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원호 Nov 30. 2019

두 개의 섬 3화

시간에 대하여

3화 : 시간에 대하여





푸른 호수는 도시에서 기차를 타고도 꽤 긴 시간이 걸렸다. 가을로 물든 북쪽 깊이 존재하는 푸른 호수는 온천수와 강물이 만나서 생기는 화학작용 덕분에 비현실적인 푸른빛을 띤 호수였다. 호수는 산호초 가득한 바다의 코랄 블루 일 때도 있었고 엄숙한 여왕의 왕관 보석 같은 에메랄드 블루일 때도 있는 이 마법 같은 호수는 겨울에 가장 신비한 푸른빛을 뽐내었고, 따라서 가을 절경에는 관광객들이 되려 잘 찾지 않는 장소이기도 했다. 그는 호수에 도착한 순간 왜 이 아름다운 장소가 가을에는 선호되지 않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호수에서는 붉은색과 푸른색이 서로 싸우고 있었다. 시릴 만큼 푸른 호수와 뜨거우리만큼 붉은 단풍은 서로 섞이지 못해 참담하리만큼 어울리지 않았다. 단풍이 붉어서 호수는 창백해 보였고 호수가 푸르러서 촌스러워 보였다. 자연의 앙다툼 같은 그 풍경은 다채롭기는 했으나 아름답지는 않았다.


그는 뚜렷한 개성을 가진 것들이 섞이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보았다. 호수가 푸르러지면 푸르러질수록 주변 경관과 조화에서는 멀어질 것이 분명했다. 이것은 환락가에서도 느껴졌던 묘한 부조화였다. 붉은 토끼의 매력은 뚜렷한 것이었지만 그만큼 토끼굴의 다른 사람들과는 잘 어울리지 못했다. 그는 수많은 현인들이 설파했던 스스로를 잘 아는 것, 자기 자신을 바로 세우는 것, 나의 본질을 알아가는 것에 대해서 생각했다. 그는 남을 살피기에 앞서 자기 자신을 살펴 고유한 향기, 색채, 성품,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고 역설한 위인들의 이름을 한 다스는 댈 수 있었다. 하지만 어쩌면 자기 자신을 세운다는 것은 홀로 빛나는 별이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지금 호수에서 찾아들고 있었다. 그리고 가장 빛나는 별은 고고히 외로울 수밖에 없었다. 그는 갑작스레 서로 다름이 어떻게 조화에 이르는지 영원히 알 수 없을 것만 같은 막막한 기분을 느끼고 말았다.


그래서 그는 나무 벤치에 털썩 주저앉아서 붉고 푸르러 엉망인 호수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는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지혜를 찾고 싶어서 호수를 찾았지만, 그의 눈에 들어오는 것은 온통 엉망인 색의 부조화뿐이었다.


앉아 있는 그의 주위로 다양한 사람들이 스쳐 지나갔다. 제출이 아닌 명소라고는 해도 명승지는 명승지인지라 드문드문한 발걸음과 인기척이 그의 상념을 끊임없이 건드리고 있었다. 머물러 서성거리는 이들과 사진을 찍는 이들과 그처럼 벤치에 앉아서 한참을 조용히 호수만 바라보는 이들 사이에서 그는 의미를 찾아 헤매었다. 


이곳의 사람들은 그가 살던 나라의 사람들과는 어딘가 조금 달랐다. 특히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말이 없는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세상 어딜 가나 시끄러운 사람들이 시끄럽고 젊은 사람들이 젊은것이야 같았지만, 조용한 사람들의 태도는 그가 살던 곳과 이곳이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그의 나라에서 조용한 이들의 침묵은 사색이나 성찰의 느낌을 가졌고, 바깥을 지향하기보다는 스스로의 내면을 지향하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그에 비해서 겨울섬 사람들의 침묵은 경청의 느낌을 띄었다. 듣는 자가 말이 없고 쓰는 자는 침묵하듯이, 그들은 성실하고 끈기 있게 상대방을 기다려주는 침묵을 생활화하고 있었다. 그 침묵은 경망스러운 자들 속에선 타인에 대한 지나친 관심처럼 느껴졌지만 품위 있는 이들 속에선 사려 깊은 배려로 느껴졌다. 같은 색채의 침묵도 다르게 느껴진다는 사실 속에서 그는 언뜻 깨달음의 실마리를 붙든 기분을 느꼈다.


나이 든 노부부가 다가온 것은 그가 실마리를 잡아당겨 실타래를 풀어보려고 끙끙거리고 있을 때였다. 나이가 그들의 머리카락을 눈송이처럼 하얗게 물들였건만 그들은 꼿꼿하고 느린 발걸음으로 걸어와 호수 앞 벤치에 앉았다. 그는 섬의 언어에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에 노부부의 대화를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그들이 특이하다고는 생각할 수 있었다. 나이 든 남녀는 세월을 견디어 얻은 흔적들 외에는 서로 비슷한 점이 없었다.


남자는 키가 작고 부드러운 표정을 지닌 노신사였다. 고풍스럽게 나이 든 가죽 구두와 세월에 연하게 물든 코트가 안 그래도 연해 보이는 노신사의 선을 한층 더 부드럽게 만들어주었다. 그에 비해 나이 든 숙녀분은 어떤 방향에서 보아도 날카롭고 세련된 사람이었다. 큰 키와 냉막한 표정, 주름 하나 없는 선명한 보라색 코트와 최신의 스틸레토까지 모든 것이 어우러져 삼엄하고도 추상같은 성정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두 사람은 마치 삼나무와 주목처럼 한 군데서 자랄 수 없는 두 그루의 나무 같아 보였다. 하지만 두 사람은 손을 꼭 붙들고 있었다. 마치 숲 속에서는 서로 다른 나무도 뿌리가 얽히며 함께 자라듯 두 사람은 그렇게 손을 잡은 채로 호수를 바라봤다.


그는 잠시 하던 생각을 멈추고 호수 대신 노부부를 바라보았다. 굴과 기름까지는 아니어도 갈색과 자주색 같은 두 사람은 같은 날 입을 옷으로는 까다롭다 못해 괴이한 조합이었다. 하지만 그런 두 사람이 함께 손잡은 채로 나이 들어가는 모습에는 묘한 신비와 조화가 어우러져 있었다. 그는 노부부의 앙상한, 하지만 꼭 붙든 손을 보며 수천 가지의 생각을 했다.


사랑은 서로 다름을 포용할 수 있게 해 줄까. 하지만 겨울을 닮은 호수가 가을을 담은 단풍을 사랑하게 할 방법 같은 것은 없었다. 그보다는 포용했기에 사랑할 수 있다는 말이 더 신빙성 있어 보였다. 그렇다면 사람은 어떻게 서로를 포용하고, 더 나아가 사랑할 수 있는 걸까. 타인의 입장이 되어볼 수 있다면 가능해질까? 그는 가을이 되어보는 호수와 겨울이 되어보는 단풍을 그렸다. 둘은 각자의 고유한 아름다움은 잃었지만 서로와는 조금 더 어울리는 모습이 되었다. 하지만 푸른 호수가 푸름을 잃고 가을의 불꽃이 일렁임을 잃자 그것은 서로 조화로울 뿐 누구도 딱히 공들여 찾아야 할 의미로 보이지는 않았다. 그는 조화가 상호 보완하는 상승세가 아닌 서로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전락하는 하강세로도 존재할 수 있음을 그때 알았다. 비싼 식재료도 모두 함께 넣고 녹이면 한 가지 맛뿐 나지 않는 죽이 되어버리듯, 조화 역시 전체를 위한 한없는 자기희생이 되어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호수와 단풍이 그러한 악랄한 조화를 이루지는 않았듯, 백발의 남녀 역시 스스로를 훼손해가며 조화를 이루지는 않았다. 그들은 모두 서로 어우러지지 않은 채 맞닿고 있었다. 서로를 구분하는 경계면들이 한없이 늘어져 존재를 빚고 있는 와중에 그중 오로지 한 단면만이 맞닿아 온기를 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그곳에서 섬을 느꼈다. 결코 맞닿을 리 없는 두 존재가 파도에 밀려와 잠시 드넓은 모래사장으로 만나고 있었다. 그 갈매기 소리와 파도의 찰박임 속에서 그는 그 모든 것을 조심스럽게 들여다보았다. 그리곤 섬의 심장을 이루는 보석 같은 의미를 조금 이해했다.


그곳에는 시간이 있구나. 사람과 사람의 맞닿은 면은 시간이구나.


그는 호수와 단풍을 바라보았다. 둘은 푸른 수평선으로 영원히 분리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호수에는 이미 단풍이 담겨 있었고 단풍 속에는 이미 호수가 머금어져 있었다. 가을 안에선 반드시 겨울이 태동했고 겨울의 매서움은 언제나 가을의 온기를 품었다. 서로 다른 두 존재가 서로를 온전히 품어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계절이 순환하고 온도가 순환하고 수분이 순환하며 반복의 완벽한 원을 그리기 때문이었다. 톱니바퀴들이 돌다보면 같은 면에서 맞물리듯, 다른 시간대의 모든 것들은 흘러가며 지금까지의 자신과는 다른 - 이해할 수 있는 - 존재로 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호수와 단풍은 서로 다른 채 이해를 머금었다.


그는 부드러운 노인과 날카로운 할머니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평균적으로 서로 다른 두 사람이 가질 수 있는 차이보다도 더 큰 다름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서로 다른 두 사람이 똑같아지지 않으면서도 손을 잡을 수 있었던 것은 시간이 그곳에 있기 때문이었다. 할아버지가 언제나 부드럽지만은 않으실 것이고 할머니가 언제나 세련된 모습만을 보일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기에, 두 사람은 함께 어우러질 수 있었다. 때론 할아버지가 세련되고 날카로운 말을 하시고 할머니가 부드러운 웃음과 오래된 의복을 따스히 소화해 내실 때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사람은 서로 다른 시간 속의 모습들을 통해 완벽히 다른 무언가와 접촉면을 만들어낼 줄 알았다. 손을 잡는 순간은 단편일지라도 그 손을 잡는 존재는 흐름이었던 것이다. 그 사실이 사람들이 서로 다름에도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첫 번째 이유였다.


그는 푸른 호수와 노부부의 모습을 꽤 오랜 시간 동안 바라보았다. 적당히 따뜻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귀가 시려질 때가 되어서야 그가 일어났던 것은, 그렇게라도 고마움을 전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가 니를 수 없던 만큼 그들도 들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자리에서 일어나 호수를 떠나던 그는 섬나라 말로 이루어진 노부부의 대화 속에서 그나마 아는 몇 단어를 주워 들었다. '남편', '알다', '아니 된다'라는 말을 포착한 그는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번역기를 돌려본 그는, 노부부가 사실 부부도 아니었고 손을 사귄 지 100일도 안된 고등학생 마냥 꼭 붙들고 있던 데에 이유가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약간의 허탈감을 느껴야만 했다.





4화에서 계속


매주 수요일, 토요일 작성

작가의 이전글 두 개의 섬 2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