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20일차: '요정들의 호수' 플리트비체 국립공원에서 길을 잃다
플리트비체 국립공원은 16개의 호수와 90여개의 폭포가 장관을 이뤄 영화 '아바타'의 모티브가 됐다. 탐방로는 2시간 코스부터 8시간 코스까지 다양한데, 나는 3~4시간이 소요되는 B코스(4km)를 선택했다. 입구에 들어서자 여러 줄기의 폭포가 협곡을 따라 흘러내리는 장엄한 광경이 연출됐다. 앞으로 또 얼마나 멋진 풍경이 기다리고 있을지 들뜨고 흥분됐다.
입구 전망대를 내려가니 청록색 물감을 뿌려 놓은 듯한 호수와 그 위를 떠다니는 청둥오리가 보였다. 투명한 옥색 빛의 호수는 요정이 살 것만 같은 신비감을 자아냈다. 두 눈으로 보고 있어도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만큼 아름다웠다. 맑은 물 속에서 뛰노는 송어 떼는 관광객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사람들이 몰렸지만 송어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유유히 물 속을 헤엄쳤다.
절경에 빠져들어 '조금만 더 가보자'를 반복하다가 선착장에서 너무 멀리 와버리고 말았다. 하는 수 없이 B코스가 아닌 C코스로 탐방을 끝까지 이어갔다. 밀림 속 오르막길을 지나자 큰 폭포가 눈앞에 나타났다. 절벽 아래로 세차게 물줄기를 뿜는 폭포를 보니 모든 근심 걱정이 씻겨 내리는 기분이었다. 동학에 울려 퍼지는 폭포 소리는 가슴을 뻥 뚫리게 해줬다.
쉼터에서 넓은 호수를 조망하며 잠시 휴식을 취했다. 오후 3시부터 또다시 걷기 시작했는데 아무리 가도 출구가 보이지 않았다. 비슷한 풍경이 계속 겹쳐서 감흥도 떨어지고 몸도 점점 지쳐갔다. 험준한 등산길을 마주한 순간 길을 잘 찾아온 게 맞는지 의구심이 깊어졌다. 그 많던 사람들도 사라지고 혼자 남겨져서 무섭고 답답했다. 해가 지기 전에 빨리 산속을 빠져나가야 할 것 같아서 무엇에 쫓기는 사람 마냥 발걸음에 속도를 냈다.
앞만 보고 40분 넘게 직진할 즈음 한 커플이 반대편에서 걸어왔다. 정말 오랜만에 사람을 만나서 반가웠다. 출구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안심도 됐다. 내가 "버스 정류장이 어디예요?"라고 묻자 그들은 "바로 근처예요. 거의 다 오셨어요"라고 답했다. 5분 후 마침내 St.3에 도착했다. 많이 걸어서 힘들었지만 어쨌든 버스 정류장까지 무사히 와서 다행이었다.
서울랜드의 코끼리 열차를 닮은 버스를 타고 St.2에서 하차했다. 플리트비체 공원에 마지막 인사를 건네고 입구2로 나갔다. 대로변에 있는 버스 정류장에서 자그레브행 플릭스 버스를 기다리다가 5시 15분에 버스에 탑승했다.
자그레브 버스 터미널에서 내려 반 옐라치치 광장으로 이동했다. 저녁 8시가 되도록 햄버거 하나만 먹어서 배가 무척 고팠다. 플리트비체에서 5시간 동안 열심히 걸었던 나에게 보상을 주고 싶어서 스테이크 맛집인 카푸치너에 갔다. 수제 맥주로 먼저 목을 축이면서 하우스 스테이크를 기다렸다. 잠시 후 침샘을 자극하는 영롱한 빛깔의 스테이크가 등장했다. 얼른 고기를 썰어서 한 입 먹었더니 입에서 살살 녹았다. 사워크림이 듬뿍 올라간 통감자도 부드럽고 맛있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숙소에서 Mnet '퀸덤' 영상을 보며 길었던 하루를 마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