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이켜보면 처음 영화일을 시작했을 때는 좋아하는 사람들과 일하는 게 좋아서 이 일을 계속했었다.
그리고 그 좋아했던 사람들과 같이 일을 할 수 없을 때가 왔을 때는 좋아하는 작품을 했던 거 같다.
그리고 좋아하는 작품을 할 수 없을 때는 궁금한 감독, 제작사, 투자사와 일을 했다.
그렇게 기대하고 실망하고 다시 기대하고 실망하기를 반복하다 보니 어느새 15년이 지났다.
그리고 그 15년 동안 틈틈이 회사에 들어오라는 유혹을 받았었다. 하지만 '아직은 현장이 좋아요~'라는 이유로 거절했던 시기가 있었다. 그리고 현장이 마냥 좋지만은 않았을 때는 프리랜서로서의 삶을 불안해하면서도 프리랜서이기 때문에- 지금 하고 있는 작품은 아무리 힘들어도, 아무리 싫어도 결국 '끝이 난다'는 것. '끝이 있다'는 것에 매력을 느끼던 시기가 있었다. 그리고 그 매력마저 희미해진 후에는 아마도 직장인으로서 받는 월급보다는 비록 단기지만 프리랜서로서 받는 월급을 포기하기 힘든 시기도 있었다.
그리고 이 모든시기들을 거치면서 깨달은 바가 있다면... 제 아무리 익숙해진 일이라도 일이란, 결국 힘들다는 것! 그렇기에 좋은 작품도, 유명한 감독도, 많은 돈도 중요하지만- 결국 '누구와 함께 하느냐!'가 제일 중요하다는 것! 이젠 내가 이 일을 계속하는 뚜렷한 이유는 찾기 힘들지만, 아직은 이 일을 그만두고 싶지 않기에- 이 일을 더 오래 하기 위해서는 결국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해야 한다는 거다. 그래서 나는 직장인이 되기로 결심했다.
좋아하는 사람이 직장상사가 됐다.
어쩌다 보니 나의 오랜 친구 그리고 나의 사수와도 절친이었던 그녀를 만난 건 3년 전이다. 친구의 소개로 짧은 프로젝트를 함께 했고, 이후로도 종종 연락을 하고 지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사람이라 처음부터 그녀를 향한 마음이 열려있었던 걸까? 더 이상 열심히 하는 것을 열심히 하지 말자고 결심한 나에게 모든 일에 열심히인 그녀가 어쩐지 멋있어 보였다.
"나랑 함께 일해보지 않을래요?"
좋아하는 그녀가 뜻밖의 제안을 했다. 드라마가 궁금해 드라마일에 살짝 발을 담가보기도 했지만 영화와 드라마는 같은 듯하면서도 많이 다르다. 그런데 내가 잘하는(?) 영화일이 아닌... 잘 알지도 못하는 드라마일을 나한테 맡긴다는 다소 파격적인 제안이었다. 그것도 프리랜서가 아닌 직장인으로 함께!
모든 일에 열심히인 그녀를 좋아하는 것과 모든 일에 열심히인 그녀가 직장상사가 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잘 안다. 마흔이 넘어 잘하는 일을 하는 것도 힘든데 잘 알지도 못하는 일을 한다는 것역시 깊게 생각해보지 않아도 현명한 선택은 아니라는 것도 잘 안다. 그리고 더 이상 프리랜서가 아닌 직장인이 된다는 것 역시 얻는 것도 있겠지만 포기해야 하는 것들도 생긴다는 것도 잘 안다.
그러니까 이 모든 것을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나에겐어차피 힘들 일- 결국 '누구와 함께 하느냐!'가 더 중요했다! 그래서 나는 직장인이 되기로 결심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직장상사가 됐다.
아, 결국 내 일이구나!
그렇게 직장인이 된 지도 벌써 3개월이 넘었다. 무슨 일이든 3개월이면 일은 어느 정도 적응이 된다. 나 역시 그렇다.
물론 마흔이 넘어 잘 알지도 못하는 드라마일을 하고 있으려니 '다시' 막내인데 막내 아닌 막내 같은 마음으로... 매일매일 하기 싫은 일도 일단- '하자'고 다짐한다. 하지만 다시 막내가 됐기 때문일까?
마음 저 깊은 곳에서 '내가 지금 이 일을 왜 하고 있는 거지?!' '설마 이렇게 계속 일해야 하는 건 아니겠지?'
하는 아우성을 치고 있다. 그러니까 고작 3개월 만에 내마음이 순간순간 바닥으로 곤두박이칠 치고 있다.
"다음 달이나 돼야 할 수 있다는데 어떡하죠?"
"우리가 하자. 좋은 작품을 만드는 게 중요하니까"
(아, 결국 내 일이구나!)
"이건 저희가 할 일이 아닌 거 같은데 어떡할까요?"
"어쩔 수 없지.우리가 하자.이번 작품이 잘되면 다음 작품이 좀 더 수월할 거야!""
(아, 결국 내 일이구나!)
좋은 작품을 만드는 것도, 작품이 잘되는 것도 물론 너무중요하다. 하지만내가 할 일이아닌 거 같은데 이럴 때는 진심으로 모르는 척하고 싶다. 그냥 놔두면 못 참는 사람이 하지 않을까?
"괜찮아, 괜찮아! 내가 할게~"
(아, 결국 내 일이구나!)
모든 일에 열심히인 그녀를 좋아했다.
내가 좋아하는 그녀는 지금 나의 직장상사다.
내게도 좋지만 모두에게 좋은 그녀가 직장상사라는 것은 모든 일이 결국 내 일이 된다는 거다.
사실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일들은 모두 예상던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와 함께 하느냐'가 더 중요했기 때문에 '직장인'이 되기를 '선택'했다.
그녀를 좋아한다. 그리고 분명 그녀가 틀리지 않다는 것도 안다. 그런데 지금 이렇게 힘든 이유는 내가 고작 이 정도도 못 참는 사람이라는 것에 실망하고 좌절하고 있다. 지금의 이런 불필요한 마음들도 결국 지나갈 것이라는 것도 안다. 그래서 어떻게든 떨쳐내려고 하지만 자리에 앉을 때마다 알 수 없는 짜증이 계속 난다.
모든 일에 열심히인 그녀, 나의 직장상사 역시 새로운 직장에서 새로운 일들을 하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그리고 내가 맡은 일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의 많은 일을 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한결같이 하이텐션을 유지하고 있다. 그녀도 분명 힘들텐데... 혹시 그녀는 힘들지 않은 건 아닐까?
"안 그럴려고 해도 계속 짜증이 나... 나 그만둬야 하는 거 아닐까?"
고작 3개월이 지났을 뿐이지만 이대로는 큰 사고를 칠 거 같아 프리랜서로 오랜 시간 같이 일하다가 나와 비슷한 이유로 직장인의 삶을 선택한 오빠에게 연락을 했다.
"네가 짜증 나는 거- 그거 당연한 거야! 그녀가 하이텐션인 것도 당연한 거고! 각자의 역할이 다르니까...
그녀는 계속해서 일을 만들어야 하는 사람이잖아! 많은 사람들을 만나는 역할이기 때문에 언제나 하이텐션을 유지할 수밖에 없고, 너는 그녀가 벌려놓은 일들을 정리하는 사람이니까... 계속 짜증이 나는 거지"
"오빠는 괜찮아?"
"괜찮기는... 매일매일 짜증 나"
분명 나도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그런데 내가 지금 이렇게 짜증이 나는게 너무 당연한 거라는 말을 들으니... 내가 이상한 건 아니라는 사실에 어쩐지 조금은 위로가 됐다.
어떤 일이든 일은 어차피 다 힘들다. 그리고 무슨 일이든 지금이 제일 힘들다.
야근 없는 삶을 꿈꿨지만 현실은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 홀로 남아있다.
여기를 그만두고 다른 일을 한다 해도 어차피 결론은 '더 힘들다'는 것도 안다.
그래서 이 짜증 나는 상황까지 즐기는 사람이 되고 싶지만 감정은 거친 파도처럼 오르락내리락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