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이 넘는 기간 과제와의 싸움을 끝내고, 가장 먼저 하고 싶었던 건 과제와 전혀 상관없는 글을 읽는 것이었다.
허기가 졌다. 오랜 시간 학문적이지 않게 살아온 내가 학문적인 글로 내 생각을 표현해야 했더니 아주 진절머리가 났다. 조신한 여자를 좋아한다는 남자의 마음에 들고 싶어서 무리해서 나에게는 없는 여성스러운 모습을 연기한 것 같은, 그런 허무한 맛이 입안에 계속 맴돌았다.
이제부터 찰나의 연휴 동안은 효용성이라고는 없는 쓰잘데기 없는 글들을 읽고 싶었다. 지성의 정수를 파헤치는 글이 아니라, 삶의 병변을 맴도는 그런 두리뭉술한 그런 글들. 읽어도 하나마나한 글들. 나아가기 위해 읽는 글은 그만 읽고 싶었다. 내가 그리워하는 독서는 내 안의 무언가를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이리저리 자극시키는 경험이었다. 내 삶이 아닌 아예 다른 삶에서 이리저리 헤매고, 결국에는 설명하지 못할 오묘한 감정만이 남아있는 그런 혼란스러운 경험.
책장에서 폴 오스터의 브루클린 폴리 The Brooklyn Follies를 꺼내 들었다. “I was looking for a quiet place to die.” 로 시작하는 이 이야기 세계를 무척이나 애정한다. 이미 여러 번 읽었지만 문득 다시 읽고 싶어 질 때가 있다. 위트 있는 문장에, 삶의 모서리를 지나는 매력적인 캐릭터에, 세상을 관조하는 태도, 문득 다정한 말들. 그래서 삶에 지쳤을 때 다시 찾게 된다. 이런 책이 내 인생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위안이 되고, 언제고 기댈 수 있다는 생각에 든든해진다.
그리고는 밀리의 서재의 연간 회원권을 갱신하고 한국어 책을 잔뜩 다운 받았다. 이제 나는 비행기에 오를 준비가 된 것 같다. 이 자리를 떠난다는 생각만으로도 지금 나를 못살게 굴고 있는 이 몸살기운이 떨어지는 것만 같다. 나는 에딘버러를 사랑하지만, 완전히 사랑에 빠져버렸지만, 우리는 조금 거리를 둘 필요가 있는 것 같다. 나는 공부하는 사람이라는 자리에서 벗어나서 나태하고 잉여로운 사람으로 연말을 지내볼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