으면 차가워진 물방울들은 아래로 떨어졌다. 그것은 거대한 순환의 일부분이었다. 낡은 것은 벗겨지고 새 것은 낡아졌으며 오래된 것은 새로워졌고 새로워진 것은 경계되었다. 그 물과 인체와 순환의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무한했으며, 그렇기에 끝을 향해 원 없이 달려갈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그 치닫고 맴도는 느낌의 일부가 되는 것을 사랑할 수 있었다. 뜨거운 물에 몸을 오래 담그면 온 몸의 피가 따뜻해지며 몸이 붉게 달아오르곤 했다. 개구리나 나가 같은 변온 동물은 환상이나 환각에 시달렸을 그 급격한 온도 상승 속에서 다행히도 정온 동물인 그는 모골이 송연해지는 기분만으로도 삶을 만끽할 수 있었다. 송연한 느낌은 유일하게 물에 담기지 않은 부분인 정수리에서 땀이 송골송골 맺히기 때문에 다가오는 것이었는데, 정수리는 동시에 인체의 가장 높고 숙연한 곳이었기에 그곳에 맺히는 모든 땀방울 속에는 나른한 과거의 기억들이 묻어 나올 수밖에 없었다. 관절이 늘어지고 신경이 느슨해지는 열기 속에선 벼라별 기억들이 다 녹아서 기어 나오곤 했다. 거세게 쿵쾅대는 심장과 온몸을 용솟음치는 혈류는 정신을 산란하게 만들어 무엇에도 집중할 수 없는 산만함을 선물했다. 마치 초점이 맞지 않는 안경을 끼고 영화를 보려는 사람처럼, 그럴 때의 그는 기억의 홍수 속에서 그 어떠한 편린도 선명하게 포착할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이 의미가 될 듯 말 듯 나른하게 떠다니는 그 소란스러움이야 말로 열탕의 본질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 소란스러움을 사랑했다.


온몸의 피가 너무 빠르게 돌아 어지러워지면 그는 마침내 몸을 일으켜 가장 차가운 냉탕으로 향했다. 가장 뜨거울 때에 가장 차가운 곳을 바라보고 가장 차가울 때에 가장 뜨거운 곳을 향하는 것은 그의 삶의 방식이기도 했지만, 세상 만물이 살아가는 방법이기도 했다. 두려움과 머뭇거림 이전에 행동을 놓았기에, 그는 망설임 없이 냉탕에 뛰어들 수 있었다. 그것은 모든 것을 내려놓은 달관자의 태도이자 모든 것에 초연한 초월자의 행동이었다. 급격한 온도 변화에 숨이 턱 막혀오기는 했지만, 그의 호흡기관은 이미 깊고 어두운 물속에 잠겨 어차피 산소를 들이마실 수도 없었다. 그는 숨을 참을 채로 내면의 세계로 여행을 떠났다. 내부에서는 아직도 뜨거워진 혈류가 용처럼 똬리를 틀고 있었다. 그 느지럭거림은 표피로 올라와 냉탕의 차가움과 닿았고, 그 순간 날카로움으로 변했다. 몸 깊은 곳에는 뜨거움과 마음 얕은 곳의 차가움이 공존하는 바로 그 순간은, 몽상이라는 꽃이 피어나는 순간이기도 했다. 날카로운 냉기는 그 모든 느릿하고 느슨한 상상들을 잡아당겨 현실로 당면시켰다. 그가 알았지만 몰랐던 모든 것들이 깊은 곳에서 떠밀려와 얕은 곳에서 날카롭게 이어지고 있었다. 그것은 의미가 만들어지고, 사랑이 빚어지고, 인연이 닿아가는 과정과도 일견 닮아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렇기에 그는 열기와 냉기 사이에서 모든 것을 꿰뚫을 수 있었다. 숨과 순환을 멈춘 채로 그는 잠시 무엇이든 될 수 있는 황홀의 순간을 즐겼다. 시간이 멈춘 것 같은 어둠 속에선 심장 박동만이 뜨겁게 쿵쿵 울려대고 있었다.


황홀의 시간은 영원하리만큼 짧았다. 숨은 곧 가빠오고, 심장 박동 소리는 무념과 무상의 세계에서 박자로 그를 방해했다. 그리고 모든 정온 동물이 그렇듯, 심장마저도 차가워지면 그는 살아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순환과 소란스러움의 세계로 다시 찾아들었다. 한가득 날갯짓으로 그는 수면 위로 부상하여 허우적거리며 공기를 빨아들였다. 달콤하고도 진귀한, 깨달음과도 같은 공기가 그를 낱낱이 채웠다. 멈춰있던 뜨거움과 차가움은 다시 목욕처럼 순환을 거듭하기 시작했고, 곧 세계가 되었다. 그는 숨을 쉬며 다시 그가 되었다. 멈춰버린 시간 속에서 건진 몇 가지 기억들을 사색의 안주거리로 남긴 채, 그는 느린 발걸음으로 탕에서 기어 나왔다. 심장이 다시 천천히 삶을 연주하고 있었다.




5화에서 계속


매주 수요일,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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