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azel Lee Jan 11. 2020

시답잖은 얘길 하고 싶어서



아직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라는 제목의 책이 나오기 한참 전의 일이다.

친한 학교 후배와 '좋아하는' 누군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던 중,

그 아이가 이렇게 말했다.


"언니, 저는요. 진지한 인생 얘기를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떡볶이 얘기도 중요하거든요.

어제 먹은 떡볶이 얘기를 하는 것도 저한텐 되게 중요한데, 그 친구랑은 늘 진지한 이야기만 나누게 되는 거예요.

저는 떡볶이 같은 시시한 얘기도 하고 싶은데 말이에요."


그리고 나는 격하게 공감했다.


"맞아, 진짜 그래. 소소한 일상을 나눌 수 있는지가 사실 굉장히 중요한 문제인데 말야."



  




브런치를 시작하기 전,

각각 어떤 매거진을 만들 것이고 어떤 내용을 쓸 것인지 개요를 넘어 목차까지 대부분 완성한 상태였다.

특히 번역 매거진은 정보 위주의 글을 쓸 것인지, 사건 사고(...라고 하기엔 내가 너무 사고뭉치 같으니까 그냥 에피소드라고 해야지.) 위주로 적어나갈 것인지, 몇 달에 걸쳐 (생각날 때마다 틈틈이) 고민했고,

몇 개의 초안을 만들어 본 다음에야 지금의 형태로 완성되었다.


그런데 해야 할 얘기는 순차적으로 가고 있는데,

사이사이 쓰고 싶은 얘기가 아직도 많아서, 그런데 그 순서가 아직 오지 않아서,

그냥 혼자 답답했다.  


<어쨌든 번역가>의 글은 잘 정돈된 글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해서,

마구마구 생각나는 대로 써제끼는 조각글을 쓸 수 없다는 점도 마음에 걸렸다.

그냥 시시껄렁한 이야기도 좀 하면 안 될까요.







그래서 원래 안정기(?)에 접어든 뒤 개설할 예정이었던 일상 매거진과,

까치설날에 첫 글과 두 번째 글을 올리기로 계획된 한국어 교육 매거진(공동 프로젝트)도 그냥 미리 만들기로 결심했다.

일상 이야기에 어쩔 수 없이 번역 이야기도 섞여 들어가겠지만, 뭐 괜찮겠지.


일러스트랑 같이 들어갈 예정인 네 번째 매거진도 하루빨리 선보일 수 있기를......!







일주일에 한 번 있는 기획회의 날.

긴 회의 끝에 집중력이 떨어진 번역가 H는 뜬금없이 친구에게 (답이 반쯤 정해진 것 같은) 질문을 던졌다.


"나 이 매거진 지금 만들래. 하찮은 일상이랑 하찮은 일기랑 뭐가 더 나아?

다른 매거진에도 '일기'가 들어갈 건데, 역시 일상이 나을까?"

"하찮다는 표현을 꼭 쓰고 싶은 거야? 부정적인 표현이잖아."

"앗, 그거 모르는구나. '하찮고 좋네요' 일화."

"그게 뭔데? 나 처음 들어봐."


키티 반지가 어쩌고...

하찮고 좋네요, 하고 끝날 때까지 끼고 있었대....... (중략)


그래서 목표는 하찮고 하잘것없고 시시콜콜 시답잖은 이야기입니다.






글을 쓸 때 번역가는 작가보다 제약이 훨씬 많다.

작가의 글은 창작의 영역이라 '시적 허용'에 훨씬 관대하지만, 번역가는 대체로 올바른 언어 규범을 지켜야 하기 때문에.


이런 직업병 때문인지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라는 책 제목을 처음 보았을 때,

'아... 비문이구나. "죽고 싶은데도 떡볶이는 먹고 싶어"라고 했어야 하는데.'라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다.


그런데 그 말을 입속에서 몇 번 되뇌어 볼수록,

그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래서,

그 제목이 훨씬 강렬하고 인상적으로 다가왔던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요즘은 정말 멋진 책 제목들이 많아서,

제목들만 쭉 훑어봐도 한 편의 시를 읽는 것 같을 때가 많아 즐겁다.




#저에게도부디그런감각을내려주세요

#매일하루의끝에시답잖은얘길하고싶은데

#하찮고좋네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