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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노 May 04. 2021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살아야겠다

여행 23일차: 푸른 바다와 갈색 지붕이 발 아래 펼쳐진 흐바르 섬

2019.10.14 여행 23일차 크로아티아 스플리트-흐바르

스플리트 숙소에서 바라본 풍경
스플리트 숙소에서 바라본 풍경

곤히 잠들어 있다가 종탑에서 종소리가 울려 눈을 떴다. 시계를 확인해보니 오전 6시였다. 다시 잠을 청했는데 한 시간 뒤 또다시 종소리가 울려 잠에서 깼다. 원래 예정보다 일찍 일어났지만, 휴대폰 알람 대신 종소리를 듣고 기상하는 색다른 경험을 해서 기분이 좋았다. 

스플리트 항구로 가는 길
유람선 안에서 바라본 스플리트
유람선 안에서 바라본 스플리트

테라스에서 상쾌한 공기를 마시며 전망을 감상한 후 아침을 먹었다. 토스트기로 식빵을 구워 먹었는데, 바삭하고 맛있어서 잼도 안 바른 토스트를 5개나 해치웠다. 냉장고에 있는 우유와 함께 먹으니 더욱 꿀맛이었다. 10시에 흐바르로 가는 유람선을 타야 해서 9시 20분에 숙소를 나왔다. 스플리트 항구의 많은 유람선 중 내가 예약한 회사의 이름이 적힌 유람선을 찾아 탑승했다. 창가 자리는 만석이라 어쩔 수 없이 복도 자리에 앉았다. 스플리트에서 멀어질수록 빨간 지붕의 오래된 건물들과 바다가 한눈에 보여서 아름다웠다. 

흐바르 항구
흐바르
흐바르
흐바르
흐바르
흐바르 맛집 달마티노의 식전주와 식전빵
흐바르 맛집 달마티노에서 먹은 참치 스테이크와 화이트 와인
흐바르 맛집 달마티노에서 먹은 참치 스테이크

1시간이 지나 흐바르 항구에 도착했다. 야자수가 많아서 휴양지 느낌이 물씬 풍겼는데, 스플리트보다 사람이 덜 붐벼서 좋았다. 아기자기한 소도시의 매력에 푹 빠져 사진을 찍다가 점심을 먹으러 달마티노에 갔다. 메뉴판을 들고 온 직원은 나에게 "어디에서 왔어요?"라고 영어로 물었다. 내가 "한국에서 왔어요"라고 답하자 그는 한국어로 "서울? 대전? 대구? 부산? 제주?"라고 되물었다. 크로아티아의 작은 섬에 사는 현지인이 우리나라 말을 유창하게 해서 신기했다. 나는 참치 스테이크와 화이트 와인을 주문했다. 참치 스테이크는 고기는 물론 사이드 메뉴인 샐러드, 튀긴 양파, 버섯도 무척 맛있었다. 다 먹고 나니 직원이 "맛있게 드셨나요?"라며 식후주를 두 잔이나 주었다. 친절하고 따뜻하게 나를 맞이해준 직원이 고마워서 팁을 왕창 내고 식당을 빠져나왔다. 

스파뇰 요새로 가는 길
스파뇰 요새로 가는 길에 마주한 풍경
스파뇰 요새로 가는 길에 마주한 풍경
스파뇰 요새
스파뇰 요새
스파뇰 요새
스파뇰 요새
스파뇰 요새

식사를 했으니 이제 걸으면서 소화를 할 시간. 흐바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스파뇰 요새로 향했다. 계단이 많아서 중간중간 휴식을 취하며 천천히 올라갔다. 입장료를 내고 요새 안으로 들어가니 푸른 바다와 갈색 지붕의 마을이 발 아래로 펼쳐졌다. 드넓은 아드리아해가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모습은 정말 환상적이었다. 세상은 넓고 아름답다는 사실을 다시금 상기시켜주는 풍광이었다. 


몇 시간 전 우리나라 유명 연예인이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는 보도를 접한 후 온갖 상념에 젖어 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살아야 할 이유를 찾은 것만 같았다. 고인이 살아생전에 겪었던 고통을 감히 내가 헤아릴 수는 없지만, 이렇게 멋진 풍경을 감상하면서 삶의 따스한 면을 발견했다면 지금과 다른 결정을 내릴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안타까움이 들었다. 부디 하늘에선 평안하길.

스파뇰 요새 카페
스파뇰 요새에서 바라본 흐바르 전경
스파뇰 요새에서 바라본 흐바르 전경
흐바르 전경
흐바르 전경
흐바르 전경
흐바르 전경

요새를 돌아다니다가 갈증이 나서 카페에 들렀다. 테라스에 앉아 여유롭게 아이스 라떼 한 잔을 즐긴 뒤 다시 투어에 나섰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전망이 보이는 각도가 변해서 유유히 요새를 거닐었다. '이제 그만 구경하고 가야지' 싶다가도 환상적인 경치에 매료돼 쉽게 자리를 뜨지 못했다. 2시간 30분이 지나서야 요새와 작별하고 계단을 쭉 내려갔다. 

흐바르 전경
흐바르 전경
흐바르 골목
흐바르 골목
흐바르 골목
흐바르 식당 Paladini
Paladini에서 먹은 화이트 와인과 해산물 리조또

흐바르 골목에는 예술품을 파는 상점이 많았다. 가게 안을 기웃거리자 한 남자 아이가 "헬로"라고 인사를 건넸다. 어딘지 모르게 시골 소년의 순박함이 묻어나서 절로 '엄마 미소'가 지어졌다. 골목 구석구석을 누빈 후 저녁을 먹으러 식당 Paladini에 갔다. 테라스가 정원처럼 꾸며져 있어서 분위기가 아늑했다. 나는 해산물 리조또와 화이트 와인을 주문했다. 리조또는 시고 짰지만 홍합, 오징어 등 해산물이 싱싱해서 먹을 만했다. 

흐바르 야경
흐바르 야경
흐바르 야경
흐바르 야경

다 먹고 나오니 유람선 출항 30분 전인 저녁 7시였다. 흐바르의 특산품인 라벤더와 마그넷을 구매하고 늦을까봐 부랴부랴 항구로 뛰어갔다. 다행히 아직 배는 보이지 않았다. 유람선을 기다리는 동안 마지막으로 흐바르의 풍경을 눈에 담았다. 아담한 항구를 따라 늘어선 마을과 언덕 위에서 밝게 빛나는 스파뇰 요새에 눈길이 머물렀다. 전날만 해도 스플리트가 마음에 들어서 '흐바르에 가지 말고 스플리트에 있을까?' 고민을 했는데, 오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이번에도 소도시는 날 배신시키지 않았다. 

유람선에서 본 스플리트

흐바르를 떠나는 아쉬움을 뒤로 하고 스플리트행 유람선에 탑승했다. 30분이 지났을까? 갑자기 배가 멈춰서더니 크로아티아어로 안내 방송이 나왔다. 곧이어 몇몇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순간 '사고가 났구나' 싶어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세월호와 헝가리 유람선 침몰 사고를 뉴스로 접한 이후 배를 탈 때 항상 불안감을 안고 있었던 터라 더욱 당황스럽고 무서웠다. 극심한 공포감에 휩싸여 머리가 하얗게 됐는데, 알고보니 사고가 발생한 게 아니라 다른 선착장에 들르기 위해 배가 잠시 멈춘 것이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안도감이 드는 한편, 나의 겁쟁이 면모가 훤히 드러난 것 같아 뻘쭘했다. 평소에도 일어나지 않은 일을 미리 걱정하느라 쓸데없는 에너지를 소모하고 있는 건 아닐까 내 자신을 돌아보게 됐다. 

스플리트 야경
스플리트 야경
스플리트 야경
열주 광장
열주 광장

8시 30분에 스플리트 항구에 도착해 열주 광장으로 걸어갔다. 기타 연주자가 잘 보이는 곳에 착석한 뒤 카페 룩소에서 생맥주를 시켰다. 시원한 맥주 한 잔에 감미로운 기타 선율이 더해지니 하루의 피로가 싹 풀리는 느낌이었다. 세계 각국에서 온 사람들이 빙 둘러앉아 다 같이 음악을 즐기는 자유로운 분위기도 너무 좋았다. 한 커플은 흥을 주체하지 못하고 스테이지로 나와 춤을 추기 시작했다. 현란한 춤 솜씨는 아니었지만 지금 이 순간 서로가 함께하고 있다는 그 자체만으로 행복해 보였다. 기타 연주가 끝나자 여성은 공중제비를 돌며 피날레를 장식했다. '이게 바로 여행의 묘미지!'라는 생각이 들었던 잊지 못할 스플리트의 마지막 밤이었다. 

스플리트 숙소에서 본 종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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