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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원호 Dec 25. 2019

두 개의 섬 8화 1부

두려움과 불안에 대하여

두려움과 불안에 대하여







오르골당을 나서며 그는 점원에게 물어보았다.


"여기서 도시로 돌아가려면 어떻게 가야 하죠?"


큰 관광지 명소에서 일하는 사람답게 종업원은 느리고 친절한 태도로 그에게 대답해 주었다. 섬 언어에 아직 능숙지 못한 그에게도 이해 가능할 정도의 친절한 대답이었다.


"기차가 있는데 오래 걸리구요, 버스는 낮에 한 대씩 밖에 안 다녀요. 사실 산을 넘으면 금방이지만 귀신이 있어요. 밤에는 야경을 보거나 귀신을 볼 수 있어요. 산 위에서 도시가 내려다보여서 정말 멋진 귀신이 보여요."


그는 해석이 잘 되지 않는 (아마도 잘못 알아들었을 것이 분명한) 귀신에 관련된 부분은 무시하기로 선택했고, 산을 넘는 것이 꽤 멋진 일일 거라고 여기기 시작했다. 교통비도 아낄뿐더러 멋진 야경도 볼 수 있는 길이라니 꽤 멋진 귀환로인 셈이다. 산에는 완연한 가을이 내려앉아 울긋불긋 설레는 단풍이 타오를 것이고, '시간이 얼마나 걸리느냐'에 대한 점원의 대답은 고작 손가락 3개 정도일 뿐이었다. 3분 일리는 없고 3일 일리도 없으니 짧으면 30분, 길어봐야 3시간 남짓인 시간인 셈이다. 그는 그것을 적당한 산책이라고 여길 수 있었다. 비록 출발은 경쾌했지만 그는 미처 몰랐다. 점원의 손가락 3개가 시간의 단위가 아닌 '걸어야 하는 목숨의 단위'일 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말이다.


다채로운 빛으로 반짝이는 운하의 마을은 산등성이 너머로 해가 지자 차분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달리면 하루의 마지막 햇살을 따라잡을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에 그는 가방끈을 질끈 부여매고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끝나가려는 하루와 붙들어보려는 사람의 경주는 그처럼 덧없이 시작되었다.


산의 입구는 정갈한 동시에 음침했다. 그는 단풍이 지저분해 보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그곳에서 난생처음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초록빛과 노란빛, 그리고 주황빛이 모두 따로 놀고 있었다. 색채는 밝고 경쾌한 대신 어둡고 칙칙했으며, 너무 많은 수풀들이 너무 다양하게 얽혀 자라고 있었다. 그는 산의 입구가 음지인지라 빛을 많이 받지 못해 생긴 현상일 거라고 생각해보려고 했지만, 어쨌든 사람도 없고 소리도 없는 것을 음지 탓을 하기는 어려웠다. 스산한 분위기 속에서 그는 비로소 점원이 귀신 어쩌고 저쩌고 했던 것이 해석 오류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는 기괴하고 불길한 생각들보다 빠르게 걸어보기로 마음먹었다. 생각보다 빠르게 걸으면 어쩌면 스산한 너머의 찬란한 햇살에 닿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그는 한층 더 분주히 움직였다.


하지만 산을 넘는 것은 그가 예상했던 것보다 곱절은 어려운 일이었다. 구불구불한 길은 수백 년은 된 것 같은 나무 등치들로 뒤엉켰고, 그 사이로 스미어 드는 얼마 되지도 않는 석양을 게걸스럽게 집어삼켰다. 돌과 흙, 뿌리와 낙엽으로 이루어진 오솔길은 어둠이 내리자 미로가 되어 그의 상념과 얽히기 시작했다. 그동안 산이라곤 뒷동산 같은 공원만 다녔던 그인지라 진짜 산의 느낌이 어떤 것인지 잊었던 것이 분명했다. 단단하고 평평한 도로가 아닌 자연 그 자체로 이루어진 산길은 발걸음을 잡아채고 시야를 현혹하는 살아있는 존재였다. 모든 발자국의 방향과 깊이는 직전과 달라야만 했고, 그는 넘어지기 않기 위해서 안간힘을 써야만 했다. 그는 발목으로 밀고 종아리로 당겼으며, 허벅지로 박차고 무릎으로 견디며 오르막을 올랐다. 다리에 불이 붙은 것 같고 호흡이 타들어가는 듯했지만 그는 끊임없이 스스로를 혹사시켰다. 간간히 나무 등걸 사이로 보이는 풍경은 그가 세상을 밑에 깔 수 있을 정도로 높이 올라왔다는 것을 보여주기는 했다. 하지만 그는 아직 올라가야 할 길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만족스러워하지는 못했다. 도시에 도착하기 위해선 내려가야 했지만, 내려가려면 우선 가장 높이 올라 봉우리를 넘어야만 했다. 높이 이른 뒤에야 하강이 시작된다는 순리는 지고하고도 자명한 것이라 그가 감히 거부하거나 희롱할 수 없는 종류의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꼭대기를 갈망했다. 하강을 위해 높은 곳을 갈망하는 그의 태도는 이지러지기 위해 차오르는 달이나 잊기 위해 배우는 현인들의 태도가 깃들어 있었다. 산행이 곧 명상이 되는 지점이 느린 석양과 함께 그에게 찾아들고 있었다.


가벼운 것들은 표면으로 가장 먼저 떠올라 가장 먼저 내려놓아졌다. 표피를 이루던 자만, 자긍, 식욕, 돈에 대한 걱정, 인정받는 것에 대한 부담과 갈망이 차례대로 떠올라 산길에 고이 놓였다. 그는 뒤돌아보지 않은 채 그곳에 생각과 존재의 사석으로 작은 석탑을 쌓았다. 


다음으로는 조금 무거운 것들이 떠올랐다. 그리움. 외로움. 괴로움. 부러움. 마음에 짙게 담겨 있지만 흘러나오지는 못했던 돌로 된 본질들이 조금 허물어지며 길의 표면에 수북이 깔렸다. 그는 인정하고 싶지 않은 무거움 들도 인정했다. 인정하자 그것들은 마음으로 들 수 있는 크기가 되어 서서히 떠올랐다. 그는 무거운 것들도 산길에 내려놓을 수 있었다.


가벼움과 무거움을 내려놓자 내려놓을 수 없는 것들이 표면으로 떠올랐다. 근간을 이루고 본질을 빚던 뼈아픈 질문들과 번뇌가 세상의 뼈에서 흐르는 불이 되어 그를 때리기 시작했다. 왜 사랑받고 싶을까. 왜 사랑받지 못할까. 왜 사랑받고서도 모를까. 왜 더 사랑하지 않을까. 이 답 없는 질문들이야말로 무문의 관에 그를 가두고 젊은 날의 그를 벼랑 끝으로 밀어내던 것들이었다. 그는 답이 없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으며 무문관의 심연을 수천번의 삶만큼 맴돌았었고, 결국 답을 버리며 질문을 버리고서야 그곳에서 탈출했었다. 하지만 그가 버렸다고 생각했던 그 질문들은 다시 심연과 함께 깨어나 그의 발걸음을 낚아채었다. 그는 아찔하게 가라앉는 기분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마치 물속에 깊게 잠수했을 때나 절벽에서 발을 헛디뎠을 때처럼 몸과 정신이 일순 다른 방향으로 움직였다. 그는 자신도 모르는 채에 자학과 자괴의 질문으로 잠겨 들기 시작했다. 해도 서산 너머로 잠겨 들고 있었다.


 



8화 2부에서 계속,


매주 수요일 토요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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