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Hazel Lee
Jan 11. 2020
아직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라는 제목의 책이 나오기 한참 전의 일이다.
친한 학교 후배와 '좋아하는' 누군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던 중,
그 아이가 이렇게 말했다.
"언니, 저는요. 진지한 인생 얘기를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떡볶이 얘기도 중요하거든요.
어제 먹은 떡볶이 얘기를 하는 것도 저한텐 되게 중요한데, 그 친구랑은 늘 진지한 이야기만 나누게 되는 거예요.
저는 떡볶이 같은 시시한 얘기도 하고 싶은데 말이에요."
그리고 나는 격하게 공감했다.
"맞아, 진짜 그래. 소소한 일상을 나눌 수 있는지가 사실 굉장히 중요한 문제인데 말야."
브런치를 시작하기 전,
각각 어떤 매거진을 만들 것이고 어떤 내용을 쓸 것인지 개요를 넘어 목차까지 대부분 완성한 상태였다.
특히 번역 매거진은 정보 위주의 글을 쓸 것인지, 사건 사고(...라고 하기엔 내가 너무 사고뭉치 같으니까 그냥 에피소드라고 해야지.) 위주로 적어나갈 것인지, 몇 달에 걸쳐 (생각날 때마다 틈틈이) 고민했고,
몇 개의 초안을 만들어 본 다음에야 지금의 형태로 완성되었다.
그런데 해야 할 얘기는 순차적으로 가고 있는데,
사이사이 쓰고 싶은 얘기가 아직도 많아서, 그런데 그 순서가 아직 오지 않아서,
그냥 혼자 답답했다.
<어쨌든 번역가>의 글은 잘 정돈된 글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해서,
마구마구 생각나는 대로 써제끼는 조각글을 쓸 수 없다는 점도 마음에 걸렸다.
그냥 시시껄렁한 이야기도 좀 하면 안 될까요.
그래서 원래 안정기(?)에 접어든 뒤 개설할 예정이었던 일상 매거진과,
까치설날에 첫 글과 두 번째 글을 올리기로 계획된 한국어 교육 매거진(공동 프로젝트)도 그냥 미리 만들기로 결심했다.
일상 이야기에 어쩔 수 없이 번역 이야기도 섞여 들어가겠지만, 뭐 괜찮겠지.
일러스트랑 같이 들어갈 예정인 네 번째 매거진도 하루빨리 선보일 수 있기를......!
일주일에 한 번 있는 기획회의 날.
긴 회의 끝에 집중력이 떨어진 번역가 H는 뜬금없이 친구에게 (답이 반쯤 정해진 것 같은) 질문을 던졌다.
"나 이 매거진 지금 만들래. 하찮은 일상이랑 하찮은 일기랑 뭐가 더 나아?
다른 매거진에도 '일기'가 들어갈 건데, 역시 일상이 나을까?"
"하찮다는 표현을 꼭 쓰고 싶은 거야? 부정적인 표현이잖아."
"앗, 그거 모르는구나. '하찮고 좋네요' 일화."
"그게 뭔데? 나 처음 들어봐."
키티 반지가 어쩌고...
하찮고 좋네요, 하고 끝날 때까지 끼고 있었대....... (중략)
그래서 목표는 하찮고 하잘것없고 시시콜콜 시답잖은 이야기입니다.
글을 쓸 때 번역가는 작가보다 제약이 훨씬 많다.
작가의 글은 창작의 영역이라 '시적 허용'에 훨씬 관대하지만, 번역가는 대체로 올바른 언어 규범을 지켜야 하기 때문에.
이런 직업병 때문인지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라는 책 제목을 처음 보았을 때,
'아... 비문이구나. "죽고 싶은데도 떡볶이는 먹고 싶어"라고 했어야 하는데.'라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다.
그런데 그 말을 입속에서 몇 번 되뇌어 볼수록,
그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래서,
그 제목이 훨씬 강렬하고 인상적으로 다가왔던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요즘은 정말 멋진 책 제목들이 많아서,
제목들만 쭉 훑어봐도 한 편의 시를 읽는 것 같을 때가 많아 즐겁다.
#저에게도부디그런감각을내려주세요
#매일하루의끝에시답잖은얘길하고싶은데
#하찮고좋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